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1월 어느 새벽 정영음의 정은임 아나운서는 청취자들에게 받은 엽서를 읽어주고 있었다. 일 년 뒤, 95년에 나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영화도 물론 재미있지만 소설이 명작이었다. 그 소설 속에 아름다운 문장들이 보물처럼 들어있다.

[내가 그녀에게 남겨준 것보다 그녀가 내게 남겨준 게 더 많았지요]

음악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 다 운이 좋게도, ‘고엽’을 느리게 편곡한 곡이 나왔다.라고 된 문장이 있다.

당시 곳곳에 숨어 있던 영화팬들이 일 년 뒤에 나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속에, 프렌체스카와 로버트가 춤을 출 때 라디오에서 과연 그 멋지고 멋진 음악 ‘고엽’이 나올 것인가? 그게 너무나 궁금하고 애타는 일이었다.

그리고 엽서를 보내서 정은임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고요한 새벽, 가을이 사람들의 피부 깊이 들어와 건조하게 만들었고, 나뭇잎의 색채마저 빼앗아 갔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던 영화키드들이 이불속에서 정영은 아나운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 시기가 요즘과 비슷해서 때로는 기억이 선명해지지만, 그건 아마도 추억이 덧 입혀져 확대된 것일지도 모른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마치 곁에 청취자들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주인공들이 지금 확정된 것 같은데, 아마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라고 합니다. 기대가 되는걸요.

문장은 이렇게 말했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불확실한 이 세계에 이렇게 확실한 감정이란 정말.

지금 당장 유튜브를 켜서 ‘고엽’을 들어보라, 이 계절에, 이 시기에, 이토록 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 나의 이 둘 곳 없는 마음을 애절하게 연주하는 바이올린이여.

‘고엽’은 자크 프레베르의 시였다. [오, 기억해 주오 우리가 연인이었던 그 행복했던 날들을 그 시절 삶은 아름다웠고 태양은 오늘보다 뜨겁게 타올랐다네 죽은 잎들은 하염없이 쌓이고 너도 알리라, 내가 잊지 못하는 걸 죽은 잎들은 하염없이 쌓이고 추억도 회한도 그렇게 쌓여만 가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 모든 것을 싣고 가느니 망각의 춥고 추운 밤의 저편으로 너도 알리라, 내가 잊지 못하는 걸 그 노래, 네가 내게 불러주던 그 노래를 그 노래는 우리를 닮은 노래였네]

연애시대의 동진과 결혼을 한 유경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며, 불안한 자신의 앞날을 보며 덜 불안해한다. 왜 붙잡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 그것이 받아들여야 할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원작자인 제임스 월러는 이 이야기를 [도덕의 잣대로 재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나흘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서 영화 속에도 ‘고엽’이 나올까 말까. 그건 영화에서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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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 철이의 이야기 [작별인사]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인간은 왜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를 무서워하면서도 집착을 하는 것일까. 2021에 일본에서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라고 쓰고 휴머노이드에 가까운) 오르타 3이 슈퍼 엔젤스라는 오페라 공연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인간과 닮았다고는 하지만 얼굴의 앞면만 인간의 모습이고 나머지는 차갑디 차가운 기계의 몸이었다. 게다가 하체는 뱀처럼 붙박이였다.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의 차이점을 간단하게 말하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닮은, 완전히 같은, 흔히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인조인간을 말한다. 웨스트 월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호스트들을 안드로이드라 부른다. 반면에 휴머노이드는 안드로이드처럼 인간형 로봇이지만 팔다리가 달린 로봇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피부나 인간의 얼굴을 그대로 본뜨지 않는 로봇을 말한다. 좀 더 세세하게 말하면 ‘가이노이드’도 있는데 이는 인간 여성형 로봇을 말한다.

우리나라도 2015년에 인간형 로봇 휴보와 에버를 개발해서 선 보였다. 얼굴은 인형 인형 한 아인슈타인의 얼굴에 몸통은 우주복 같은 모습이었다. 또 하나는 완전한 로봇의 모습이었다. 안드로이드가 아닌 휴머노이드이다. 어쨌거나 모두 인간의 모습을 본뜨고 있다. 2015년에 한국이 어떻든 이 분야에서, 세계 로봇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인간은 휴머노이드를 넘어 안드로이드에 굉장히 집착을 하고 있다. 2017년 미국에서 소피아라는 인간과 아주 흡사한 안드로이드를 선보였다. 우리나라에도 방문해서 한복을 입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 그때 벤처 장관인가? 박영선 의원과 대화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소피아는 말을 하면서 표정도 변하고, 상대방을 보며 나이나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도 했다. 소피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로봇 최초로 시민권을 받았고 모델로 패션잡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소피아를 보고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이로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과 너무나 닮은 로봇의 모습에 무서워하기도 했다. 소피아는 2016년에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암울하고 비관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바로 인류를 파멸시키겠다고 해버렸기 때문이다. 놀랍도록 무서웠다.

그럼에도 감염병을 앓고 있는 전 세계를 보며 자동화 AI 기술력은 더 진보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무서워하면서 왜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이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세포 체계가 잔인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래전 미래의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던 공각기동대. 쿠사나기 소령의 이야기였던 1편에 이어 2편에는 눈이 안경에 봉합되어 있던 바트의 이야기였다. 거기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언급을 했다.

애완용 로봇이나 가이노이드(가이노이드 또는 팸봇은 남성만을 일컫는 좁은 의미의 안드로이드와 대비되는 여성형의 휴머노이드)는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와는 관계없는 존재다. 왜 그들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며 인체 이상형을 모방해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왜 닮은 꼴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까.

살짝 다른 얘기를 하자면, 어린이들, 애들은 늘 인간이란 규범을 벗어나 살아간다. 확립된 자아와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게 인간의 정의라면 말이다. 인간의 전 단계로서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 애들은 대체 무엇일까. 내면은 인간과 다른데 모습은 인간이다. 여자애가 소꿉놀이를 할 때 쓰는 인형은 실제 아기의 대체물이 아니다. 여자애는 육아 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인형놀이가 실제 육아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즉 육아는, 인조인간을 만들려는 오랜 꿈을 가장 쉽고도 빠르게 실현시켜 주는 방법이다.

인간과 기계,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구별하지 않았던 데카르트는 다섯 살 때 죽은 딸과 꼭 닮은 인형을 프란신느 라 이름 짓고 엄청 사랑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은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에 집착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먼저 떠난 어린 자식이 너무 보고 싶은데 이미 한 번 죽은 딸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 하지만 딸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표정 짓고, 무엇보다 아빠와 생각을 공유하고 잠들 수 있다면 아마 부모는 어떤 짓이든 할지도 모른다. 자식이 부당한 사고로 죽고 나면 자식을 잃은 부모는 이전의 생활을 버리고 사고 수습을 하기 위해 몇 년이고 전사로 변하기도 한다. 비록 잔인하지만 인간은 인간을 닮은, 어쩌면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를 무서워하면서도 집착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영화 안테벨룸을 보면 남북전쟁 전에 흑인들을 노예로 두고 부려먹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미국 백인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 안테벨룸이다. 그런 망상 속에 빠진 미국 백인들. 그 수가 아직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인간도 많아서 그런지 아직까지 지구는 네모네모 하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고 있는 인간들 역시 엄청나게 많다. 남북전쟁 전에 백인들이 흑인들을 처음 붙잡아서 노예로 두면서 온갖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역사와 여러 영화에서 잘 알고 있다. 또 동물원이나 박물관 같은 곳에서 발가벗겨 전시도 하기도 했다. 일본도 한국인을 그렇게 한 적도 있다. 치가 떨리는 일이다.

동물들을, 인간과 닮지 않은 가축들 역시 노예처럼 부리지만 말 그대로 가축으로 대한다. 그러나 흑인을 노예로 두고 있다면 이는 가축과 같은 취급을 하지만 그 이외의 무엇도 저지르려고 한다. 너희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처럼 생각하면 안 되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이 잔인함. 이 같은 잔인함이 세포를 타고 유전자의 열차에 올라 지금까지 이어지고 앞으로도 이어져 안드로이드에 집착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웨스트 월드 시즌 1을 보면 너무나 잘 나온다. 원작을 가지고 이미 70년대에 율 부린너 주연으로 한 번 만들어졌기에 이번 웨스트 월드를 보면 인간과 구별을 할 수 없는 안드로이드는 자기 자신이 마치 인간이라 생각을 하지 피부를 이식한 인조인간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인간과 똑같이 추억이 있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배설을 하지만 웨스트 월드 속에 관광하러 온 억만장자들의 진짜 인간들에게 마음대로 유린을 당한다. 아주 처참하게 찢기도 발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허용했을 때 착하기보다 악마 같은 본성을 드러낸다. 잔인함이 있는 그대로 돌출하여 나오게 된다.

만약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닮지 않았다면, 가축을 닮거나 안드로이드 전 단계인 휴머노이드 같은 깡통 로봇의 형태였다면 인간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인간으로 착각하며 지내는 안드로이드 철이의 이야기가 김영하의 소설 작별인사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 이 소설에 녹아있다. 실제 인간인 철이의 아버지와 자신이 안드로이드인지 모르는 철이와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미래의 인간사회에서 자신들의 세계로 가기 위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까. 요즘 뉴스를 보지 않으려 해도 여러 영상이나 매체를 보면 이토록 인간이 잔인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법이라는 것 역시 제일 잔인한 것 중 하나다. 법은 나약하고 약자들에게 더없이 강인하고 위압적이고 위협적이다. 법이 언제 한 번 없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던 적이 있었을까. 법은 늘 정의 편에 선다고 하지만 돈과 권력은 정의와 법을 주무르듯 하니 인간은 참 잔인하다. 나도 잔인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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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는 늘 그렇지만 아날로그 카메라 같다. 필름을 인화해야만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있어서 시간이 걸리고, 괜스레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게 한다. 라디오는 그렇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현실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언제나 호수의 수면 같은 느낌이 라디오다. 어제는 디제이 윤상이 마왕의 노래를 내내 틀어 주었다. 그게 마치 학창 시절에 학교에 나와 있는 일요일 같았다.

그때에도 라디오를 들었다.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가을빛이 스며든 바람이 불어와서 얼굴을 건드렸다. 깜빡 졸다가 눈을 뜨면 어떤 존재가 나무에 색을 칠하고 하늘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렇게 있으면 추울 텐데,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위 아저씨를 보며 목례를 했다. 서쪽 숲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지,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다리를 모으도록 해, 그러면 덜 춥지. 라며 낙엽이 바람에 딸려 가듯 수위 아저씨가 학교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라디오에서 로드 맥퀸의 [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요일의 가을 학교는 고요했다. 종소리도, 운동장에서 움직이는 아이들 소리도 소거되었다. 학교가 학교 같지 않았다. 학교 로열박스에 앉아 있었다.

다시 계절이 돌고 돌아, 기가 막힌 가을 햇살과 그에 맞먹는 푸석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기에 왜 또 앉아 있을까. 기시감이 드는 동시에 낯선 이곳은 내가 다녔던 학교일까. 나는 수위 아저씨를 기다렸다. 해가 조금 이동을 했다. 아저씨가 나타났다. 수위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낯이 익었다.

해를 등지고 있지 않았는데 수위 아저씨의 얼굴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있지만 소리가 소거됐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깊이가 느슨했다. 아저씨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쩐지 수위 아저씨에게 나는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음 저 밑에서 올라오는 따뜻함 같은 것이었다. 수위 아저씨는 뒷짐을 지고 내가 보는 운동장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해가 또다시 조금 이동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도 조금 길어졌다. 해가 이동을 할 때마다 그림자도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 나는 수위 아저씨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살을 받으니 잠이 쏟아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저씨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서쪽숲은 이미 한 겨울이네,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가물가물 한 것이 발바닥으로 나의 의식과 자아가 몽땅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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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 아나운서는 아직 처녀인 자신이 토요일 새벽에 나와서 이렇게 방송을 하고 있으면 우울하다고 한다. 그 우울을 좀 잊어버리기 위해 지금 옆에는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나와 있다고 소개한다. 이 시간에 이렇게 나오면 아내분은? 정성일은 흐지부지 넘어간다.

정성일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더 플레이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정성일은 정말 세세하게 설명을 한다. 아직 영화에 들어가기도 전, 알트만 감독부터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력을 이야기하는데도 듣는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진이 다 빠져버릴 것만 같다.

이 친구는(라고 한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을, 그래서 듣다가 웃음이 나왔다) 25년 생으로 57년에 [범죄자들]이라는 영화로 데뷔했다고 한다. 영화 [더 플레이어]는 너무 좋은 영화인데 보는 사람이 적어서 극장이 별로 없다.

정성일은 늘 비슷한 톤이 있다. 그 톤으로, 그러니 좋은 영화를 사람들이 봐야만 좋은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다. 그러니까 친구를 억지로라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라고 한다. 좋은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정성일 평론가는 30년 전부터 말했다.

정성일 평론가는 다른 모든 방송에서 출연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새벽에 하는 정은임의 라디오는 나왔다.

영화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이 아주 길고 지난해서(정성일 평론가가 나오면 늘 그렇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이제 (제발) 영화 얘기를] 하며 운을 뗀다. 그러면 정성일 평론가가 영화 얘기에 들어가는데, 영화 이야기도 디테일하게, 세세하게 들려준다.

배우들의 대사까지 혼자 다 치면서, 마치 일인극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영화 이야기를 한다. 정성일 평론가가 나오면 정은임 아나운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다. 청취자 모드로 들어가서 라디오를 듣는 이들과 같아진다. 그 점이 재미있는 지점이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정말 열심히 듣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보인다. 알트만 감독은 현재 변영주 감독에게도 영향을 준 감독이다. 변영주 감독이 유튜브에 나와서 책을 소개하는데 레이먼트 카버의 [대성당]을 소개했다.

이 소설을 소개하게 된 경위가 있다. 변영주 감독은 오래전 언젠가 로버트 알트만의 장편 영화 [숏컷]을 보게 되었는데 그 영화에 매료되었다. 그건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숏컷]을 추천하기도 했다.

[숏컷]은 레이먼드 카버의 몇 편의 단편 소설을 묶어서 만든 영화다. 내용이 충돌하지 않고 재미있게도 만들었다. 지금 보면, 현재 대 배우들이 된 배우들의 초년병 시절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렇게도 많은 배우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알트만의 영화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로 이루어졌지만, 또 하루키도 빼놓을 수 없다. 레이먼드 카버가 한국에 알려지게 된 계기 중에는 하루키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에세이에 레이먼드 카버가 많이 등장한다.

알트만, 레이먼드 카버, 하루키, 변영주 그리고 정은임과 정성일 평론가. 30년의 시간이 흘러도 세계는 이어져 있다. 알트만 감독은 2006년에 죽었다. 영화광이라면 알트만 감독의 영화를 한 번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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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의 상실과 결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보여주지만 결말은 나지 않는다. 원작 소설이 있어서 주인공 마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설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마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마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섞이려 하지 않는다. 분명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지 싶다.

마나는 대학교 신입생 첫날 지갑 하나를 줍는다. 그 자리에서 수많은 클럽활동 홍보를 하는 선배들이 다가와 난처해하는데, 그 자리에서 세상에서 둘 도 없는 친구이자 영혼도 같이 나누는 스미레를 만나게 된다. 우울하고 밝지 않는 마나와는 다른, 스미레는 언제나 밝고 맑고 자유로운 영혼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게 되고 마나의 집에서 같이 지낸다.

마나는 스미레가 자신보다 더 좋지만 그 마음을 책을 한 번에 펼치듯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스미레가 애인을 데리고 왔을 때에도, 집에서 나가서 애인과 산다고 할 때에도 마음을 똑바로 드러내지 못한다. 아마 스미레에게는 나보다는 애인과 엄마가 어쩌면 더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스미레의 엄마와 애인은 스미레를 마음에 더 이상 담아두려 하지 않는다.

스미레는 동일본대지진으로 쓰나미에 쓸려 가고 말았지만, 마나는 마음속에 있는 스미레를 놓지 못한다. 나보다 더 스미레를 잡아야 하는 사람들이 스미레를 잊어가는 모습을 보며 상실을 깊게 느낀다.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마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챙겨주던 매니저가 어느 날 식당에 늦게 나오고 결국 아무런 예고도 낌새도 없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마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전부 죽는다는 생각에 점점 마음이 깨져간다. 가장 사랑하는 이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남았을 때 남은 자는 잊어야 할까, 계속 간직하며 살아야 할까.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재미있는 구석은 눈뜨고 찾아봐도 없는 영화인데 재미있다.

영화는 주로 마나의 시점으로 보여주지만 마나가 왜 동성을 좋아하는지, 왜 인간관계에 소극적인지 보여주는 않는다. 중반이 넘어서면 스미레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마나에 비해 적은 분량이지만 스미레는 무엇 때문에 밝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이런 구조적 대비가 영화를 이루고 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재미보다는 그 외의 무엇으로 잡아 끌어당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나지만 중심에 서 있는 진짜 주인공은 마나의 곁에서 늘 마나를 지켜보던 스미레라고 말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마나는 인간관계가 협소한 자신과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다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힘들어 스미레가 실종된 마을로 가서 대지진 피해자들 모임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조금씩 위로를 받는 마나. 영화는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초현실 부분을 앞뒤로 배치를 했다. 예전 와니와 준하처럼.

영화는 드라마지만 그 안에는 다큐멘터리 기법과 애니메이션 기법이 가미되어서 또 다른 보는 맛이 있다. 이 영화는 보고 나면 소설로 꼭 읽고 보고 싶네,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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