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터 Littor 2017.10.11 - 8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중병에 걸리면 삶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어리면 어린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몸에 대한 걱정을 늘 하고 살아야한다. 릿터 이번 호 칼럼들은 '몸-테크놀로지'란 이번 호 소제목에 맞게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몸과 사회가 어떻게 엮이고 기술 발전은 그런 관계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대한민국에서 삶의 전 단계에 걸쳐 벌어지는 몸의 관리 양상, 여성의 몸과 과학기술 발전의 상호관계, 장애와 기술 발전에 대한 담론 등등 최신 담론들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현대 몸 관리 기술의 변화는 어떻게 나아갈지 어쩌면 올더스 헉슬리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주는 세상이 더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현실 자체이고 그게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세상이 조만간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은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일이 당연한 일로 지금은 당연한 일이 비윤리적인 일로 바뀔지 모른다니. 윤이형의 <손바닥>이란 짧은 소설을 읽으며 한때는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키우든 관여하지 않는 게 당연히 여겨졌고 민간요법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예방주사 접종 역시 지금과 같이 강제하진 않았던 세상을 떠올렸다. 앞으로 건강 기술 관리가 어떻게 변할지 문외한으로선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밖에 흥미롭게 읽은 에세이는 강지혜 시인의 제주살이 에세이였다. 역시나 <효리네 민박>을 보며 제주살이를 잠시나마 꿈꿔봤던 내게 만만치 않을 거라 엄포를 놓으면서도 마지막에 자연의 반딧불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한 개 쥐였다.
서경식 선생님의 인문기행 에세이도 한단락 지어진 느낌이다.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유럽이란 혼란스러운 세상을 산 예술가들은 저마다 기로에 섰고 각자 자기 길을 걸어갔다. 그들 생의 여정을 그들이 낳은 미술품을 통해 사유하는 것은 일반인인 우리에게도 통찰할 거리를 준다.
인터뷰는 요즘 '핫한' 분들이 함께했다. 사실 영화는 잘 몰라서 김양희 감독의 영화도 아직 본 적 없지만 호감이 생겨 찾아볼까 생각했고 박준 시인 인터뷰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는 누군가를 마음속으로 오래오래 미워하는 것이다'란 그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 기억하는 행위에 대한 그의 존중어린 마음가짐이 좋았다. 요새 가장 뜨거운 두 분인 리베카 솔닛과  조남주 소설가, 조남주 소설가가 리베카 솔닛을 인터뷰했다니 과연 '릿터'는 요새 뜨거운 화제가 뭔지 잘 파악한다. 리베카 솔닛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즐거이 읽을 것이다.
소설은 <오리>를 읽고 처음엔 전원풍경을 배경으로 한 오리와 노부부, 마을 아이들이 보여주는 따뜻하지만 애잔한 동화 같은 이야기리라 예상했는데 왠걸 오리가 심심하면 죽어나자빠져 몰래 다른 오리로 갈아치우는 것도 그렇고 마을 아이들이 알고 보니 순박은커녕 되바라짐의 극치였다는 것에서  이거 혹시 범죄 미스테리로 결말이 나는 거 아니냐 조바심 내며 읽었다. 결국 노부부 아들이자 주인공 화자의 남동생에게 아이가 생기며 갈등은 무난히 해결됐지만 세상에 온전히 믿을 건 없다는 얘긴가 싶어 기분이 묘했다. 김숨의 소설은 여성 노동자의 신산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주란 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한 친구와의 관계와 엮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보내는 형식으로 오래 알고 지내는 이가 완전 타인보다 더 상처를 줌을 보여준다.
시는 김혜순 시인의 연작시가 인상깊었다. '아빠'의 죽음에 관한 화자의 느낌들을 적은 듯한데 '엄마'가 아닌 '아빠'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기묘했다. 보통 이런 죽음에 대해 말할 때 특히 성별이 여성인 시인이라고 하면 엄마의 죽음과 엄마의 몸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왜 아빠를 제재로 삼았는지 단순히 '아빠'의 죽음이 더 와닿았다거나 더 최근의 일이었다고 하면 답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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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보잡 관심 종자에게 먹이를 주지 말자.
하마터면 얕은 수에 넘어갈 뻔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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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간된 장르소설 잡지를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미스테리아> 창간 소식을 듣고 기뻐서 속으로 깨춤을 추었답니다. 칼럼들도 신선하고 알차서 좋더라고요. 앞으로도 죽 오래 오래 함께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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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며 문장을 고쳐보려고 한 다스의 볼펜에 포함된 빨간색 볼펜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모든 문장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쓰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사랑했던 여자의 귀밑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내나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느낄 수 있는 엉덩이와 허리 사이의 굴곡 같은 것들을 검은색 볼펜은 묘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볼펜을 쥐는 즉시 머릿속에 줄줄 흘러나온 검은색 문장들이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는 빨간색 문장들을 써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온몸에 남은 오감의 경험을 문장으로 표현해야 할 텐데, 그건 쉽게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았다.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실제의 경험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 고통이란 이 양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됐다. 빨간색 볼펜을 손에 들고 괴로워하던 나는 그 고통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경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괴로운 것이다. 한 여자와 헤어진 뒤의 나는 그녀를 사랑하던 시절의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빨간색 볼펜을 들고 내가 쓰지 못한 것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작가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빨간색 볼펜으로 검은색 문장들을 고쳐썼을 때다.˝-`푸른 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사월의 미 칠월의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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