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에서 조여정이 해고 노동자, 해직 부부를 인터뷰하려든다. 금수저가 가난한 부부를 인터뷰하려고 한다. 진정성을 가지고 가난한 자에게 공감하며, 그들의 곁에 바짝 붙어 인터뷰를 하고 싶다. 그건 그저 메소드 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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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가 나는 사람은 이미 날 때부터 각자 그렇게 태어난다. 그 격차는 생각보다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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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희 평론가가 이 영화를 이창동 감독의 전작 ‘버닝’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나는 ‘버닝’을 정말 좋아해서 서른 번쯤 봤다. 머리가 나빠서 지금은 대사 하나하나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영화의 구석진 화면 하나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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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은 불평등에 관한 영화다. 유전자라는 건 대를 타고 내려온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고, 종수는 그걸 온몸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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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에서 조여정 부부는 부자다. 조여정은 방송 일을 하지만 남편인 조인성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부자의 특징이라고 해야 하나. 늘 어디선가 전화가 오고 뭔가를 확인한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돈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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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버닝’의 벤도 그렇다. 딱히 뭘 하는지는 모르는데 세계 여행을 다니고, 헬스장에 가고, 포르셰를 몰고 다닌다. 벤에게는 그런 유전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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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격차가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면서도 때로는 그들 곁에 간다. 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내가 얼마나 가진 사람인지,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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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의 원작자 하루키의 소설도 그렇다. 하루키의 대부분 소설에도 유전자에 대해서 많이 나온다.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정해진 것은 어떤 노력을 한들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 결과가 그렇다는 건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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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에 관한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부자인 연예인이 가난한 사람을 연기하면 그게 정말 와닿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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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니까 배역의 옷을 입고 가난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연구하지 않은 연기는 금방 표가 난다. 가난이라는 건 옷 한 벌 갈아입는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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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많은 연예인들도 일반인들과 섞이는 게 싫을지 모른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연예인들과 어울리고 싶을 것이다. 예능이나 뉴스, 기사에 보면 유난히 서로 친한 톱클래스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만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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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이라는 걸 제대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매개는 결국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감독들은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몇 년씩 준비한다. 칠순이 다 되어가는 이창동 감독도 이번 ‘가능한 사랑’을 위해 10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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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연예인보다 더 불편한 부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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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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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억, 몇백억씩 가진 사람들이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안다는 듯 정치를 한다. 그걸 보면 가끔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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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과 가장 섞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선거철만 되면 일반인들 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자기 권력과 자산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랑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식 자랑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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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이상한 일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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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아는 사람이 자신을 욕하는 일반인들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정말 잘못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남이 하면 잘못, 자신이 하면 올바른 것으로 말하고 있다. 정말 불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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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인지, 그런 모순을 제대로 들춰내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에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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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조연들의 열연이 끝없이 펼쳐지는데도 그 열연이 화면 밖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느낌의 영화다. 스릴러인지 드라마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보는 동안 흥미는 계속 생긴다. 그런데 정작 재미라는 것은 자꾸 빠져나간다. 궁금하게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그 궁금증을 따라가고 나서 남는 것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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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광이라는 제목 때문인지 색감에도 신경을 쓴 것 같다. 지금 시대의 이야기인데 화면은 마치 80년대 필름으로 찍은 것처럼 보인다. 선명하지 않고 조금은 바랜 듯한 색감. 불완전한 화면이다. 그런 불완전함이 오히려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가 가진 분위기와는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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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리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결국 영화가 재미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지점에서 너무 멀리 가버린다. 정말 ‘와, 이 정도야?’ 싶을 만큼 재미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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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쉬운 것은 이 영화가 2021년에 촬영을 끝냈다는 점이다. 코로나와 배급 문제를 거치면서 무려 5년 뒤에야 관객을 만나게 됐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영화이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관객 수가 10만에도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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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아 배우는 감독과 인연이 깊다.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었던 [미쓰백]에서 김시아를 보고 이번 영화에도 출연시켰다. 그래서인지 [비광]에서도 [미쓰백]에서 보았던 인물의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이 느껴진다. 아이를 둘러싼 상황과 그 안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방식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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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룡은 여기에서도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마초적인 남자. 상처받고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폭력을 휘두르다가도 옆에서 하지원이 한마디 하면 멈춘다. 배우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문제다. 새로운 인물을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 류승룡이 연기했던 여러 캐릭터가 겹쳐 보인다. 국밥 먹는 장면, 돌쇠처럼 숟가락을 쥔 모습, 머리에 깍두기 국물을 붓는 장면 같은 모습의 류승룡은 어딘가 다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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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원의 캐릭터도 [스캔들]의 손예진을 닮았다. 하지원에게도 그런 것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 맞지 않는다. 너무 맞지 않는다.예쁘긴 하나 눈빛 하나 만으로도 농염을 표현하고 가만히 있어도 남자들이 빠져들 것 같은 퇴폐미는 손예진에게서 빠졌다. 하지원도 손예진과 비슷하다. 이 역할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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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연기력으로 그 빈틈을 메우려고 하다 보니 하지원이 보여주려 했던 새로운 얼굴이 오히려 너무 멀리 가버린 느낌이다. 캐릭터가 배우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배우가 캐릭터를 붙잡고 끌고 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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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가 범인이라고 몰아붙이며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 거칠게 데리고 가는 장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여중생 한 명인데 경찰들이 그렇게까지 몰려들어야 했을까. 장면이 만들어내려는 긴장감보다 연출된 장면이라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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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아쉽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끌고 왔는데 정작 중요한 사실은 너무 짧은 설명으로 정리해버린다. 지지고 볶고 했던 모든 과정이 뭐야? 이게?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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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황중구라는 사람이 왜 비광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불완전한 가족의 모습과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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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는 서사대로 가고, 캐릭터는 캐릭터대로 움직이고, 음향은 음향대로 존재한다. 각각 따로 보면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들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만나지 못한다. 영화라는 예술이 감독의 영역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보는 사람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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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히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무명배우들이 출연하는 잘 만든 독립영화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영화가 저절로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배우와 많은 제작비,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나온 영화보다 아무도 이름을 모르는 배우들이 나와도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독립영화가 훨씬 오래 마음에 남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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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광]은 어렵게 세상에 나온 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더 아쉽다.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고, 분명 공들인 흔적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알겠는데, 그것이 관객에게 닿는 과정에서 자꾸 흩어진다.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보다 ‘왜 이렇게까지 재미가 없을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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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핵심은 어쩌면 이승윤이 아니다. 처음에는 분명 이승윤을 찍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끝까지 보고 나면 세 명의 감독이 자기 자신을 찍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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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은 영화 일을 하다 지쳐 한없이 밑으로 꺼져 있던 2018년, 우연히 만난 선배에게 “너 살아있었네?”라는 말을 듣는다. 그 한마디가 영화의 제목이 된다.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듣보라는 말이 우습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이 영화와 잘 어울린다. 아직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한데 어디에도 자리가 없는 사람들. 잘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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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은 그때 무명 가수였던 이승윤의 노래를 듣는다. 자신의 처지와 묘하게 겹치는 노래였다. 지쳐 있던 자신에게 누군가 건네는 선물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팬이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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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내가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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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알 수 없는 자신감이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이승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그냥 해보기로 한다. 친구 두 명을 끌어들인다. 셋 다 이름을 알린 감독이 아니다. 말 그대로 듣보 감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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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수와 한 번 작업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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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하나로 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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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승윤에게 연락을 한다. 답장이 올 리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답장이 온다. 그리고 실제로 만난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정말 맨땅에 헤딩한다.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위해 장소를 구하고, 사람을 만나고, 무대를 만들고, 의상까지 준비한다. 전통시장을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전화를 한다. 누군가는 안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어렵다고 하고, 코로나라는 상황까지 앞을 막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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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건 그들이 안 된다는 말을 들을수록 더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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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계속 생긴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돈도, 인맥도, 유명세도 없는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보는 입장에서는 그들의 행동이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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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면 편하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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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승윤을 좋아해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빠져든다.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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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보고 시작할 수 있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저 사람과 일하고 싶어서, 저 사람의 무언가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시작한다. 그런데 한참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었는지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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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 역시 당시에는 지금처럼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 같아서 2020년까지만 활동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2021년 [싱어게인]에서 우승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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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이승윤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이승윤보다 훨씬 풋풋하다. 아직 이름을 알리기 전의 얼굴이 있고, 그때의 노래가 영화 곳곳에 흐른다. 훗날 유명해진 사람의 과거를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사람들의 시간을 보는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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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세 명의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움직인다.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다. 대단한 사람들이 대단한 일을 해낸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번 해보겠다고 계속 움직이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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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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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보인간의 생존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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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고 말하는 데 꼭 유명해질 필요는 없다. 아직 아무도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 자체가 생존신고일지도 모른다. 세 사람은 이승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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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화를 보는 나는 그 생존신고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조금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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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직 살아 있나 보다,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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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제목은 [더 페이블: 죽이지 않는 암살자]다. 흔히 페이블 2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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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가 직업인 남자가 잠시 일을 접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자신과 비슷한 인간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결국 라이벌과 맞붙게 된다. B급 감성에 액션을 버무린 일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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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만화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걱정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카다 준이치가 아키라를 맡으면서 꽤 괜찮은 영화가 되었다. 액션은 액션대로 제대로 해내면서, 이상하게 힘을 빼고 있는 듯한 B급 코미디까지 아주 찰지게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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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1편이 나왔고 2021년에 2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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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는 암살자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통한다. 어느 날 보스에게 명령을 받는다. 아무도 죽이지 말 것. 그리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갈 것. 이게 아키라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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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와 남매로 위장해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데, 평범하게 살라는 명령을 받은 암살자가 평범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모습 자체가 웃긴다. 오카다 준이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재미있고, 요코 역의 키무라 후미코도 만만치 않다. 둘이 붙어 있을 때 영화의 B급 냄새가 확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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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영화는 결국 액션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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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준이치와 키무라 후미코의 액션이 생각보다 훨씬 좋다. 특히 오카다 준이치의 표정이 재미있다. 아침에 막 일어나서 아직 정신도 덜 깬 사람 같은 얼굴로 총을 쏘고 사람을 때려눕힌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총질을 하는 게 오히려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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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는 츠츠미 신이치, 사토 코이치 같은 배우들도 나온다. 배우 보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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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액션은 건물 공사 현장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다. 공사장의 구조물을 이용해 뛰고 구르고 매달리면서 싸우는데, 성룡식 액션에 존 윅의 살벌함을 조금 섞어놓은 느낌이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2편을 다시 볼 이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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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블 같은 일본식 B급 액션을 좋아한다면 몇 번씩 다시 보게 될 영화다. 이퀄라이저처럼 묵직하게 멋을 부리는 영화는 아닌데, 이상하게 한번 보고 나면 또 생각난다. 특히 아키라의 그 멍한 얼굴과 후미코의 귀여움과 섹시 그 어디쯤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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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는 걷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래도 센터에서 타라고 하는 전동차는 죽어도 타기 싫다. 전동차를 타면 편하다. 하지만 편해지는 만큼 두 다리의 힘은 빠질 것이다. 지금보다 더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영이는 무용을 하고 싶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자신의 두 다리로 걷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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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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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지기도 한다. 창피하고 힘들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벚꽃이 피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조깅을 한다. 소영이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나도 저렇게 한 번 뛰어 보고 싶다. 그게 소영이의 소원이다. 겨울을 지나 봄을 보내고 어느 따뜻한 날, 소영이는 동네 공원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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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갈고닦은 무용을 혼자 펼친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박수도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무용을 하는 동안만큼은 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바라보는 흔한 방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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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로 몰아가지도 않고, 소영을 안타까운 사람으로 바라보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인데도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카메라의 시선 때문이다. 영화는 소영을 바라보는 카메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소영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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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기록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움직이지 않는 몸, 마음대로 나오지 않는 말, 점점 굳어가는 몸을 자기 손으로 찍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그럼에도 소영은 카메라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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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다. 그래서 소영에게 무용은 단순히 춤을 추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가깝다. 소영 곁에는 희정 선생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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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소영의 김소영도 대단하지만 옆에서 끝까지 소영을 잡아주는 희정 선생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소영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 희정 선생님이 더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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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 포기하지 않도록 바로 옆에서 동작 하나하나를 반복하게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으키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해주는 사람. 자신의 역량을 알고 삼십 대에 현역 무용수의 길에서 내려와 무용을 가르치는 사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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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선생님 역시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영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도 힘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희정 선생님은 소영에게 동작을 가르친다. 잘되지 않는 동작을 다시 하고, 잊어버리면 다시 기억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또 처음부터 한다. 결국 무용도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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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잘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넘어졌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시 하고 또 하는 것. 그 과정에서 희정 선생님이 소영에게 말한다.“소영아? 잘한다 못한다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선생님이 쳐 줄 거야. 알겠지? 당황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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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와 반복된 고된 노력에 소영은 희정 선생님 앞에서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연습하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공연 당일까지 몸을 붙잡고 또 연습한다. 그렇게 어렵게 공연을 끝낸다. 공연이 끝났다고 소영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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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관객이 돌아간 뒤에도 소영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서 카메라를 들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이유로 마지막에 찬란한 음악을 깔고 끝내지 않는다. 꿈을 이루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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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걷는 일도 계속해야 하고, 몸과 싸우는 일도 계속해야 한다. 무용 역시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소영에게 노력은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갱년기라면 처음부터 눈물을 줄줄 흘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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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소영이 공원에서 혼자 춤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춤을 추던 소영. 그 순간만큼은 몸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달릴 수 없지만 춤출 수 있고, 마음대로 말할 수 없지만 몸으로 말할 수 있다. 몸이 점점 굳어가더라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까지 굳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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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극복하는 영화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자신의 몸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에 가깝다. 소영은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늘도 걷고, 다시 연습하고, 춤을 춘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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