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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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 흔한 레퍼토리지만 좀 다르다. 아이들은 낮은 점수를 맞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계층상승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할 하위계층 아이들이 공부 안하는 것을 더 긍정적으로 여긴다. 니트족도 특이하다. 사회에 적응할 수 없어 골방에 처박히는 게 아니다. 일하지 않은 것을 합리적이고,현명한 “선택”으로 여긴다.

우치다 타츠루가 제시하는 진단은 이렇다. 모든 것을 “등가교환”으로 평가하는 시장논리가 교육과 노동현장에 파고들어온 결과라고. 막스적인 애기를 하자면 갑과 을이 교환된다는 것은 갑과 을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공통적인 척도가 있기 때문이다. 막스는 이것을 노동시간이라고 했는데 천원짜리 물건을 산다는 것은 천원이라는 무형의 척도가 천원이라는 종이와 물건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돈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가치를 수량화하고 위계화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의 개별성, 특이성은 무시되고 모든 가치는 평준화된다. 만약 갑과 을의 관계가 =이 아니라 >,< 상태가 된다면 누군가는 교환 자체를 포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시장”에 들어온 교육“소비자”는 선생들의 제시하는 교육"상품"에 어떻게 “값”을 매길까? 이 때 학생들이 제시하는 “화폐는” 수업을 집중해서 들을 때 발생하는 불쾌감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외면하는 것은 교육상품을 싸게 사기 위한 일종의 후려치기 전략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학력이 더 이상 입신양명의 보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 투자가치가 낮은 상품에 신경 쓸 이유가 없는 현실을 하위계층의 아이들이 더 잘 인식하고 있고, 그런 현실인식이 역설적으로 그들을 더 하류지향적으로 만든다. 이 “소비자”들의 특징은 “자기완결성” 이다. 물건을 사기전과 사기 후의 주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배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주체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 배움이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도 마찬가지다. 임금은 항상 기대치 혹은 등가관계보다 낮기 마련이고, 등가교환의 소비주체는 노동시장에서 항상 밑지는 장사를 하기 마련이다. 소비주체는 결국 “합리”적인 니트 상태로 돌입한다. 우치다 타츠루에게는 이것 역시 불합리하다. 노동에는 필연적으로 여분이 발생하고, 여분은 누군가에게 증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누군가로부터 증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나올법한 애기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무시하자. 오히려 하루키의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라는 말이 감각적으로 와 닿을지 모른다. 싫든 좋든 우리는 이 세상에 연결되어 있고, 내가 먹은 점심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과 연결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때문에 노동의 본질은 선택과 결정이 아니라 그것이 “의무”라는 것이다.

읽다 보면 약간 거부감이 생기는 대목. 이 주장을 좀 매도하자면 “니가 뭘 아니, 시키는 대로 해”하는 애기일 수 있다.(비슷한 예로 어른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가 있다) 근데 나만 해도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왜 그 인간들 말에 순종했을까”하고 후회하지 않았던가.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주체를 변화시키는 배움”은 진짜 스승이 있을 때 가능한 애기 아닐까?

잉여분을 타인에게 증여해야 한다는 애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2년정도 백수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취직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가 일본 배낭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직장인은 한 곳에 매여있는 노예라는 관점이 있는데(고미숙 선생님의 백수론같은 느낌?) 내가 여행에서 느낀 것은 그렇게 매여있는 사람들 덕분에 나의 일본 여행이 가능했다는 거다. 사람은 어쨌든 일하면서 사는구나 하고 그 때 느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키에르케고르의 질문에 로댕은 사람은 일하면서 산다고 답했다고 한다.허영만의 만화 “미스터큐”에 등장한다) 하지만, 나의 증여분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가져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요새 내가 다시 하는 고민이다. 교육과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 적어도 이 책에는 없는 것 아닐까.(우치다타츠루가 아마 몰라서 애기 안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우치다 타츠루의 애기는 결국 주체와 타인과의 관계짓기로 이어진다. 소비주체로 자신을 한정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고립되며 자기결정,자기책임론에 함몰되어 리스크 헤지에도 실패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차라리 “서로 피해주자”라고 애기한다.(이 이야기는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으로 이어진다.) 

자, 그럼 감자줄기처럼 이어지는 다음 질문. 나,자아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 규정되는가,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는가? 자유란 무엇인가? 나와 타인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공동체란 과연 무엇일가? 등등... 답은 (아마도 한참 뒤의)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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