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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잠자, 그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중 ‘사랑하는 잠자’ 그 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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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집을 나서려고 했다. 오겠다던 시계공 꼽추 아가씨가 한 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잠자는 시계공 아가씨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잠자는 아가씨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은 심장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사고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어요.라고 말한 것이 잠자의 뇌의 한편에 곱게 쌓인 먼지처럼 머물러 있었다.


시계공 아가씨가 말한 세계의 난리가 더 깊어졌는지 크르르하는 소리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잠자는 가운에서 벗어난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왔다. 매일 한 시간씩 계단을 오르고 내려갔다. 몸의 총체적 균형을 잡고 걷는 것에 집중을 한 덕분에 이제는 계단을 잘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몸이라는 것이 적응을 하니 이렇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잠자가 그녀를 만나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시계공 꼽추 아가씨와 헤어지면서 그녀가 굼실굼실 입체적으로 몸을 뒤틀며 브래지어를 바로잡는 동작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 세상의 여러 계단을 둘이서 나란히 오르내리고 싶었다. 원하면 된다는 그녀의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머리에 새겨졌다.


어쩌면 누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는 누군가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그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이겠지) 못으로 판자 몇 장으로 창문을 막아 놓은 방에서 모든 것을 치우고 그녀와 같이 잠이 들고 판자를 치운 창으로 들이치는 빈약한 햇살을 받으며 같이 일어나는 상상을 했다.


이봐 잠자, 지금 나가면 안 돼.


잠자는 자신에게 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삐걱거리는 복도의 저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에게 말을 하는 건 누구지? 이 집에 나 말고 누가 또 있었어?


잠자는 소리 쪽으로 삐죽 나온 귀로 최대한 소리를 들으려고 확실하게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이제 처음 눈을 떠서 움직일 때처럼 관절과 근육의 사용이 미성숙하지 않았다. 만약 공격성을 띠고 새가 날아온다고 해도 지팡이와 쟁반 같은 것으로 방어를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봐 잠자, 잘 들어보라고. 나는 자네가 눈을 떴을 때부터 죽 자네를 지켜봐왔어. 자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알았지.라고 복도 어딘가에서 소리는 잠자를 보고 말했다.


사랑,라고 잠자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 사랑 말이야. 하지만 잠자 자네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확실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 내 말이 맞지?


소리는 음폭의 변화가 없었다. 반드시 잠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겠다는 노력이 없어 보이는 동시에 소리는 반드시 잠자에게 소리를 전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누구십니까?


잠자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류하고 복도를 걸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끼익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수리를 한다며 자물쇠를 들고 가버려 뻥 뚫린 문의 공백이 눈에 들어왔다.


잠자는 잠깐 만났던 그녀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브래지어라는 것을 움직여 가슴을 고정하는 굼실굼실한 동작을 떠올리니 바지의 앞섶이 부풀어 올랐다. 잠자는 다시 당황스러웠다.


당신, 머리가 좀 모자란 모양이네. 그래도 고추만은 여전히 씩씩하시고.라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이봐, 잠자. 그래 그녀와 퍽이 하고 싶은가?


복도 저 끝에서 소리는 말했다.


그녀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퍽이 뭔지 모릅니다. 당신도 퍽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잠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금씩 걸으며 말했다. 오른손에는 인간 잠자로서 다시 걸음을 걸을 때 도움을 받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잠자는 지팡이를 꼭 쥐었다.


당연하지, 나는 퍽이 뭔지 알고 있지. 아마 잠자 자네만 빼고 어린아이라도 퍽이 뭔지 알고 있을 거야.


저기, 부탁이 있습니다.


잠자가 말했다.


부탁이 뭐냐고 소리는 되물었다.


제가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당신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잠자는 소리를 만나서 시계공 아가씨를 만나는 도움을 받기로 했다. 잠자는 소리의 정체를 몰라 두려웠지만 시계공 아가씨를 만날 수 있다면 두려움 같은 건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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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갑충이로 변해 죽었던 그레고르 잠자를 되살렸다. 하루키의 단편 집 ‘여자 없는 남자들’의 모든 이야기가 좋지만 나는 특히 이 단편 ‘사랑하는 잠자’가 너무 좋다. 갑충이로 변해서 죽어 버린 그레고르 잠자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래고르 잠자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었다. 아마도 카프카가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살아난, 아무것도 모르는 잠자 잎에 시계공 아가씨가 나타나지만 아가씨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끝이난다. 여러 하루키의 소설처럼 칼로 두부를 자르듯 아쉽게 끝나고 만다. 그래서 그 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이어서 한 번 적어 보았다.


이 표지는 카프카의 ‘변신’ 초판의 표지다. 1914년인가 카프카가 표지를 만드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책 표지이다. ‘변신’이라는 소설은 안 읽어본 사람도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고전 명작이다. 소설이란 본디 답이 확실하게 있지 않아서 ‘대답’보다는 ‘질문’이 많아야 한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쩌면 확실한 답보다는 책을 덮고 난 후 던지는 질문이 더 많은 소설이다.​


이 ‘변신’이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 중에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변신을 다시 책으로 만들어내는 출판사도 그중 하나다. 문지혁 작가도 말했지만 특히 책 표지에 벌레나 해충을 그림으로 일러스트 해놓은 카프카의 ‘변신’은 제대로 그 소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최초 카프카의 1914년 초판 표지를 만들 때 카프카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절대로 표지에 벌레를 그리면 안 된다고 했다. 벌레가 어디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백석의 시를 알려면 백석을 알면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것처럼 카프카의 ‘변신’을 잘 읽으려면, 그러니까 제대로 읽으려면 카프카를 알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좀 더 이 소설을 읽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카프카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이 소설을 독일어로 썼는데 그레고르 잠자를 ‘운거지퍼’라고 표현을 했다. 해충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가리켜 운거지퍼라고 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살아있는 동안 꽤 고심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카프카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마치 운거지퍼를 보듯이​.


카프카는 그로 인해 세 번이나 파혼을 하는 등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여타 소설을 읽어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쓴 소설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가 내지는 소설가는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하지만 카프카는 오로지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의 유희로서, 자신이 쓴 소설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즐기는 것으로 썼다. 그리하여 친구였던 막스 부르트에게 내가 죽으면 소설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선택이 없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일을 하고 생활을 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뭐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참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며 시작한다​.


학자들은 벌레나 동물이 되는 소설을 비커밍언에니멀이라고 하는데 이 동물로의 변신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자아가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아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라는 정체성에서 벌레라는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기능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나 환경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인격체의 한 부분인데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 정체성을 말한다. 그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정체성을 ‘호모 사케르’라고 하는데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는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 영화로 친다면 봉준호의 영화에 이 호모 사케르가 잘 나온다.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기능을 잃어버려 사회적으로 유효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 같은 호모 사케르 같은 사람은 인간사회에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만드는 것 또한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는 엄청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요컨대 치매환자, 노숙자, 장애를 가진 사람을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치부하고 벌레 보듯 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변신이란, 변신이 이루어진 그것이 확실하게 어떤 무엇이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아니다. 호모 사케르는 자신의 집과 자신의 사람들 또는 자신을 모르는 이들과 과거와 현재로부터 추방된 자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집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다. 그레고르를 보자마자 벌레라고 한다.

우리는 호모 사케르를 보고 청소부 아주머니처럼 벌레 보듯 한다. 내가 사회에서 소외당하면서도 누군가를 호모 사케르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아주 끔찍하다. 돈 잘 벌어오던 잠자가 죽고 난 후 가족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소풍을 간다. 딸을 바라보며 다 컸구나,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어. 라며 운거지퍼였던 그레고르 잠자가 없어진 자리에 또 다른 호모 사케르가 들어옴으로 사회는 유지가 된다. 카프카의 말처럼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에 던져지는 한 자루 도끼여야 한다고 했는데 변신은 참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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