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첫 소설로 내용은 오사카 출신의 주인공이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름방학에 고향으로 와서 친구와 함께 15일 동안 지내는 맥주 일기다.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좋겠지만 짧은 책에 비해 내용은 고고(높고 오래되고) 하다.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청춘은 늘 죽음을 생각하고 나이 듦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는 당시의 하루키의 내면과 비슷하다. 하루키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생들은 격렬한 시위와 정부의 폭력이 가미된 진압이 부딪히는 시기였다.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고민이 많았고 그 고민을 위로해 주는 건 일본 순문학이 아니라 학창 시절부터 읽었던 세계문학이었다. 그리고 동네를 다니며 들었던 레코드 가게의 음악들. 재즈와 클래식 그리고 풍부한 팝.


글을 쓰고 싶었던 하루키는 자신 같은 인간은, 평범한 인간은, 막연하나마 작가가 되려고 했던 것에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흥미조차 나지 않았다. 대학 가는 장기간의 휴업에 돌입하고 하루키는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즈를 실컷 듣고,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파스타에 대해서 눈을 뜬다. 그때 문학을 전공하는 아내인 요코를 만나 결혼을 해버리는데, 요코를 만나는 그 순간과 과정을 노르웨이 숲에 미도리를 만나는 와타나베를 보며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빚을 끌어서 우리가 잘 아는 재즈 바 피터 캣을 운영한다. 그러면서 흥미를 잃었던 소설에 대해서 써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다. 하루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여러 번 읽고 카프카의 소설도 학생 시절에 다 읽었다. 그러면서 소설을 쓰려고 하면 이런 작가들보다 뛰어난 소설을 쓰지 못하면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야구를 보다가 문득 '왜 내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카프카보다 잘 써야 하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도스토옙스키나 카프카에 초점이 가 있는 게 아니고 ‘~보다’에 초점이 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내가 좋아서 쓰는, 나를 위해 소설을 쓰는 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 유명한 진구구장의 야구를 건방지게 벌러덩 누워 맥주를 홀짝이며 보다 깨닫게 된다. 나의 이야기, 나를 위해, 누구와 비교하지 않는 소설을 쓰자.


모든 소설가의 첫 소설은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 식탁 위에서 탄생되었다, 라는 말이 있듯이 하루키는 피터 캣의 장사가 끝난 새벽에 소설을 쓰기 작했다. 그 적막과 그 고요, 그리고 고독을 가득 끌어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독하지 않았으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때, 몸은 피곤에 절어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그 몸을 이끌고 소설을 쓰는 그 순간이 아주 행복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쓰는데 문체가 하루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통 우리가 하루키의 문장을 따라 하듯이 하루키 역시 이전에 읽었던 작가들의 문체를 따라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키는 고민 끝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영어로 먼저 적었다.


처음으로 탄생한 영문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보면 아직 발걸음 수준이었다고 한다. 문장도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며 유치했다. 그런데 그 문체는 아주 신선했고 어떤 작가도 하지 않은 문장이었다. 이 첫 소설은 하루키가 몇 페이지를 영어로 먼저 쓰고, 그걸 다시 일본어로 번역을 해서 차곡차곡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쥐의 3부작의 첫걸음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탄생이 되었다.


비켜간 이야기로 에픽하이의 타블로의 소설집‘당신의 조각들’도 무척이나 좋다. 우리나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문체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주 신선했다. 타블로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활하면서 이 소설을 영어로 적었다. 내용도 꽤나 독특했다. 또 음악 씬에서 거의 신으로 불리는 이승열 역시 유앤미 블루 시절부터 가사를 영어로 먼저 작사한 다음 한글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사실 유앤미 블루는 유투가 다시 한국적으로 환생한 것 같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좋은 이유를 찾자면 주인공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주인공 ‘나’는 글을 쓰는 일을 몹시 고통스러워해서,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고, 사흘 밤낮을 계속 썼는데 모두 엉뚱한 내용인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라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나이는 어리지만 알게 된 것이 있다.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글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간단하기 때문이라는 걸.



오늘의 선곡은 막막한 대해에 한줄기 빛과도 같았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음악 비치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스https://youtu.be/KcrbDYe4qL4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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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옛날 핫도그를 먹었다. 음식이라는 게, 먹으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음식들이 있다. 핫도그도 꼭 그렇다. 요즘의 핫도그는 간식이라기보다 식사대용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를 먹고 나면 어쩐지 식사를 해버렸다는 느낌에 핫도그를 자주 사 먹게 되지 않는다. 핫도그를 너무 좋아해서 없으면 나 죽어!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상하지만 핫도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자주 먹지는 않는다. 요즘에 나오는 핫도그는 모양이나 맛도 다양해져서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정말 이만한 크기에 감자튀김이 박힌 핫도그는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핫도그 전문점에서 핫도그를 고를라치면 선택 장애가 온다. 세상은 편리해지고 다양해진 대신 선택 장애 역시 늘어난다. 서브웨이처럼 너무 다양한 핫도그가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핫도그는 오래전 기본적인 핫도그가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삼겹살도 그렇다. 삼겹살이 세상에 도래하고 난 후 삼겹살 시장은 아주 커졌다. 그러다 보니 삼겹살 집들은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와인 삼겹살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된장 삼겹살, 카레 삼겹살, 금을 입힌 삼겹살 등 여러 가지 삼겹살이 나타났었다. 사람들은 맛과 재미를 느끼며 삼겹살을 불판 위에서 구워 먹었다. 그게 한 2000년도에 유행을 탔다. 그러다가 유행이 시들해지더니 싹 다 없어지고 지금은 대부분 기본의 맛, 삼겹살 본연의 맛을 찾아서 먹고 있다. 나처럼 쌈도 안 싸 먹는 인간에게 여러 가지 첨가물이 들어간 삼겹살 구이가 그냥 삼겹살보다 맛이 더 있을 리 없다.


짜장면도 종류가 많다. 유니 짜장, 사천짜장, 간짜장, 백짜장 등 여러 짜장면이 있지만 가장 많이 먹는 짜장면은 그냥 기본적인 짜장면이다. 기본이 가장 맛있고 기본이 맛있는 집은 늘 손님이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본을 찾게 된다. 그건 어떤 음식이나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짜장면을 안 먹은 지도, 코로나 전에 먹어보고는 아직이다. 일 년, 일 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소 이에바, 핫도그도 그렇게 해서 다시 회귀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핫도그는 들고 먹는 맛도 맛이지만 핫도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어릴 때에는 눈이 빠지도록 바라봤다. 나무젓가락에 분홍 소시지가 끼워지고 밀가루 반죽에 몇 번 돌려서 옷을 입힌 다음 튀김가루를 묻혀 젓가락을 꼽을 수 있게 제작된 기름통에 하나씩 넣어서 튀긴다. 들어가는 순간 촤르르 하며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핫도그가 익어간다. 다 익으면 주인이 꺼내서 설탕과 케쳡을 발라준다. 핫도그에 뿌린 설탕은 왜 더 맛있을까. 뜨거울 때 바로 먹는 그 맛. 특히 겨울에 포장마차에 서서 뜨거운 핫도그를 먹으며 어묵 국물을 홀짝이는 맛은 행복이었다.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핫도그를 먹으면 먹는 방법도 천차만별이었다. 게 중에는 꼭 소시지는 마지막까지 사수한 다음 한 번에 먹는 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먹어봐야 맛있을 리도 없을 텐데 꼭 그렇게 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먹는 방법은 전염이 된다. 너도 나도 소시지 이외의 부분을 먼저 먹고 마지막에 한 번에 소시지를 먹었다.


핫도그는 편의점에서도 팔고 편의점 핫도그 역시 맛있지만 튀김기에서 바로 꺼낸 핫도그만 못하다. 일전에 옛날 핫도그를 먹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편의점에서 튀김기를 갖다 놓고 핫도그를 팔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전자레인지에서 전기로 데운 것보다 훨씬 맛있는 핫도그를 먹을 수 있을 텐데. 새벽에도 말이다. 튀김옷이 붙은 핫도그는 하나씩 포장이 되어 있고 핫도그가 하나씩만 들어갈 수 있도록 제작된 튀김기 위에 핫도그를 넣으면 기름이 튀지 않게 뚜껑이 닫히고 5분 정도 있다가 꺼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핫도그가 튀겨져 나오는 것이다. 맛도 기존의 핫도그와 똑같다. 아니 그보다 더 맛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새벽에 작업을 하다가 아 출출하군, 하며 집을 나와 근처의 편의점에 쓱 들어가 핫도그를 그 자리에서 튀겨서 냠냠 먹기 때문이다. 새벽의 흐릿한 하늘을 보며 핫도그를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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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미코를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쿠미코를 계속 보게 되는 건 그 답답함 속에서 나의 모습도 얼핏 보이기 때문이다. 쿠미코는 숨이 막힐 듯한 삶의 압박 속에서 선택지가 없다. 쿠미코는 그저 숨을 쉬는 것뿐, 그리고 자신 옆에 인간의 손을 탄 토끼 한 마리뿐이다. 쿠미코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무게에 짓눌러 숨을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라 숨을 쉴 수밖에 없어서 쉬는 것뿐이다.


그런 쿠미코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선택지가 생겨난다. 영화 파고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 파고에 가면 그 돈 가방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쿠미코는 영화 내내 일그러진 표정이나 무표정이나 화난 표정일 뿐이다.


쿠미코는 3천만 명이 사는 도쿄에서 29살이라는 나이라는 것이, 웃지 않는 여자라는 것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것이,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이 쿠미코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녀의 선택처럼 당연시해버리는 사회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쿠미코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쿠미코는 사장의 아내의 생일선물을 사 오라며 받은 법인카드를 들고 파고에 갈 준비를 한다. 분신과도 같은 토끼를 공원에 풀어주지만 토끼 역시 선택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쿠미코는 토끼를 보며 자신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결국 토끼를 안고 전철을 타지만 토끼를 전철 안에 두고 내린다. 엉엉 울면서.


쿠미코는 미국의 한 모텔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파고의 돈 가방을 찾으러 다닌다. 운명이 달린 도서관에서 받은 지도 한쪽을 들고 비디오에서 본 부세미 씨가 눈밭에 묻은 그곳으로 이불을 질질 끌며 간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파고에는 못 간다, 돈 가방이 없다며 쿠미코를 딱하게 여긴다.


쿠미코는 우여곡절 끝에 지도의 그곳에 도착한다. 추위에 얼굴은 얼었고 손가락은 다 터져 손톱 밑으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돈 가방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추웠다. 눈보라가 몰아닥쳤고 온도는 심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아침이면 돈 가방을 들고 갈 수 있다, 쿠미코는 피곤에 지쳐 이불을 돌돌 말아서 몸을 덮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든다.


하얀 설원의 아침이 밝아오고 쿠미코는 영화 속 그 자리에 눈을 파내고 돈 가방을 집어 든다. 그 속에는 부세미 씨가 넣어 둔 돈이 가득했다. 쿠미코는 얼굴도 깨끗했고 처음으로 활짝 웃는다. 쿠미코는 자신의 선택이 올바르다는 것에 더 기뻤다. 그리고 옆에 있는 토끼를 끌어안고 가방을 들고 기분 좋게 파고를 떠난다.


쿠미코는 영원히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 같았던 삶 속에서 벗어나 생존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쿠미코의 행복을 보며 안타깝고 애달프고 아름다운 뒷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영화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였다.


https://youtu.be/rrsiRTwysYc <= 예고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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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에 노른자를 풀었을 때, 바로 그때 떠먹는 노른자의 맛은 좋다. 아주 잠깐 그 노른자를 맛볼 수 있다. 고소하고 기분이 편안해지는 맛을 내는 노른자는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잠시 나와 조우하고 가버린다.


라면의 바닷속에서 풀어헤쳐져서 없어질 뻔했던 노른자는 그대로 숟가락으로 떠서 잠깐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면 그 뒤의 젓가락질은 경쾌하다. 후루룩 면발을 잡아당기면 미미하나마 노른자의 고소한 맛이 면발에 달려 입 안으로 들어와 도파민의 신호를 보낸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찰나로 사라지는 노른자의 그 맛 때문에 머리를 굴려 계란을 두 개를 넣었다. 아직 하나가 채 다 익지 않은 채 면발 밑에 꿈꾸고 있다. 면발에 같이 말아서 재빠르게 올려 후루룩. 오전에 느긋하게 라면에 넣은 계란 노른자를 먹고 있다는 건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위로가 된다.


문득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의 가사가 떠오른다.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다고, 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노래를 부른다. 추억이라는 게 가슴 저 안쪽으로부터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는 따뜻하게도 한다. 너라는 사람이 찰나의 기억이 아니라 여운이 깃든 추억이 된다.


라면 속 계란 노른자 같은 맛은 라면 속 노른자 밖에 없다고, 국물까지 호로록 다 마셔 버리고 나면 나는 부른 배를 부여잡고 그 추억을 떠올려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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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는 아니고 벨기에 드라마 시리즈였나, 넷플릭스에서 했던 드라마였는데 초자연적인 스릴러 이야기였다. 어느 날 태양을 보는 순간 모두가 죽어버린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태양이 아직 비치지 않는 나라로 가는 이야기. 태양이 솟아올라 빛을 보면 그 사람은 죽어 버린다. 마치 몸에 있는 모든 세포와 기운이 빠져나가 버리듯이 그대로 푹 꼬꾸라져 죽어버린다. 그리고 태양이 훑고 지나간 곳의 과일이나 채소에는 맛이라는 것이 전부 빠져나가버린다. 그렇게 세상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은 벨기에인지, 어떤 나라의 군용 벙크 안으로 모여들면서 시리즈 1이 끝이 난다. 태양을 보는 순간 고통스럽거나 아파하지 않고 그냥 죽어버린다.


여기까지 적고 나서 생각해보니 짤막한 리뷰를 적어 놓은 게 있어서 드레그 해서 가져와 봤다. 2020년 7월의 글이다.


[넷플릭스 벨드(벨기에 드라마) ‘인 투 더 나이트’, 한국 제목으로 ‘어둠 속으로’는 상당히 흥미 있는 영화다. 비행장에서 한 비행기로 군인 출신의 남자가 총을 들고 들어와서 문을 닫고 출발하라고 한다. 그는 빨리 떠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고 말한다. 비행장의 티브이에는 뉴스가 한창이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죽어 있는 모습이 비친다. 남자는 총을 들고 이미 시작되었으니 빨리 출발하라고 한다. 안 그러면 총을 쏘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비행기에는 몇 명 타지 않고 이륙을 하게 된다. 부조종사 한 명에 그저 헬기를 몰아본 실비라는 여자가 조종석에 앉고 각각 사연이 있는 주인공들을 태운 채 비행기는 어두운 밤하늘을 난다. 어둠 속으로는 제목처럼 어둠을 찾아서 계속 비행을 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세계는 무슨 이유인지 태양이 비치는 순간 모두가 죽어 버린다. 과학적으로 $%$^&^&@@% 이런 이유로 해서 11년 만에 오는 태양의 어떤 부분이 과부하가 되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지구의 해가 비치는 곳의 생명체는 모두 죽고 만다. 사람들은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혀 같은 장기는 바짝 마른 상태로 죽는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하던 주인공들도 나중에는 믿게 되면서 비행기는 어두운 항로를 따라 태양이 비치는 밝은 날을 피해 어둠만 찾아서 비행을 한다. 그리고 연료가 떨어질 때는 아직 어두운 나라의 가까운 비행장을 찾아가면서 연료를 넣는다. 영화는 비행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사고를 보여준다. 그리고 태양은 통조림의 음식을 제외하고 과일 같은 식재료의 모든 분자구조를 망가트려 종이 맛을 내게 한다. 그리고 비행기 연료의 탄소성분도 망가트려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 불신하거나 리더를 교체하거나, 그 와중에 어떤 나라의 비행장에는 또 누군가를 버리고 오거나 엉망진창이다. 시즌 1은 6부작인데 한 회가 시작될 때마다 주인공들이 어떤 이유로 비행기를 탔는지 짤막하게 보여주며 시작을 한다.


영화는 답답함이 없다. 비행기라는 갇힌 공간에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무전으로 연락이 된 살아있는 군인들이 있는 어느 나라의 벙커 속으로 들어가면서 시즌 1이 막을 내린다. 벨기에 영화인데 잘 만들었다. 태양이 망가져서 지구의 생존한 것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설정에 빠져든다. 근래에는 세계의 종말, 아포칼립스가 도래한 이야기가 영화, 드라마. 소설 전반에 걸쳐 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다루고 그런 이야기에 열광하는 걸까. 아포칼립스가 도래하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모두가 똑같이 죽기 때문에 삶이 힘들어서 이런 멸망하는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일까.


지금은 바다의 중심이 되는 빙하도 많이 녹아서 해수면이 조금씩 오르는데 2100년가에는 해수면이 1미터가 오른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렇게 되면 쓰나미가 밀려오는데 천천히 전조가 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덮치는데 일본은 많은 땅덩어리가 바다에 잠긴다고 한다. 한반도도 뭐 어떻게 된다는 그런 과학적인 연구 이야기가 있다. 쨍쨍해야 할 올해 7월은 6월보다 시원했고 매미소리 또한 듣지 못했다. 비가 오면 차들이 잠기고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죽기까지 한다. 비가 많이 왔다고 해서 이 정도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리라고는 이전에는 몰랐었다. 자연도 미쳐 가는데 사람들은 나날이 더 난리고 더 미쳐간다. 근래에는 사람이 하는 일을 로봇이 대신하는 점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내몰린다. 코로나 때문에 수영장에서는 침을 뱉으면 안 된다지만 일부러 침을 뱉는 미친놈도 있다. 이러다간 우리는 죽는 날까지는 별 탈이 없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말 그래도 매일이 생존이 될 가망이 높다. 그 사이에서 범죄가 필수가 되기도 하고 평범함이라는 것이 멀어질 수도 있다. 영화들은 여봐란듯이 지구가 조금씩 멸망해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도 과학적으로 바짝 접근해서 만들어 낸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면 독감과 코로나가 쌍으로 온다는데 현실인지, 영화 속에서 살아가는지 애매한 지금이다.]


https://youtu.be/meaXftZ_vpI


이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은 이렇게 죽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넷플릭스에서 할 미드 ‘프럼’이라는 미지의 공포 스릴러 시리즈에는 한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에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어 그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고 그야말로 이 세계, 완전히 다른 세계에 갇히게 된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떠올리면 된다. 그런데 밤이 되면 사람의 몸을 파 먹는 괴물들이 출몰한다. 괴물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문을 열어 달라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도시에서 생활하며 캠핑 같은 것을 가다가 이런 마을에 고립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정신이 약해져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 들어간다. 예쁜 여자, 보고 싶은 할머니 같은 인물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문을 열어 주는 순간 괴물의 모습이 되어 신체를 훼손한다. 아주 고통스럽게 죽인다. 이 시리즈에는 아이들도 가차 없이 신체가 훼손된다. 이 마을에 아이들이 없는 이유가 바로 아이들은 쉽게 괴물에게 현혹되기 때문이다. 미드 프럼에서는 사람들이 괴물에게서 벗어나고자 고군분투한다. 오로지 오늘 밤을 견디는 것이 일상이 된다.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리 차를 몰고 마을 밖으로 가봐야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직 오늘 밤을 괴물에게서 살아남는 것이 삶이 된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기 때문에.


그런데 태양빛을 보고 아무런 고통 없이 죽는다면 오히려 그렇게 죽는 방법이 작은 벙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려가며 똥오줌도 제대로 못 보며 갇혀있다가 서로 죽이려 들고 욕을 하고 강간을 하려고 하는 삶보다 더 낫지 않을까 싶다. 태양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질병으로 아파하면서 좁은 벙커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더러운 냄새에 그저 살아있는 좀비 같은 신세일뿐이다. 알랭 드롱은 아들에게 목숨 연명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살아있어 봐야 살아 있되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죽기 직전 고통으로 아파할지도 모른다. 그건 늙어서 그럴지도 모르고, 질병이나 불치병으로 그럴지도 모른다. 또는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뇌를 칼로 썰어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비행기 안에서 기름이 떨어져 저 먼 하늘에서 태양이 서서히 일출할 기미가 오고, 다른 비행장에서 기름을 공수하는 과정이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졌다. 조마조마하며 볼 맛이라는 것이 났다. 그러나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단지 죽는 것에서 피하려고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면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니까. 이 세상에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영화 속 세계에서는 그저 태양을 보는 순간 그대로 쓰러져 고통 없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일말의 어떤 기척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누워서 태양을 본다면 쓰러질 필요도 없다. 덱체어에 건방진 자세로 누워 태양을 보며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항해를 한다.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삶에서 죽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는 내 삶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멀리하고 있다.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이다. 친구가 죽었을 때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거센 물살에 휩쓸려 물에 빠졌으니까 물 밖으로 나오려고 온갖 힘을 썼을 것이다. 폐에 물이차고 얼마나 놀라고 고통스러웠을까. 세월호 속에서 공기가 빠져나가 점점 조여 오는 공포에 죽음으로 갔을 아이들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잘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걸 잘 받아들이려면 오늘을 그저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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