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에는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는 늘 그렇지만 아날로그 카메라 같다. 필름을 인화해야만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있어서 시간이 걸리고, 괜스레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게 한다. 라디오는 그렇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현실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언제나 호수의 수면 같은 느낌이 라디오다. 어제는 디제이 윤상이 마왕의 노래를 내내 틀어 주었다. 그게 마치 학창 시절에 학교에 나와 있는 일요일 같았다.
그때에도 라디오를 들었다.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가을빛이 스며든 바람이 불어와서 얼굴을 건드렸다. 깜빡 졸다가 눈을 뜨면 어떤 존재가 나무에 색을 칠하고 하늘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렇게 있으면 추울 텐데,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위 아저씨를 보며 목례를 했다. 서쪽 숲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지,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다리를 모으도록 해, 그러면 덜 춥지. 라며 낙엽이 바람에 딸려 가듯 수위 아저씨가 학교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라디오에서 로드 맥퀸의 [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요일의 가을 학교는 고요했다. 종소리도, 운동장에서 움직이는 아이들 소리도 소거되었다. 학교가 학교 같지 않았다. 학교 로열박스에 앉아 있었다.
다시 계절이 돌고 돌아, 기가 막힌 가을 햇살과 그에 맞먹는 푸석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기에 왜 또 앉아 있을까. 기시감이 드는 동시에 낯선 이곳은 내가 다녔던 학교일까. 나는 수위 아저씨를 기다렸다. 해가 조금 이동을 했다. 아저씨가 나타났다. 수위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낯이 익었다.
해를 등지고 있지 않았는데 수위 아저씨의 얼굴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있지만 소리가 소거됐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깊이가 느슨했다. 아저씨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쩐지 수위 아저씨에게 나는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음 저 밑에서 올라오는 따뜻함 같은 것이었다. 수위 아저씨는 뒷짐을 지고 내가 보는 운동장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해가 또다시 조금 이동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도 조금 길어졌다. 해가 이동을 할 때마다 그림자도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 나는 수위 아저씨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살을 받으니 잠이 쏟아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저씨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서쪽숲은 이미 한 겨울이네,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가물가물 한 것이 발바닥으로 나의 의식과 자아가 몽땅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