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태엽 감는 새’를 다시 꺼냈다. 엽서까지 붙어 있는 책이라 오래전 책이고 벌써 여러 번 읽었는데 책은 방금 구입한 것처럼 너무나 깨끗해서 놀라고 내용은 또 처음 읽는 것 같아서 또 놀랐다. 안 그래도 놀라는 일 투성인데 놀라는 일은 늘 곁에 매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전시회를 끝내고 운이 좋게 지역 신문사 여러 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해서 불려 다니며 인터뷰를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집 구석에 있는 김영하 책들을 꺼내서 읽어보니 시간이 또 흘렀다. 김영하의 소설은 다 있었는데 또 몇 권이 사라졌다. 책에 발이 달려있는지 가만두는데도 시간이 지나 보면 사라지고 없다. 이 세상에 그런 물품들은 늘 존재한다.


여름이라 집 앞 바닷가에서 뒹굴뒹굴하며 김영하의 소설을 읽다 보니 또 타 버렸다. 살이 타고나면 피부에서 태양의 냄새가 난다. 태엽 감는 새는 4권이나 되니까 바닷가에서 여러 날 동안 읽고 나면 아마도 새까맣게 되어 있지 않을까. 일행은 바닷가에서도 온몸을 다 감고 있고 나는 그 반대다. 그래서 둘이 다니면 흑과 백. 태엽 감는 새의 초반에 스파게티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스파게티에 도가 틴 사람으로 10분을 삶아야 하는데 9분은 너무 짧고, 그렇다고 11분은 너무 길다. 삶도 늘 그런 순간에 봉착한다. 축구도 10명이 뛰기에는 너무 모자라고 12명이 뛰기에는 흘러넘친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옷을 입을 때 왼쪽 다리 먼저 집어넣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이불의 끝자락을 침대 끝에 맞추는 것처럼 우리는 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것을 균형이라 한다면 우리는 균형을 잡음으로 해서 조화를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태엽 감는 새는 크고 넓게 보면 주인공이 그런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닐까.

태엽 감는 새에서 구미코는 주인공에게 결혼생활에서 오는 어떤 무엇에 대해서 결국 터지고 만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내가 그것을 그동안 싫어했는지 조차 모르고, 왜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냥 휴지는 되는데 꽃무늬 휴지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왜 소고기와 피망을 같이 볶는 걸 싫어하는지 왜 그동안 말 하지 않았는지, 왜 오늘, 지금 문득 그 모든 것들을 토해내는지 주인공은 모른다.


구미코는 화나는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걸 주인공은 잘 모른다. 그저 나와 몸을 나누고 결혼생활을 하는 아내라 모든 것이 평안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도 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무엇 때문에 기껏한 음식을 다 버리고 화를 내고 싶지만 구미코에게 다가가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구미코는 테이블에 엎드려 얼굴을 묻고 만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위로는 위로를 하지 않을 때 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건 사고의 장애, 망상, 환각, 현실과의 괴리,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과학자들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뇌파를 추적 조사하니 조현병에 걸린 사람과 흡사하게 나왔다고 한다.


사랑의 도달점에서 미쳐버릴 것 같은, 미치고 싶지만 미쳐지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 모르고 알 수 없는 앞날에 자신을 던질 때 가능한 것이 사랑의 중독이다. 이런 제정신이 아닌 사랑을 결혼으로 인해 묶어 두려 하지만 보통 3년이면 유통기한이 다 끝난다.


잠시 벗어난 얘기로 모딜리아니와 14살이나 어린 그의 아내 잔 에뷔테론은 표층적으로는 아주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자의 그림들에 눈동자가 없다.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알게 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릴 겁니다. 에뷔테론은 말했다. 난 당신의 영원한 모델이 되고 싶어요.


잔 에뷔테론도 화가다. 그리고 요즘의 기준으로 봐도 아름답고 예쁜 여성이었다. 표층적으로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두 사람의 사랑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엉망진창이었다. 이럴 수 없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예술사에서 가장 막장으로 생활한 인간이 모딜리아니였다. 알콜 중독에 마약에 각종 질병에 여성 편력이 상당했다.


심지어 에뷔테론 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아서 기분이 좋아 이름을 지으러 가는 도중에도 여자와 눈이 맞아서 이름 짓는 걸 포기하고 바람을 피러 간 인간이었다. 에뷔테론과 모딜리아니는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신접살림을 차린다. 그때 모딜리아니의 나이는 33세, 잔은 19세였다. 잔 에뷔테론의 부모가 반대하고 난리 났다. 그럼에도 결혼했지만 맨날 던지고 부수고 엄청난 전쟁과도 같은 사랑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평온하고 규범적인 삶을 원하지만 그 안에서 화산처럼 터지고 폭발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 사랑 일지도 모른다. 에뷔테론은 인간으로는 전혀 쓸모없는 모딜리아니의 곁을 끝끝내 안 떠난다. 같이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자기애가 폭발하는 시기였다, 모딜리아니가 질병으로 37살인가 죽고 만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름다운 에뷔테론도 자살로 모딜리아니를 따라간다. 죽음으로 끝내 곁을 지킨다. 사랑의 여러 유형 중에 진짜 사랑을 했을 수도 있다. 사랑은 금방 고갈된다. 그 뒤를 이끌지 못하는 무엇이 없다면 구미코처럼 살아있으되 죽은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