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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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다. 산부인과에서 진통을 시작한 임산부에게 의사가 말한다.“ㅇㅇ씨, 혼자만 애 낳는 거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모든 여자들이 하는 거니까 유난 떨지 말라는 애기다)  죽음과 소멸도 마찬가지 아닌가. 죽음도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고, 유난 떨 일이 아니다.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 장례식은 흔해 빠졌고, “죽음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죽음은 당연히 최대의 행사이다. 그 행사는 상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근접체험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벽한 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인가. 체험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무가 아니다.
  오래전에서 지하철로 통근하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고통의 리스트를 작성한 적이 있다. 지금은 잊어버렸는데, 허리가 아픈 것, 직장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것 등등이 그 리스트의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런 작업을 최근에도 출근길에 머리를 굴려가며 계속했다. 어쩌면 일터가 나에게 고통을 상기시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어쩌면 “유레카”인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아무리 고통에 대해 상상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체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고통이 나를 덮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전까지는 고통을 아무리 상상해봤자, 그것은 실재가 아니고, 나는 나의 고통을 실감할 수 없다. 죽음도 그런 것 아닐까. 아니 모든 순간이 그런 것 아닐까.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지만, 그 순간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그것을 실감할 수 없고, 그것이 지나간 후에 그것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매 순간은 장례를 치르며 죽어나간다... 그런 생각을 한 이후로 그 "뻘짓"을 그만두었다.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완벽하게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 체념일테고, 무기력이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불안에서의 해방일 수도 있다. 주인공의 몸 속에는 몇 개의 스텐이 박혀 있는 걸까? 작가는 마치 독자를 짜증나게 하려는 듯이 그 설명을 꼬장꼬장하게 늘어놓았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무기력하다. 게다가 “각오한다고 각오가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의 표현대로 “버티고 서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어쩌면 모든 순간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른다. 지구가 생긴 후 수만 번의 우연과, 수 만번의 필연이 , 그 수만번의 필연과 수만번의 우연이 우연적으로 뒤섞여, 지금의 순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주는 무거움. 어쩌면 온전히 순간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책 제목이 불만이었다. 60대에 30대의 트로피와이프를 얻는 사람이 왜 <에브리맨>이라는 말인가. 그 역시 죽음을 앞두고 후회와 고통에 찬 노년을 보냈다는 점에서 <에브리맨>의 고통을 겪긴 했지만 말이다. <에브리맨> 에는 소멸과 죽음에 관련한 대부분의 코드가 들어가 있다. 무기력, 수치심,외로움,후회, 자책, 분노... 우리는 언젠가 소멸할 운명이며 우리가 탄생해야 했을 필연은(의미는) 없다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주인공은 그림그리기로 빈곳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한 때 그를 지배했던 육체적 욕망도 육체의 쇠퇴와 더불어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 텅 빈 곳을 채워주어야 할 인간관계를 주인공은 그 동안 하나씩 파괴해 왔다. 종교를 믿지 않는 주인공은 부모님의 묘지에서 묻혀있는 뼈를 상상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야근 후 텅 빈 방안에 들어서던 금요일 저녁을 떠올리며 공감했다.).
  작가는 주인공의 고통을 통해 “뿌린대로 거둔다”라는 격언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젊은 시절 “신뢰”를 무시하고 욕망을 좇아다닌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일까? 적어도 주인공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세동기가 묻힌 자신의 가슴을 쳐댔다. 아니면 보험사 직원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은 게 실수인 걸까. 취미생활 조금, 일 조금, 노년의 빈 곳을 채워 줄 인간관계에 조금, 투자를 해서 리스크를 분산하는게 전략일텐데. 혹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주변을 배려하며”살아야 했을까.
  만약 이혼하지 않고 살았더라면 주인공의 노년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노년의 후회에는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단골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가장 후회하는 세 번째 결혼 역시 나름의 가치가 있는 관계였는지 모른다. 에로틱한 연결 고리로 이어진 관계도 분명히 하나의 색깔과 표정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말년을 소진했지만, 죽음과 노년, 삶에 대한 다른 관점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나는 믿는다. 생뚱맞게 떠오른 만화의 대사(“헬로우 블랙잭” 이란 만화다.) “죽음이 패배라면 모든 인간은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가 자살했을 때, 혹은 스콧 니어링이 자살했을 때 그들은 패배감에 시달리며 죽어 갔을까. 정황을 아직 알지 못하지만, 다른 시각도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어떤 갑론을박을 늘어놓느냐와 상관없이 그것은 공평하고, 단호하게 모두를 찾아온다. 주인공의 상관인 클레런스처럼 상찬을 받는 죽음이든, 주인공처럼 불현 듯 현관문을 노크하는 죽음이든, 죽음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영화 “아무르”에서처럼  사랑까지 모두) 갑자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것처럼 우리를 찾아온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어이쿠 얼른,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지, 그래서 무언가를 이어가야지 혹은 연금저축에 들어야 겠군, 아니면. 교회를 다시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우리를 찾아온다. 가끔.  주인공처럼 서른 넷에 그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서른 넷에 그것을 체험할 수는 없다. 혹시 타인의 일생과 죽음을 엿보고 추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읽더라도 마찬가지다. 알 수 없다. 그것이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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