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예전에 다 올렸던 사진들인데 다시 올려 보는 거야. 사진이라는 게 나는 노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사진은 그때 그 시간을 붙잡아두잖아. 현실에서 보는 비현실이 사진이야. 노래도 그래.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 같잖아. 시가 그렇지. 시에 음을 갖다 붙인 게 노래니까.


우리는 뭔가 기대할 존재 같은 게 필요해. 아이에게는 엄마와 아빠, 애인, 의사, 종교인, 정치인. 우리는 늘 기대야 할 어떤 무언가를 찾아서 헤매곤 해. 그러나 대부분 배신을 당하고 말아. 거기에서 오는 배신의 고통은 파괴적이지.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배신하지 않는 게 ‘시’거든. 시는 사실 시인들의 고통으로 써낸 거야.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야. 시는 태어나는 순간, 시를 읽는 사람의 것이 되거든. 그래서 시는 배신하지 않고 나의 고통을 나눠갖기도 해.


이 사진은 나의 영국 친구가 아기를 낳았을 때 [손안에 피어난 작은 꽃]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을 담아 줬어. 아기의 이름은 찰리 로즈. 찰리 로즈의 엄마가 아주 좋아했지.



사진은 때때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담아내곤 해. 지구상 대부분의 생물체는 태어나자마자 일어나서 걸어 다녀. 어미가 새끼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해. 그런데 인간만이 태어나도 아무것도 할 줄 몰라. 그저 웅웅 거리기만 할 뿐이지. 그런데 엄마와 아기의 교감 같은 거 말이야. 엄마가 입술을 갖다 대면 뭘 아는지 웃는다고.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설명은 불가능하지만 사진은 그걸 포착해 내지. 결정적인 순간. 앙리 카르티에 브레숑의 사진 철학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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