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

나혜석의 조카 나영균의 회고에 따르면, 나혜석은 이혼 이후의 수기를 어느 잡지에 연재할 생각으로 계속 글을 썼다. 다만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었다. 원고를 쌓은 높이가 적어도 50센티미터는되었지만, “원고더미가 다락에 쌓여만 있다가 6.25 전쟁이 나면서 난리 통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녀 자신도 새로운 글을 발표하는 것만이 사회적 재기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가능성은 차단되었고, 그녀는 조금씩 세상에서 잊히기 시작했다.


(30-31)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 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하고 싶었다.


(59)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담뱃대를 드시고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하시던 무서운 눈을 생각하며 몸을 흠찔했다.


(61-62)

경희는 이제까지 비녀 쪽 찐 부인들을 보면 매우 불쌍히 생각하였다. ‘저것이 무엇을 알고 저렇게 어른이 되었나. 남편에게 대한 사랑도 모르고 기계같이 본능적으로 저렇게 금수와 같이 살아가는구나. 자식을 귀애하는 것은 밥이나 많이 먹이고 고기나 많이 먹일 줄만 알았지 좋은 학문을 가르칠 줄은 모르는구나. 저것도 사람인가.’ 하는 교만한 눈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늘은 그 부인네들이 모두 장하게 보인다. 설거지하는 시월이 머리에도 비녀가 꽂힌 것이 저보다 훨씬 나은 것도 같이 보인다. 담 사이로 농민의 자식들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저보다 훨씬 나은 딴 세상 같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저는 저 같은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고, 제 몸으로는 저와 같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저와 같이 이렇게 가기 어려운 시집을 어쩌면 그렇게들 많이 갔고, 저와 같이 이렇게 어렵게 자식의 교육을 이리저리 궁구하는 것을 저렇게 쉽게 잘들 살아가누.’ 생각을 한즉, 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부인들은 자기보다 몇십 배 낫다.


(125-126)

다른 나라 남자들은 그러할지 모르거니와 굴레를 벗지 못하는 조선 남자들에게 진보가 있으면 몇 푼어치가 있겠소? 그중에도 되지 못한 것일수록 제 앞 하나 꾸리지 못하는 것이 언필칭(말을 할 때마다 이르기를) 여자가 어머니 어떠니 하는 것을 보면 참 아니꼬와. 3년 전에 먹은 오례송편이 다 나올 듯하지. 실상 학식 있고 인격 있는 남자들이야 다 자기 앞을 꾸려 가려기에 어느 여가에 여자 타령할 여유가 있답디까?


(129)

얼마 있지 않은 동안에 어찌 알겠소마는 몇 번 활동사진에서 보니까 한번 마음에만 들면 비록 유부녀 유처자라도 목숨을 바쳐 가며 끈기 있게 사랑을 할 줄 알며, 한 번 틀리는 일이 있으면 언제 알았더냐시피 씩 돌아서면 고만이고 대담스러운 단념심이 구비하였습니다. 묘년(妙年, 스무살 안팎의) 여자를 유혹해 내는 수단도 용하거니와 미남자의 꾀에 빠지지 아니하는 피신 수단도 또한 용합니다. 그만치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남녀 교제라도 재미있을 것이요, 의미가 있고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을 것입니다.


(163)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동양 사람이 서양을 동경하고 서양인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반면에 서양을 가 보면 그들은 동양을 동경하고, 동양 사람의 생활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자기 생활에 만족하는 자는 없사외다. 오직 그 마음 하나 먹기에 달린 것뿐이외다. 돈을 많이 벌고 지식을 많이 쌓고 사업을 많이 하는 중에 요령을 획득하여 그 마음에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외다. 즉 사람과 사물 사이에 신()의 왕래를 볼 때뿐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외다.


(163-164)

부부간에 어떻게 하면 화합하게 살 수 있을까. 일 개성과 타 개성이 합한 이상 자기만 고집할 수 없는 것이외다. 다만 극기를 잊지 마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리고 부부 생활에는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사외다. 1, 연애 시기의 때에는 상대자의 결점이 보일 여가 없이 장처(長處, 장점)만 보입니다. 다 선화(善化) 미화(美化)할 따름입니다. 2, 권태 시기, 결혼하여 3, 4년이 되도록 자녀가 생()하여 권태를 잊게 아니 한다면 권태증이 심하여집니다. 상대자의 결점이 눈에 띄고 싫증이 나기 시작됩니다. 통계를 보면 이 때 이혼 수가 가장 많습니다. 3, 이해 시기, 이미 부()나 처()가 피차에 결점을 알고 장처도 아는 동안 정의(情誼)가 깊어지고 새로운 사랑이 생겨 그 결점을 눈감아 내리고 그 장처를 조장하고 싶을 것이외다. 부부 사이가 이쯤 되면 무슨 장애물이 있든지 떠날 수 없게 될 것이외다. 이에 비로소 미와 선이 나타나는 것이요, 부부 생활의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192-193)

기백만 인() 여성이 기천 년 전 옛날부터 자식을 낳아 길렀다. 이와 동시에 본능적으로 맹목적으로 육체와 영혼을 무조건으로 자식을 위하여 바쳐 왔나이다. 이는 여성으로서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한 도덕이었고, 한 의무이었고, 이보다 이상 되는 천직이 없었나이다. 그러므로 연인의 사랑, 친구의 사랑은 상대적이요, 보수(報酬)적이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은 절대적이요, 무보수적이요, 희생적이외다. 그리하여 최고 존귀한 것은 모성애가 되고 말았사외다. 많은 여성은 자기가 가진 이 모성애로 인하여 얼마나 만족을 느꼈으며 행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모성애에 얽매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비참한 운명 속에서 울고 있는 여성도 적지 아니하외다. 그러면 이 모성애는 여성에게 최고 행복인 동시에 최고 불행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자기 개성을 잊고 살 때, 모든 생활 보장을 남자에게 받을 때 무한히 편하였고 행복스러웠나이다마는, 여자도 인권을 주장하고 개성을 발휘하려고 하며, 남자만 믿고 있지 못할 생활 전전에 나서게 된 금일에는 무한히 고통이요, 불행을 느낄 때도 있는 것이다.


(197)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쇠사슬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202-203)

감정의 순환기가 10년이라 하면, 싫었던 사람이 좋아도 지고 좋았던 사람이 싫어도 지며, 친했던 사람이 멀어도 지고 멀었던 사람이 친해도 지며, 선한 사람이 악해도 지고 악했던 사람이 선해도 지나이다. 씨의 10년 후 감정은 어떻게 될까. 이상에도 말하였거니와 부부는 세 시기를 지나야 정말 부부 생활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미 그대의 장처 단처를 다 알고 씨는 나의 장처 단처를 다 아는 이상 상호 보조하여 살아갈 우리가 아니었던가.

하여간 이상 몇 가지 주의로 이혼은 내 본의가 아니요, 씨의 강청이었나이다. 나는 무저항적으로 양보한 것이니 천만 번 생각해도 우리 처지로 우리 인격을 통일치 못하고 우리 생활을 통일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울러 바라는 바는 여든 노모의 여생을 편하게 하고, 네 아이의 양육을 충분히 주의해 주시고 나머지는 씨의 건강을 바라나이다.


(205)

아니지, 몸이 늙어 갈수록 마음은 젊어 가는 것이야. 오스카 와일드의 시에도 몸이 늙어 가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젊어 가는 것이 슬프다고 했어, 그러기에 서양 사람은 나이 관념이 없이 언제까지든지 젊은 기분으로 살 수 있고, 동양 사람은 늘 나이를 생각하기 때문에 쉬 늙어.”


(206-207)

이혼 사건 이후 나는 조선에 있지 못할 사람으로 자타 간에 공인하는 바이었고, 사오 년간 있는 동안에도 실상 고통스러웠나니, 1, 사회상으로 배척을 받을 뿐 아니라 나의 이력이 고급인 관계상 그림을 팔아먹기 어렵고 취직하기 어려워 생활 안정이 잡히지 못하였고, 2, 형제 친척이 가까이 있어 나를 보기 싫어하고, 불쌍히 여기고, 애처로이 생각하는 것이요, 3, 친우 지인들이 내 행동을 유심히 보고 내 태도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아니다, 이 모든 조건쯤이야 내가 먼저 있기만 하면 이겨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보다 내 살을 에이는 듯 내 뼈를 긁어 내는 듯한 고통이 있었나니 그는 종종 우편배달부가 전해 주는 딸 아들의 편지이다. ‘어머니 보고 싶어하는 말이다. 환경이란 우습고도 무서운 것이다. 환경이 일변하는 동시에 과거의 공적은 공()이 되고 과거의 사실만 무겁게 처져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따라다니는 과거를 껴안고 공에서 생()의 목록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247)

나는 분만기에 닥쳐올수록 이러한 생각이 났다. ‘내가 사람의 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있기에 자식이 생기는 것이지.’하며 아무리 이리저리 있을 듯한 것을 끌어 보니 생리상 구조의 자격 외에는 겸사가 아니라 정신상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품이 조급하여 조금조금씩 자라 가는 것을 기다릴 수 없을 듯도 싶고, 과민한 신경이 늘 고독한 것을 찾기 때문에 무시로 빽빽 우는 소리를 참을 만한 인내성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무지몰각하니 무엇으로 그 아이에게 숨어 있는 천분과 재능을 틀림없이 열어 인도할 수 있으며, 또 만일 먹여 주는 남편에게 불행이 있다 하면 나와 그의 두 몸의 생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그림은 점점 불충실해지고 독서는 시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교양하여 사람답고 여성답게, 그리고 개성적으로 살 만한 내용을 준비하려면 썩 침착한 사색과 공부와 실행을 위한 허다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생기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게는 군일 같았고, 내 개인적 발전상에는 큰 방해물이 생긴 것 같았다. 이해와 자유의 행복된 생활을 두 사람 사이에 하게 되고, 다시 얻을 수 없는 사랑의 창조요 구체화요 해답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행복과 환락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어찌나 슬펐는지 몰랐다.


(255)

그리하여 저 소유자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으레 제 물건 찾듯 이 불문곡직하고 찾는구나. 나는 웃음이 나왔다. “세상 일이 이다지 허황된다……” 하고. 그리고 에라 가져가거라.”하는 퉁명스러운 생각으로 지금까지 맡아 두었던 두 젖을 그 쪼그만 소유자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하회를 기다리고 앉았었다. 그 쪼끄만 주인은 아주 예사롭게 젖꼭지를 덥석 물더니 쉴 새 없이 마음껏 힘껏 빨고 있다. 내 큰 몸뚱이는 그 쪼그마한 입을 향하여 쏠리고 마치 허다한 임의의 점과 점을 연결하면 초점을 달하듯 내 전신 각 부분의 혈맥을 그 쪼그마한 입술의 초점으로 모아드는 듯싶었다. 이와 같이 벌써 모()된 선고를 받았다.


(270-271)

최후로 씨게 요망하는 바는 나도 신여자로 자처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신인이라고 해 주는 것을 별로 영광으로 알지 않는다 함이외다. 나는 사상가도 아니요, 교육가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외다. 다만 사람의 탈을 썼고,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사랑으로 살아갈 도리만 찾을 뿐이외다. 혹 다른 때 인연을 맺게 되더라도 명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씨여 사상적 방황이란 그다지 못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치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하여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


(317-318)

자녀 중 만일 허물이 있을 때는 그 어머니를 책하지 않고 그 아버지를 책합니다. 아버지는 먼저 죽고 어머니가 있다면 그 어머니는 할 수 있는 대로 자녀를 교양시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먼저 죽고 아버지가 있다면 다른 여자가 들어와 살림을 하게 되는 동시에 자녀 교육은 등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하여서는 어머니가 살아 있고 아버지가 먼저 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만 있을 때는 그 책임을 어머니에게 지우나, 양친이 있을 때는 그 책임을 아버지에게 지웁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 다른 남편에게 가면 그 책임을 남자에게 지우며, 결혼 아니 한 여자가 아이를 가질 때는 그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게 됩니다. 자식이 있고 이혼소송이 나게 되면 재판장은 양친을 보아 유리한 편으로 자식의 책임을 지우게 합니다.


(322)

사람은 누구든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을 사람은 어느 시기에 가서 자각한다. 아무라도 한 번이다 두 번은 다 자기 힘을 자각한다. 그것을 받는 사람은 즉 자기를 잊지 않는 행복을 느끼는 자다. 또 사람은 자기 내심에서 자기도 모르는 정말 자기가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 곧 자기를 잊지 않는 것이 된다. 요컨대 우리들의 현재 및 미래의 생활 목표의 신앙 및 행복은 오직 자기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수밖에 아무것도 우리의 맘을 기쁘게 해 줄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자기 내() 생활의 전개를 자기가 보장하려는 것인만치 지실(摯實)(손에 잡히는 열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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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러 패러독스 - 수학소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공식 e^iπ=-1
김상미 지음 / 궁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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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오일러 등식, 아빠도 인정한단다. 오일러 등식은 e + 1 = 0 이라는 식이란다. 자연상수 e는 나중에 고등학교 때 배울 텐데, 그 값이 2.7183… 으로 시작하는 무리수이고, i는 허수이고, π는 너희들도 아는 원주율.. 이것도 3.1415로 시작하는 무리수이고그런데, 이것들을 위와 같이 잘 조합한 다음에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숫자인 1을 더하면 0이 된다는 것이 정말 너무 신기하구나.

그런데 이런 식은 오일러라는 유명한 수학자가 발견했단다. 관계가 없는 숫자들의 조합에 더하기 1을 하면 0이 되다니. 누군가 프로그램하지 않고는 믿기지 않는구나. 정말 이 세상은 누군가 프로그램으로 만든 세상이 아닌지 의심이 되는구나.

….

아빠가 이번에 읽은 <오일러 패러독스>란 책도 책 제목에 오일러가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되어 읽게 된 책이란다. 책 뒷표지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읽는 수학소설로 태어났다고 적혀 있었단다. 지은이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단지 책제목에 오일러가 적혀 있어서 읽게 된 <오일러 패러독스>. 책이 얇아서 책 이야기는 간단히 할 수 있겠구나.


1.

고등학교 수학교사 I. 이름이 I인 것을 보니, 오일러 등식에 나오는 허수 i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니셜을 표기한 것일까? I는 어느날 선배 쿤이 찾아왔는데, 써메이션이 사라졌다고 했어. 이름이 써메이션. 써메이션은 수학에서 합을 나타내는 기호의 영어 이름이기도 하단다. 써메이션은 I의 친구이기도 해.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I가 써메이션의 집을 찾아가 보니, 정말 깔끔하게 정리하고 어디론가 떠난 것 같았어. 써메이션의 집에서 I는 아브기와 찍은 사진을 보고 아브기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단다. I, 써메이션, 아브기 모두 학창 시절 친구였단다. I는 써메이션을 찾기 위해 옛 친구들에게 하나 둘 연락을 해보았어. 매트, 티몬, 아크만, 아브기, 하울그들은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때 써메이션과 함께 했던 친구들이란다. 친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하울 같은 경우는 써메이션과 사이가 좋질 않았어. 사실 그것은 오해로 생긴 일인데, 하울이 잘못 알고 있었어. 고등학교 때 하울에게 폐를 끼치게 한 것은 써메이션이 아니라 마크라는 친구였어. 하울은 뒤늦게 알고 써메이션을 찾게 되면 사과하겠다고 마음먹었지.

혹시 몰라서 I는 마크라는 친구에게 연락했는데, 마크는 최근까지 써메이션과 함께 연구를 했었다는 거야.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야. 둘은 커넥톰 지도를 연구하고 있었대. 커넥톰 지도란 뇌 속에 있는 신경 세포들의 연결을 종합적으로 표현한 뇌지도라고 하는구나. DNA 지도만큼 그것이 완성되면 엄청난 성과래. 그런데 그간 업적을 발표하는 학회를 앞두고 써메이션은 모든 자료를 가지고 사라졌다고 했어. , 사실은 써메이션이 고등학교 때 자신에게 뒤집어 씌운 것에 대한 복수였단다. 아무튼, 마크도 써메이션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어.

친구들은 써메이션을 찾으면서 고등학교 시절의 옛추억도 떠올랐어. 써메이션이 주도하여 밤에 몰래 모임을 갖기도 했지. 친구들이 모두 소위 범생들이었어. 써메이션은 친구들을 모아 놓고, 오일러 등식에 대한 증명을 해 보이기도 했단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밤에 몰래 만나서 오일러 등식을 증명하다니. , 현실성이 약간

암튼, 친구들은 옛 추억을 소환하면서도 써메이션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단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들은 써메이션의 초대장을 받게 된단다. 마치 고등학교 때 밤에 몰래 만나자고 보낸 초대장처럼 말이야. 그런데 만나는 장소를 문제로 내서, 친구들은 그 문제를 풀어야만 했어. 친구들이 범생이라고 했지? 다들 그 문제를 풀어 써메이션의 초대장에 암시하는 장소로 갔는데 그곳은 어떤 창고였고, 그곳에는 써메이션은 없고, 써메이션의 일기가 있었어. 그 일기에는 써메이션의 비밀이 적혀 있었단다.

써메이션은 치매를 앓고 있다고 했어. 치매는 원래 나이 드신 분들이 걸리는 병이지만, 아주 간혹 젊은 사람에게도 걸릴 수 있다고 하더구나. 친구들은 결국 써메이션이 머물고 있는 병원을 찾았지만, 써메이션은 이미 병세가 악화되어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오일러 등식을 추억으로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우정을 다룬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너희들도 나중에 좀더 커서 읽어보렴. 아주 재미있지는 않지만, 오일러 등식, 친구들의 우정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으니까.


PS:

책의 첫 문장: 국립뇌과학연구소의 컨퍼런스룸 앞에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책의 끝 문장: I와 하울은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을 누른 채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우동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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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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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알라딘 서점의 블로그 알라딘 서재에서 알게 된 책이란다.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사람이 쓴 <>이라는 소설이야. 장르는 SF. 시간 여행을 하는 그런 소설이란다. 내가 원할 때 하는 시간 여행이 아니라, 원하지 않을 때도 하는 강제 시간 여행이지. 그런데 주인공이 흑인인데, 강제 시간 여행을 어디로 가느냐, 아직 노예 해방이 되지 않은 시대의 미국 남부 지역으로 가게 된단다. 끔찍하겠지?

우리가 강제 시간여행을 해서, 신분 제도가 엄격한 조선시대 천민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상상을 하면 끔찍할 것 같구나. SF 소설이지만, 인종 차별과 여성 차별에 대한 문제점도 부각시켰다는 점. 이 작품이 그래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구나. 그런데 재미도 엄청났단다. 번역도 잘 하셔서 그런지 매끄럽게 잘 읽어졌고, 쉽게 몰입을 할 수 있었단다. 너무 좋게 읽어서 지은이 옥타비아 버틀러의 다른 책들도 찜 해 두었단다.


1.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79년이고, 이 소설 속 배경은 1976년이었단다. 주인공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흑인 여성인 다나이고, 다나는 케빈과 결혼한 사이였어. 이 소설이 노예 해방 이전으로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다나의 남편인 케빈이 백인 남성이라는 점을 이야기해주어야겠구나.

어느날 케빈은 거실에 있던 다나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십여 초 후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했단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진흙투성이에 옷이 젖어 있었어. 도대체 어떤 일이 있던 것일까. 거실에 있던 다나는 갑자기 어지러워지고 세상에 빙빙 도는 것을 느끼고 다시 정신을 차렸더니 어떤 벌판이었어. 호수에 빠진 아이가 보여서 엉겁결에 구해서 인공호흡을 해서 살려냈단다. 그 아이의 이름은 루퍼스라는 백인 소년이었어. 뒤늦게 총을 들고 온 소년의 아버지가 와서 자신의 아들은 죽이려고 했냐면서 다나를 밀치고 총을 겨눴어. 갑작스런 일이 벌어지고 설명할 틈도 없이 총에 맞아 죽을 위기, 다나는 다시 자신의 거실로 돌아왔단다. 다나는 자신이 겪은 일이 무슨 일인지 몰랐어. 나쁜 꿈을 꾼 것 같았지만, 케빈이 이 상황을 모두 목격했지.

며칠 뒤 다나는 다시 어지러워졌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앞서 보았던 루퍼스의 방이었어. 갑자기 자신의 방에 나타난 다나를 본 루퍼스도 놀랐어. 하지만 예전에 자신을 구해주었던 사람이란 걸 알고 경계심을 낮췄어. 그리고 둘은 이야기를 나눴단다. 이야기를 해보니 루퍼스가 살고 있는 곳은 1815년이었어.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노예제도가 있는 남부 지방. 호수에서 루퍼스를 구했던 것이 며칠 전인데, 루퍼스가 부쩍 자라 있는 것이 이상해서 물어보니, 그건 몇 년 전에 있던 일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현재 시간으로 며칠이 지났지만, 과거의 기준으로 한참 지나간 것이었지.

루퍼스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집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고 했어. 그때 다나가 자신의 방에 나타난 거야. 다나가 루퍼스의 방화를 막을 수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법칙이 있었어. 루퍼스가 위험에 빠지게 되면 다나가 과거로 소환 되는 거야. 그리고 다나는 루퍼스를 위험에서 구출해 주고

그런데 다나는 루퍼스가 자신의 조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돼. 백인이었던 루퍼스는 나중에 커서 흑인 여자인 앨리스 사이에서 아이를 낳게 되거든. 그 아이가 다나의 조상이었던 거야. 그 사실을 루퍼스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어. 다나가 루퍼스의 시대로 오는 법칙은 대충 알게 되었지만, 다시 돌아가는 방법은 아직 몰랐어. 다나는 현재로 돌아오기 전까지 잘 살아남아야 하는데, 흑인 여자가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에서 살기 쉽지 않았단다. 루퍼스의 아버지한테 발각이 되어 쫓겨 다니다가 현재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그리고 짐작할 수 있었어. 다나 자신의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되면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1815년에 며칠을 머물다가 왔는데, 1976년의 시간은 단지 몇 분이 흐른 것에 불과했단다.


2.

다시 돌아온 다나. 다음에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을 대비해서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겼어. 그리도 다시 사라질 징조가 보였고, 그 옆에 있던 케빈은 다나를 껴안자 이번에는 둘이 모두 과거로 가버렸단다. 케빈은 백인이므로 그 시대에도 살아가는데 크게 문제되지 않았단다. 하지만 흑인이었던 다나는 그럴 수 없었단다. 다나는 케빈의 노예인 척 하면서 루퍼스 집에 머물렀단다. 다나의 비밀을 알고 있던 루퍼스에게는 더 많은 진실을 알려주었어. 루퍼스도 다나에게 잘 대해주었고 말이야. 그런데, 케빈과 같이 오긴 했지만 1976년 현재로 돌아갈 때도 같이 있을까? 다나가 죽을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와야 현재로 돌아오는데, 그때 케빈이 옆에 있으라는 보장도 없잖아.

다나는 루퍼스의 집에 머물면서 몰래 다른 흑인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곤 했는데, 어느날 그걸 루퍼스의 아버지한테 걸려서 그만 벌을 받게 되었어. 엄청난 채찍질을 당하다가 다나는 1976년 현재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걱정한 대로 케빈은 오지 못했어. 그거 기억나지? 현재에서 시간보다 돌아가는 과거의 시간이 빨리 갔던 것다나는 되도록 빨리 과거로 돌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케빈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게 되는 거야.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고 삶을 마감할 수도 있는 일이야.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며칠 뒤 다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갔어. 현재에서는 며칠이었지만, 다가가 도착한 과거는 이미 몇 년이 지나 있었어. 다나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은 루퍼스가 위험에 빠졌다는 것. 노예인 앨리스의 남편 아이작이 루퍼스를 심하게 구타하고 있었어. 다나가 앨리스와 아이작을 설득해서 그 폭행은 멈췄고, 그들은 떠났고 루퍼스는 심하게 다친 상태였단다. 다나는 루퍼스의 집에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루퍼스를 집으로 데리고 갔단다.

왜 그런 일이 있었냐면, 루퍼스는 흑인 노예인 앨리스를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는데, 그와 결혼을 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이었고, 앨리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싸움을 하게 된 것이었어. 루퍼스도 불쌍하긴 하구나. 그런데, 루퍼스가 마냥 착한 것은 아니야. 자신의 아버지의 무자비함도 조금은 닮아서, 루퍼스는 관대하다가도 노예들을 폭행하는 등 흉악해지기도 했어.

과거로 돌아온 다나가 찾아야 할 유일한 사람. 케빈이 한참 전에 다른 지방으로 떠났다고 했어. 케빈에게 편지를 쓰는 등 우여곡절 끝에 케빈이 다시 루퍼스의 집에 돌아왔고 다음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다행히 다나는 케빈과 함께 현재로 돌아왔단다. 그런데 현재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과거로 돌아갔고또 현재로 돌아오고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는 시간 여행은 루퍼스의 삶이 끝나서야 끝나게 되었단다. 아빠가 소설의 줄거리를 뭉텅뭉텅 잘라내고 이야기를 해서 잘 이어지지 않고, 결말도 흐릿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너희들도 좀더 커서 이 책을 읽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주렴~

….

SF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간혹 타임 슬립을 소재로 하는데, 현실에서 불가능한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 같구나. 내가 만약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너희들은 시간여행을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니? 과거? 미래?

그런데 왜 제목이 <>이지? 원제를 보니 <Kindred>로 되어 있단다. 영어를 잘 못하는 아빠는 처음 보는 단어라서 그 뜻을 찾아보았지. 혈연이라는 뜻이로구나. , 주인공 루퍼스가 다나의 조상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다나와 푸러스는 같은 핏줄로 맺어져 있었던 것이고, 다나를 과거로 강제 소환한 것도 그 핏줄로 맺어진 인연의 힘이었던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그 녀석이 죽었으니 이제는 계속 제정신으로 살 가망이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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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

중국에게는 일종의 <지정학적 공포>가 있다. 만약 중국이 티베트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언제고 인도가 나설 것이다. 인도가 티베트 고원의 통제권을 얻으면 중국의 중심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전초 기지를 확보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곧 중국의 주요 강인 황허, 양쯔, 그리고 메콩 강의 수원이 있는 티베트의 통제권을 얻는 거나 다름없다. 티베트를 <중국의 급수탑>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에 버금가는 물을 사용하지만 인구는 다섯 배나 많은 중국으로서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92)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 강을 제외하면 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왜 유럽에 상대적으로 소규모 국가들이 많은지 이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다수 강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떤 면에선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저마다 권리에 따라 경제적 영향권을 형성했다. 이런 양상은 각 하천 유역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여기서 성장한 일부 도시가 수도들이 되었다.

 

(96-97)

그리스 역시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 나라 해안은 가파른 벼랑들이 주로 차지하고 있는데다 농사를 지을 만한 연안 평야도 거의 없다. 내륙은 가파르기가 훨씬 하천들 또한 수송에 적합하지 않으며 폭이 넓고 토양이 비옥한 골짜기도 드문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고품질의 농경지가 있기나 한가? 문제는 그리스가 주요 농산물 수출국이 되기에는 그런 양질의 토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등교육을 받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 인구를 보유한 대도시들도 기껏해야 몇 개 이상은 개발하기가 어렵다. 그리스의 처지는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훨씬 약화되고 있다. 아테나 여신이 유럽과 교역이 이루어지는 땅과 단절된 반도의 끄트머리에 이 나라를 놓아둔 탓에 해상 교역로로 진출하려면 에게 해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건너편에 잠재적인 거대 적수인 터키와 몇 차례 전쟁을 치렀고 이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한 유로화를 현재까지도 어마어마하게 방위비에 쏟아 붓고 있는 실정이다.

 

(109-110)

비경제적 위기에서 독일이 보여준 가장 진지한 외교적 시도는 우크라이나 사태일 것이다. 이 당시 독일이 보여준 행동은 현재 독일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2014년에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 야누코비치를 끌어내리는 교묘한 술책에 관여한 독일은 이 사태가 있고 나서 곧장 크림 반도를 합병한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러시아로부터 공급받은 가스 파이프라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베를린 정부는 눈에 띄게 비난 강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훨씬 덜한 영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의 제재안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유럽연합과 나토를 통해 독일은 서유럽에 닻을 내릴 수 있었지만 폭풍우 심한 날에는 이 닻 또한 다른 쪽에서 내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일 정부는 필요한 경우 초점을 동쪽으로 맞추고 모스크바와 훨씬 가까워질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127)

러시아라는 개념이 성립된 시기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우크라이나인 드네프르 강 연안의 도시들과 키예프 공국으로 알려진 동슬라브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 형태가 그 기원이다. 그러나 당시 한창 제국을 확장해 나가던 몽골인들이 남부와 동부 지역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13세기 무렵이 되자 이들의 공세는 정점에 치달았다. 결국 당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러시아는 모스크바 북동쪽과 그 주변에 다시 터를 잡았다.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알려진 초기 러시아는 방어력이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산지는 물론 사막도 없고 변변한 하천도 드물었다. 사방이 허허벌판인데다 남쪽과 동쪽의 스텝 지대를 넘어서면 몽골인들의 땅이었다. 침입자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진격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게는 점령할 만한 천연 방어 진지들도 거의 없었다.

 

(137)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예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공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에라는 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 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152)

현 단계에서 핵무기는 제쳐 두고 러시아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무기라면 육군이나 공군이 아니라 바로 <가스와 석유>. 세계 최대 천연 가스 공급 국가인 미국에 이어 제2의 천연가스 생산국인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국익 증진을 위한 권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와 사이가 좋으면 좋을수록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다. 일례로 핀란드는 발트해 국가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들여온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 정책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행사하면서 유럽의 에너지 공급을 좌우하다 보니 한편에선 그 충격을 줄이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많은 유럽 국가들은 보다 덜 공격적인 나라들에 대체 송유관을 연결하는 것뿐 아니라 선박 운송을 위한 항구를 짓는 등 러시아에 대한 가스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

 

(174)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원이며 대외정책 또한 이를 지향한다. , , 3면은 바다에 면해 있고 천연자원도 부족한 이 나라는 지난 30여 년간 대한민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동해와 동중국해로 진출할 현대식 해군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에너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그 지역 전체 해상 교통로의 정세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종의 양다리 전략을 구사해서 러시아와 중국과도 잘 지내려고 공을 들인다. 이는 그만큼 평양 전권의 짜증을 돋우는 일이다.

 

(222)

사실 세계는 아프리카의 지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다. 아프리카가 얼마나 큰 대륙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는 우리 대부분이 메르카토르(Mercator) 방식의 지도를 쓰는 데서 비롯됐다. 이 도법은 평평한 면에 지구를 그리다 보니 고위로 갈수록 면적과 형상이 왜곡된다. 따라서 실제로 아프리카는 일반적으로 지도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길다. 이는 희망봉을 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또 교역에서 수에즈 운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희망봉을 도는 일은 기념비적인 업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자 서유럽에서 인도까지의 해상 여행은 9,656킬로미터로 단축되었다.

 

(243)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지구상에서 중국인들이 안 가는 곳은 없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대륙 구석구석에 개입하고 있다. 중국은 원유의 약 3분의 1(여기서 발견되는 귀금속도)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데 이는 곧 중국인들이 일단 아프리카에 들어와서 터를 잡은 이상 쉽게 나가지 않을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유럽과 미국의 석유 회사들과 다국적 기업들이 훨씬 많이 개입하고 있지만 중국이 따라잡을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라이베리아에서는 철광석을 찾아 나서고, 콩고민주공화국도 캐가고 잠비아에서는 구리를 캐고, 역시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코발트도 캐가고 있다. 또한 중국은 케냐의 몸바사 항만 개발 사업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케냐의 석유 자산을 겨냥한 보다 원대한 계획에도 손을 댔는데 이 사업은 상업적으로 가시화돼 가고 있다.

 

(348-349)

얼음이 녹고 툰드라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단 빙원(지표의 전면이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는 극지방의 벌판)의 노화가 가속화된다. 눈과 얼음 위에 흡착되는 산업 폐기물들 때문에 태양이 복사하는 빛에너지를 반사하는 영역이 줄어든다. 얼음이  녹아 드러난 땅과 개수면은 얼음과 눈이 막아주던 열을 더 많이 흡수할 것이고 이는 연쇄적으로 얼음이 없는 땅의 면적이 늘어나게 한다. 이 현상이 이른바 <알베도 효과(Albedo effect)>라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있다. 따뜻해진 툰드라 지역에서는 당연히 많은 식물이 자랄 것이고 농작물 생산도 활발해져 그 지역 주민들이 새로운 식량원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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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의 생존법 문학동네 청소년 66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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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책은 너희들 읽어보라고 한 책인데, 제목을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빠도 한번 읽어봤단다. 너희들이 재미있게 본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를 쓴 황영미 작가의 소설로 <모범생의 생존법>이라는 책이란다. 모범생이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생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방법이 필요한가? 아무튼 재미있는 제목이더구나. 그렇다고 이 책에서 모범생에 대한 생존법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고, 소설을 읽으면서 그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 모양이네, 이러면서 읽어나갔거든

그런데 읽다 보니, 각 장의 제목들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단다. 소설의 각 장의 제목들이 바로 모범생의 생존법이로구나, 하고 말이야. 지은이는 그런 의도로 각 장의 제목을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1. 이름이 불려도 당황하지 않기

2. 강풍을 대비하기

3. 빌런의 등장에 흔들리지 않기

4. 떡볶이는 먹고 가기

5. 골고루 망쳤을 땐 일단 한숨 자기

6. 도저히 안 될 땐 과감히 투항하기

7. 패배에 대한 맷집을 기르기

8. 내 앞에 놓인 일들을 그냥 하기

9. 메뉴가 별로인 날은 건너뛰기

10. 기운 없는 친구에겐 죽을 건네기

11. 밖으로 끄집어내기

12. 드넓은 바다를 상상하기

13. 고양이인가 싶을 때 다시 보기

그런데 이것들은 모범생뿐만 아니라, 너희 같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아빠 같은 어른들도 해보면 좋을 것 같은 항목인 것 같구나. 특히 패배에 대한 맷집을 기른다거나, 골고루 망쳤을 땐 일단 한숨 자라든가 말이야.


1.

소설은 고등학교 1학년생 방준호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는 고등학생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어. 방준호의 아버지는 의사이지만 돈보다 봉사활동에 진심이신 분이었어. 그런데 얼마 전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으시고 시골로 요양을 가셨고, 아버지를 간호해주시기 위해 엄마도 같이 가셨어. 그래서 방준호는 삼촌과 함께 살고 있었어.

방준호는 이번에 두성 고등학교에 들어간 고등학교 1학년생인데,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이자 모범생이었단다. 하지만 준호 자신은 자신이 운이 좋아서 수석을 했다고 생각했어. 두성 고등학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정독실 혜택을 주었는데, 아이들의 경쟁을 부추기는 그런 제도였단다. 시험 성적이 좋지 못 하면 정독실에서 쫓겨나기도 하니까 말이야. 운으로 수석이 되었다고 생각한 방준호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정독실에서 쫓겨날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 가졌어. 하지만 그것으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단다. 학생들의 성적과 고등학교의 성과를 내기 위한 정독실 제도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씁쓸하구나.

방준호는 절친 건우와 함께 코어라는 토론 동아리에 가입을 했단다. 그 동아리에서는 방준호, 건우, 유빈, 보나 선배 이렇게 친하게 되어 어울려 지냈어. 같이 지내다 보니 준호는 유빈에게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게 되었는데, 유빈은 일반 학교가 아닌 자신의 적성을 살릴 수 있는 특성화고로 전학 갈 예정이었단다. 보나 선배는 토론도 잘하고 공부도 늘 1등을 하는 모범생으로 나오는데, 재벌 집안의 딸로 부모와 잦은 갈등을 겪는 그런 캐릭터였단다.

그리고 방준호에게는 라이벌이 한 명 있었어. 민병서. 정확히 이야기하면 민병서만 방준호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 준호와 병서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엄청 친한 사이였는데, 중학교 이후에 멀어졌고, 지금은 사이도 안 좋은 상태였어. 병서의 아버지는 아빠이고, 병서의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캐나다로 갔단다. 그러니까 병서도 그리 행복한 가정은 아니었어. 병서는 준호를 라이벌로 경쟁 상대로 생각하면서도 다시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단다.

하림이라는 아이도 있어. 하림은 아이들 연습생을 했다가 그만둔 이력이 있는데, 일등만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래서인지 준호에게 처음 접근했다가 나중에는 병서와 사귀기도 했지. 대충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를 다 했단다. 주인공 준호와 친구들 사이에 에피소드들, 보통 고등학교 학생들이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더구나. 등장인물들이 고등학생들이라서 너희들이 공감을 좀 못할 수 있지만, 친구들의 우정을 다룬 소설이라는 면에서는 공감을 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어. 한 번 읽어보렴.. 요즘 푹 빠져 있는 <암호클럽> 시리즈를 마치면 말이야 ㅎㅎ


PS:

책의 첫 문장: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책의 끝 문장: 러울이 목격담을 들려주고 싶은 또 한 사람을 향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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