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는 배달을 하기 위해 당근 거래로 자전거를 구입한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호는 투잡을 뛰어야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버틸 수 있다. 쌀국수 가게에서 음식을 받아서 배달을 갔는데, 그만 잘못 배달이 되었다. 그때부터 일이 꼬여간다.

겨우 제대로 배달해 줬지만, 다 식어빠진 쌀국수 때문에 배달시킨 사람은 화를 내고, 썰국수 가게에 전화한 지호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라는 말을 듣고,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니 높낮이가 없는 기계적인 음으로 방법을 빨리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지호는 난처한 얼굴로 손님에게 새 음식을 가지고 오는데 40분이 걸린다고 말하니까 그 손님은 불같이 화를 낸다.

지호는 다시 쌀국수 가게로 오니 주인은 손해 본 금액은 어떻게 할 거야? 고객이 별점테러하면 책임질 거냐? 등 이전 라이더도 여자였는데, 같은 말이 길어지면서 배달 시간이 지체된다. 초초한 지호. 속이 바짝 타들어간다.

음식을 받아 나오니 자전거를 자신의 가게 앞에 세워두었다고 욕을 하는 식당 주인아저씨에게 계속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빨리 배달해주고 싶은데 비까지 심하게 내린다.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비가 내려 자전거를 자물쇠로 채워두려는데 그것마저 비 때문에 쉽지 않다. 왜 이렇게 나는 되는 일이 없을까. 울음이 터질 것 같지만 배달을 해야 한다.

결국 버는 돈 보다 비싼 돈을 주고 택시를 타고 배달을 한다. 울고 싶지만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이런 조마조마한 일상의 반복, 자신에 대한 실망이 무겁게 느껴졌다.

모든 일이 끝나고 진이 다 빠져나간 지호는 그제야 허기가 몰려와 간식을 꺼낸다. 그때 간식의 겉표지에 [배달기사님 수고하십니다. 하나씩 가져가세요]라는 문구를 본다.

나를 모르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에게 받은 한 줄의 위로가 또 내일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교차되는 자신과 라이더의 모습을 보며 끝난다.

이 짤막한 영화는 강렬하다. 20분 러닝타임 속에 바뀌지 않은 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자꾸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사회적 약자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주연보다 조연들이 훨씬 유명한 배우들이다.

연기가 신의 경지에 다른 염혜란이 쌀국집주인으로, 류경수가 쌀국수를 배달시킨 사람으로, 현봉식이 또 다른 식당집주인으로 나온다. 아마도 이렇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것은 아무래도 감독 때문일 것이다.

영화 [메기]와 [야구소녀]의 히로인으로 [녹야]에서는 판빙빙과 함께 연기를 한 이주영의 감독데뷔작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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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내내 미소가 멈추지 않았던 영화다. 이렇게 청량하고 맑고 깨끗한 포카리 스웨트 광고 같은 첫사랑 이야기를 어쩌면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너무 잘 만들고, 잘 만들려고 했던 영화만 봐서 그런지 자꾸 보면서 의도치 않게 분석을 하게 되었는데, 고백의 역사는 오랜만에 예전 덕선이를 볼 때처럼 기분 좋았다.

덮어 놓고 친구 일이라면 달려드는, 귀에서 피를 내게 하는 백성래와 이상한 삼인방 친구들도, 사진기사 아빠도, 츤데레 담탱이도 보는 동안 흐뭇했다.

근 몇 년 동안 학교에 관한 영화나 시리즈는 전부 살벌한 학폭 이야기였다. 학폭 빌런들을 끝장내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지만 그게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였다.

고등학교 클럽 활동에서, 또 군대에서 많이 맞았지만 사람을 한 번도 때려 본 적이 없는 나는 빌런들을 때리는 액션이 좋으면서도 이상하게 그런 장면이 꽤나 스트레스다.

폭력이라는 것에 미학이 입혀지면 마땅한 것처럼 흡수한다. 학교, 학생들의 이야기가 몇 년 동안 그랬다.

그러다가 보게 된 고백의 역사는 맑고 깨끗한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초반 박세리가 고인돌을 만나는 장면부터 너무 재미있다.

둘 다 한 톤 낮춰, 오늘 좀 빗었네? 응, 오늘 숨 좀 죽있다. 부터 계속 재미있다.

손해교, 정지현 같은 깨알 같은 이름도 재미있고, 경상도 서울 사투리도 듣기 좋았다. 야, 한윤석? 이렇게 부르는 건 경상남도 권에서 고등학생이 친구를 부를 때, 딱 그렇다.

어? 할 만한 카메오도 재미있었다. 왜 우일이 형 이야기는 안 하냐고.

악성 곱슬머리의 고마세리가 바로 옆의 한윤석에게 다가가는데 꼬박 1년이 걸린 이야기 [고백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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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경과 수환, 이 두 사람의 사랑은 고요하고 적요하고 적막하지만,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이 무너질 수 있는 여러 날, 여러 밤이 나쁘지만은 않다.

감독은 원작 소설의 [나이가 들면 특별한 일 없이도 깊이 고여 있는 아픔이 찾아온다]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고여 있는 아픔이 점점 차올라 고통이 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한다.

영경과 수환의 호수 수면 같은 표정, 고요한 이미지와 공백과 침묵의 높낮이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를 보니 김설진 주연이었던, 이명세 감독의 [그대 없이는 못 살아]가 떠올랐다. 그 영화도 대사보다는 몸으로 영화를 이야기했다. 시 같아서 좋았다. 세상의 재미있게 본 영화는 기억에도 없는데, 그 초현실 같았던 영화는 이 영화 [봄밤]을 보면서 확 떠올랐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알코올 중독자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병이 깊어지는 환자의 고요하고 처절하지만 밤 속에서 같이 무너지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

두 사람의 사랑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절대 사랑스럽지 않고, 도저히 애틋하지 않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옆에서 같이 무너지고 망가지고 견뎌주는 것으로 사랑을 한다.

영경은 알코올로 몸이 망가지고, 수환은 병으로 몸이 망가지지만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김설진은 무용가 출신답게 온몸으로 영경을 향한 환자의 사랑을 표현한다. 그 몸부림과 그 눈빛이 보는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이 된다.

한예리는 처음 술자리에서 수환을 옆에 두고 혼자서 계속 술을 마신다. 수환이 잔을 들어 건배를 권할 때 잠시 미소를 짓는데, 그때 정말 알코올중독자 같았다.

그리고 점점 알코올에 잡아먹히는 연기를 하는데 한예리라는 네임을 소거하고 보면 진짜 알코올 중독자였다. 개인적으로 한예리는 영화보다는 영화음악 디제이로 더 나에게 다가왔었다.

요즘도 정든 님의 예전 영화음악 방송을 들으며 잠들기 때문에, 한예리도 디제이로 나에게는 더 각인되어 있다. 정든 님의 30년도 더 된 방송을 들으면, 게스트로 노영심, 김현철 등 당시의 파릇파릇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김현철은 야간 방송을 끝내고 집에 가다가 정든 님에게 붙잡혀 같이 방송을 하기도 했다.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내 옆에 그저 함께 있어주는 이의 그 마음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죽기는 싫지만 죽음이 다가올수록 편해진다. 이대로, 이 마음으로, 이 사랑으로 죽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

희망의 계절 봄이라도 밤은 어둡고 처절하며 생명이 죽어가고 춥기만 하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던 적이 있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대사는 별로 없는데 감정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영화 [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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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가왕의 가면으로 유명한 황재근이 어느 티브이 프로에 나와서 매일 들리는 카페에서 늘 아아와 라테를 주문해서 마시는데, 아아를 한 모금 마시고, 라테를 한 모금 마시다가 반 정도 남았을 때, 라테를 아아에 부으면 아이스라테까지 마시기 때문에, 세 잔을 마시는 느낌이라 풍족 감이 든다고 했다.

나는 이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있다.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나만의 풍족 감이 있다. 소박하고 하찮지만 혼자만이 간직하는 풍족 감이 있다.

예전에 삼대 천왕이라는 음식 프로그램이 인기 있을 때, 보조 진행자였던 EXID의 하니가 전통시장 고로케를 먹고 눈물을 흘려 사람들에게 욕을 듣고, 수많은 악플이 달렸다. 대체로 보기 불편했다는 시선이었다. 그 장면에서 하니의 눈물은 연출이 아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먹었던 고로케가 추억이 되면 충분히 의도치 않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맛이 있다. 예상도 못한 곳에서 그런 추억의 맛을 먹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핑 하게 떠오른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겨울] 편에서 두 번째 음식에서도 이치코가 먹는 설탕 간장에 담긴 떡은 추억의 맛이다. 추억이 낫토 떡에 입혀진 것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생존에 관여된 부분이 크지만, 그 음식점에서 너와 함께 먹었다는 추억, 그 추억이 고스란히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삼대 천왕에서 하니는 시장표 고로케를 한 입 먹는 순간 어린 시절에 힘들게 일하며 고생하던 엄마가 만들어줬던 고로케의 추억이 밀려왔을 것이다. 추억의 맛은 자주 해 먹을 수는 없다. 추억에 기인한 음식이 있다. 그런 음식은 추억의 맛으로 먹게 된다.

추억의 맛 때문에 그 음식을 일부러 찾기도 한다. 나만의 풍족 감이 있다. 추억으로만 먹게 되는 맛은 마치 달력의 뒤편처럼 늘 가까이 있지만 달력을 넘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아름답지만 안타깝고 쓸쓸한 맛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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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보다 키가 작은 8살 연우의 소원은 키다리아저씨처럼 다리가 길어지는 것이다. 연우는 친구와 놀다가도 시간이 되면 혼자서 놀고 있는 동생을 돌보러 집으로 가야 한다.

엄마는 밤늦게 들어오고, 냉장고 문을 열어도 키가 작아서 반찬통 하나 마음대로 꺼낼 수 없다. 동생은 대여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게 싫어서 그림을 그려 누나에게 보여준다.

연우는 생각이 많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되면 냉장고의 반찬도 쉽게 꺼낼 수 있고, 또 엄마가 동생을 혼낼 때, 꺼내는 선반 저 위의 회초리도 치울 수 있는데.

그러다가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친구의 집은 엄마가 모든 걸 챙겨주고 있었다. 가족 안에서 보호받는 느낌을 보는 연우.

연우는 친구의 동생 장난감을 몰래 훔쳐서 가방에 넣어서 동생에게 준다. 훔친 장난감으로 즐거워하는 동생을 보니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연우.

연우는 그때부터 친구에게도, 동생에게도 다 미안함뿐이다.

친구를 피하지만 친구가 연우를 찾아와 목욕탕 의자를 선물하며, 이 의자를 사용하면 냉장고에 반찬을 쉽게 꺼낼 수 있다는 말에 연우는 생각이 깊어진다.

그 의자에 앉아서 고민을 할 때 빛이 창을 투과해 연우의 얼굴에 떨어진다. 연우는 8살에 어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연우의 곁에는 연우를 지켜주는 친구도 있고, 무엇보다 훔친 물건을 돌려주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간직하는 연우가 연우 자신을 응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연우에게 힘을 보내게 되는 [연우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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