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이 되면 호러블 한 봄에 대해서, 나의 결락에 대해서, 봄의 슬픔에 대해서 글을 적고 나는 봄날의 곰이 아니라 동백이 되어 목을 꺾어 밑으로 떨어진다. 아래로, 아래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결락을 맛보는 계절이 봄이다. 모든 세상이 화려하게 컬러풀하게 변하고 세상 곳곳의 벚꽃나무는 팝콘 같은 벚꽃을 피운다. 하지만 벚꽃의 생명은 마치 불꽃의 미학과 같아서 피융하며 하늘로 힘겹게 끓어오르는 소리를 내며 한 지점에 도달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낌과 동시에 무화하여 소멸한다. 피자마자 떨어지는 봄은 슬픈 계절이다. 그 속에는 우울이 웅크리고 앉아 마음 저 안쪽에서부터 아프게 긁으며 일어난다. 동백은 벚꽃처럼 꽃잎 하나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작정하고 목을 꺾어 그대로 죽음으로 절개한다. 가장 잔인하고 슬픈 계절, 봄. 화려하게 수놓는 이유는 빛의 고통이 십수만 가지의 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통이 점철되고 극화되는 계절 봄. 이런 봄에 우울을 느끼지 않으면 언제 느낄 수 있을까. 날이 따뜻하여 두꺼운 옷을 벗었지만 봄의 바다는 몹시 차갑거나 아주 차갑다. 그래서 봄의 바다도 슬프다. 세상의 슬픈 것들은 봄으로 집약되고 우리는 그 슬픔을 조금씩 떼먹으며 등에 살찌운다.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고 그저 잠시 스쳐가는 봄은 나이와 닮았고 시간을 닮았다. 봄은 가장 슬픈 계절이다.



해가 뜨기 전의 흐리고 슬프디 슬픈 봄의 이른 아침은, 바다의 모든 곳에 낯선 그리움이 짙게 깔려있다. 나는 그 바닷가를 처음 먹어보는 음식 맛을 느끼듯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가슴의 저 안쪽 어느 부분에서는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알아들을 수 없고 The War On Drugs의 Thinking Of A Place가 바다의 한 지점에서 나온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서서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길게 이어져 11분이나 되었지만 음악은 나를 그 자리에 꽁꽁 묶어 두었다. 어딘가 음악감상실 같은 곳에서 건방진 자세로 비스듬히 기대 음악만 듣고 싶다. 전자나 전파가 나오는 물품을 모두 제거한 채 그저 음악만 듣는다. 눈을 감고 노래가 하는 이야기 속으로 온몸을 담근다. 때로는 발끝부터 서서히 잠기기도 하고 그대로 한꺼번에 풍덩 빠져들기도 한다. 감았던 눈을 떠 보니 날짜변경선 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하얀 연기가 먹어버린 어두운 밤을 보면서 나는 날짜변경선 위에서 봄날의 생을 생각한다. 여기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나는 나의 고통과 마주한다. 고통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친밀감을 느낀다. 꼭 이른 봄 아침의 바닷가에서만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버리고 싶지만 차마 버릴 수 없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바다에 빠졌던 찰리 파커의 얼굴과 같다. 죽어야 끝이 나는 나의 부조리와 환멸 그리고 고통과 아픔들. 결국 나는 그것들을 끌어올려 같이 항해를 한다. 함께여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알아 버린 것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나의 숙명과도 같은 것들. 나는 오늘도 꿈같은 일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인 세계. 그건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친밀감을 지닌 고통과 낯선 그리움과 마주하고 나면 어느새 복사 촬영을 해놓은 사람을 보게 된다. 날짜변경선 위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신기한 일이며 동시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타인은 언제나 타인의 의식의 죽음을 원한다고 헤겔은 말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이 우리에게 방해되는 존재인가를 매일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고 전혜린도 말했다. 날짜변경선 위에서 나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친밀함이 잔뜩 깃든 고통과 타인과 함께 여야 함의 불행에 대해서 생각한다. 짧은 봄날의 바닷가에서.


The War on Drugs - Thinking Of A Place https://youtu.be/8d5ZbojE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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