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경과 수환, 이 두 사람의 사랑은 고요하고 적요하고 적막하지만, 곁에 머물 수 있다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이 무너질 수 있는 여러 날, 여러 밤이 나쁘지만은 않다.
감독은 원작 소설의 [나이가 들면 특별한 일 없이도 깊이 고여 있는 아픔이 찾아온다]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고여 있는 아픔이 점점 차올라 고통이 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한다.
영경과 수환의 호수 수면 같은 표정, 고요한 이미지와 공백과 침묵의 높낮이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를 보니 김설진 주연이었던, 이명세 감독의 [그대 없이는 못 살아]가 떠올랐다. 그 영화도 대사보다는 몸으로 영화를 이야기했다. 시 같아서 좋았다. 세상의 재미있게 본 영화는 기억에도 없는데, 그 초현실 같았던 영화는 이 영화 [봄밤]을 보면서 확 떠올랐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알코올 중독자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병이 깊어지는 환자의 고요하고 처절하지만 밤 속에서 같이 무너지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이야기.
두 사람의 사랑은 전혀 아름답지 않고, 절대 사랑스럽지 않고, 도저히 애틋하지 않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옆에서 같이 무너지고 망가지고 견뎌주는 것으로 사랑을 한다.
영경은 알코올로 몸이 망가지고, 수환은 병으로 몸이 망가지지만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김설진은 무용가 출신답게 온몸으로 영경을 향한 환자의 사랑을 표현한다. 그 몸부림과 그 눈빛이 보는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이 된다.
한예리는 처음 술자리에서 수환을 옆에 두고 혼자서 계속 술을 마신다. 수환이 잔을 들어 건배를 권할 때 잠시 미소를 짓는데, 그때 정말 알코올중독자 같았다.
그리고 점점 알코올에 잡아먹히는 연기를 하는데 한예리라는 네임을 소거하고 보면 진짜 알코올 중독자였다. 개인적으로 한예리는 영화보다는 영화음악 디제이로 더 나에게 다가왔었다.
요즘도 정든 님의 예전 영화음악 방송을 들으며 잠들기 때문에, 한예리도 디제이로 나에게는 더 각인되어 있다. 정든 님의 30년도 더 된 방송을 들으면, 게스트로 노영심, 김현철 등 당시의 파릇파릇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김현철은 야간 방송을 끝내고 집에 가다가 정든 님에게 붙잡혀 같이 방송을 하기도 했다.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내 옆에 그저 함께 있어주는 이의 그 마음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죽기는 싫지만 죽음이 다가올수록 편해진다. 이대로, 이 마음으로, 이 사랑으로 죽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
희망의 계절 봄이라도 밤은 어둡고 처절하며 생명이 죽어가고 춥기만 하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던 적이 있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대사는 별로 없는데 감정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영화 [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