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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주인공이 특정한 시간을 반복하여 겪는다는 설정을 보고 처음엔 SF에 종종 나오는 루프물을 떠올렸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서 며칠 동안 여러 잡다한 일들을 하는 와중에 퍼뜩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가 겪는 심리를 적은 글 같지 않은가.
주인공은 패턴을 읽을 줄 알고 이미 다른 패턴을 시험해 본 적이 있으며 다른 패턴으로 가면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기는 하지만 히로인과는 만나지 못한다니 말이다. 주인공은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동급생을 죽이지 않는 선택을 하면 그 여자애와는 무조건 이루어질 수 없다니 게임 시나리오를 따라가기만 해야하고 직접 내용을 뜯어고칠 순 없는 플레이어와 같지 않은가. 실제 삶이었다면 무한한 변수가 존재하기에 그렇게 확신하지 못한다. 굳이 과거로 돌아왔는데 한 여자와 다시 만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하는 걸 보면 이 소설의 진짜 주제는 죄와 용서의 의미에 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패턴' 대신에 게임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인 '루트'를 써도 딱 들어맞는다. '패턴'이란 용어만 봤을 땐 SF 작가인 로저 젤라즈니를 가장 먼저 떠올렸기에 SF 설정을 차용했다고만 생각했는데 말이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주인공의 삶이 바뀌는 루트가 여럿 존재하고 루트가 갈리는 분기점이란 것이 있다. 플레이어는 그 분기점을 알기 위해 게임 공략을 찾아볼 수도 있고 그 분기점을 세이브하기도 한다. 게임의 주인공이 히로인과 만나 연애를 하는가 여부는 그 분기점에서 한 선택에 달린다. 참고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주인공은 고등학생일 경우가 많다. 또한 엔딩에서는 그로부터 시간이 몇년 흘러 주인공이 어른으로서 어떤 삶을 사는지 보여주고는 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란 책에서 말했던 '게임적 리얼리즘'을 드러낸 소설, 이른바 메타픽션 중 하나임에 새삼 흥미를 느꼈다. 소설 자체는 작가 특유의 간결한 문체 덕분에 술술 읽혔고 주인공이 자기 삶이 망가질 것임을 알면서도 그 패턴을 선택했다는 얘기에서는 '얘가 그 여자애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순정물이네'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하긴 '에반게리온' 관련한 소설도 쓴 작가니 놀랍지는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끝에 실린 심사평과 인터뷰에서 게임 관련해선 누구 하나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뭐 소설 한 편 재미있게 잘 읽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더 흥미진진하게 논의할 수도 있었는데 이건 너무 시시하잖아. 그건 그렇고 '패턴'이란 용어로 위장전술을 펼치다니 이 작가 깜찍한데?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