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그가 문득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바람은 말로 꺼내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져서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조차 없었다. 가령 어느 날 그는 귀중한 판화 작품집을 훑어보며 램브란트 판화에 경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미 그 판화 복사본이 그의 책상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또한 친구에게 어떤 책을 추천받았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기만 해도, 며칠 뒤 그 책이 책장이 꽂혀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방이 마음에 들며 편안해졌다.

 

(42-43)

그는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의 내부에 있는 치밀한 열정의 그물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색이 바래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으려면 땅의 영양분은 물론, 하늘의 새로운 빛이 늘 필요하다. 식물이나 모든 구성물이 그렇듯, 우리가 꾸는 꿈도 마찬가지이다. 얼핏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조차도 모종의 감각적 양분의 필요하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감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연의 특징과 광채도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50-51)

그러나 그날 밤, 낯선 호텔 방에 홀로 있게 된 그는 가슴속 심장이 옆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보다 더 격렬하게 뛰는 바람에 전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러고는 다시 끄고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입술만 떠올랐다. 그 입술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친밀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 이렇게 느긋하게 담소만 나누는 것은 거짓이라는 걸.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그는 예민함과 산만함, 불안과 열정으로 혼란스러운 얼굴 위에 우정이라는 가면이 가식적으로 씌워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71)

둘은 말없이 언덕길을 올라갔다. 벌써 그들 아래 보이는 집들이 희미한 빛 속에 잠겨버렸고, 황혼의 빛을 받아 가물거리는 계곡의 출렁이는 강물은 둥글게 휘어져 흐르며 점점 더 밝아졌다. 그러는 사이 언덕 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두 사람 머리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림자만이 말없이 그들을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가로등이 그들을 비스듬히 비출 때면 언제나 앞서가던 그림자는 마치 서로 포옹이라도 하듯이 합쳐졌다. 길어진 그림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하나로 합쳐졌다가 떨어지고는 또다시 포옹하려 했다. 한편 그 옆에 선 그녀는 힘없이 긴 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74)

저 그림자는 길 위에 늘어뜨린 그들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그들만의 고유한 말을 다루면서 그 이상의 뭔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그 인식의 두렵고 참된 뜻을 깨달았다. 시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과거를 찾아 헤매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던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87-88)

이 말에 나는 상당히 불쾌해졌다. 게다가 독일인 부인도 남자들의 주장을 거들었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여자다운 여자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춘부들이 있을 수 있는데, 자기가 볼 때 앙리에트 부인은 분명히 후자의 부류에 속할 것이라며 나를 훈계하려 들었다. 이런 식의 아전인수 격 발언에 나의 인내심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나는 즉시 공격적인 태도로 반격에 나섰다. 나는 여러분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여자가 한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의 의지나 지식과는 상관없이 신비로운 힘에 사로잡히기도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런 여자는 자신의 본능, 인간의 천성에 내재한 악마적 요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쉽게 유혹당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강하고 도덕적이며 순결하다고 느끼면서 만족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질끈 감고 남편을 속이는 그런 여자보다는 열정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여자가 더 정직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90)

나는 그녀의 명료하고 쾌활한 말투에 매우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사무적인 어조를 따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국가의 사법기관은 이 사태를 저보다는 당연히 더 엄격하게 결정하지요. 사법기관은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따라서 용서하는 대신에 판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는 것이 제 마음에 더 들기 때문입니다.”

 

(140-141)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은 법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요. 그들은 당황해하며 침묵하거나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이런 감정을 숨기려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조작가와도 같은 신은 감정의 모든 동작을 감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조형적으로 빚어냈나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사람의 감사함의 표현은 마치 열정적인 몸짓처럼 육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환한 빛을 냈습니다. 그는 제 손등 위로 고개를 속였습니다. 그러더니 소년처럼 갸름한 머리를 겸손하게 낮춘 후, 거의 1분 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제 손가락에 정중히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제 안부를 묻고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147)

폭풍우가 요란하게 퍼붓는 사나운 밤이 지난 후 이런 감동적인 날이 밝아왔습니다. 깨끗하게 씻긴 거리와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초록 덤불이 횃불처럼 붉은 꽃송이를 빨갛게 피워내고, 햇살에 습기가 날아가 가벼워진 대기 속에서 먼 곳의 산들이 갑자기 우리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산들이 깨끗이 씻겨 반짝이는 도시를 향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둘러보는 곳곳마다 자연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며 다가와서는, 슬며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저는 그에게 마차를 타고 코르니시 해변을 달려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172)

한순간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고통으로 인해 저는 벤치로 몸을 던졌습니다. 벤치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멍하니 있자니 죽음에 대한 예감에 사로잡혀 오히려 황홀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금 말했듯이 고통은 비굴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은 삶을 향한 요구는 우리의 정신에 내재한 죽음의 열망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육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감정이 부서져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벤치에서 일어섰습니다. 물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174-175)

하지만 결국 시간은 심오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나이는 모든 감정의 골을 희석하는 특이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면, 그 그림자가 길 위에 어둡게 드리울 때면 사물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힘을 잃고, 더는 우리에게 내적인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물들은 그것은 지닌 위험천만한 위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됩니다. 저는 천천히 그 충격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175)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모임에서 저는 오스트리아 공사관의 주재원인 폴란드 청년을 만나게 되어 그의 가족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자기 친척의 아들인 한 남자가 10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거의 고통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기주의가 작용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직한 기억 외에 제게 불리한 증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늙어간다는 과거에 대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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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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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인터넷 서점에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알게 된 책 이서희 님의 <방구석 판소리>란 책을 이야기해줄게. 아빠가 음악에 관련된 교양서적을 가끔씩 읽는 편인데, 주로 교향곡, 오페라, 서양의 음악가를 다른 책들 인 것 같았어.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래, 우리나라에도 고전 음악들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판소리에 관한 책이라니아빠는 처음 보는 것 같고, 물론 판소리에 관한 책도 처음이었단다. 그래서 기대를 가득 안고 책을 펼쳤단다. 판소리에 대한 역사와 판소리의 이론적인 내용을 예와 함께 쉽게 설명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이 책은 아빠의 예상과 다른 성격의 책이었단다. 판소리의 이론에 대해서는 앞부분에 판소리 용어 해설이라는 코너로 짧게 마치고, 판소리 작품에 초점을 맞추었단다. 읽다 보니 판소리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판소리의 원작인 고대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 주는 책 같았어. 물론 우리나라 판소리 다섯 마당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헛갈려 하는 아빠에게 판소리 다섯 마당은 <심청가>, <흥부가>,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라고 명확히 알려주기도 했지만, 굳이 심청가, 흥부가, 춘향가의 줄거리와 심첨가의 주제가 효와 유교정신이라는 것을 알려주기까지야아무튼 책의 방향은 아빠가 생각했던 내용과 좀 달라서 실망스러웠단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판소리는 이런 것이다, 라고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별로 없구나.

 

1.

Part1 에서는 판소리 다섯 마당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각 판소리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었고, 간간이 각 판소리 마당의 특징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런 부분들을 이야기해줄게. <심청가>는 네 시간짜리 판소리로, 슬픈 대목이 많아 계면조의 소리가 많다고 하는구나. <흥보가>는 당시 고통 속에 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을 노래하여 정의나 부조리를 청산하자는 사회비판의 담겨 있다고 했어. <춘향가>는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사회적 계급, 권력 문제, 불평등 등 부조리를 노래하여 더욱 인기가 좋았다. 소설 <춘향전>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구나. <수궁가>는 판소리 마당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작품이 까다롭고 통성과 우조를 사용하고 다양한 기교가 들어가 있다고 했어. <적벽가> 19세기에 양반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군사들의 목소리가 많이 담겨 있다고 하는구나.

..

Part2에서는 잃어버린 조선의 아리아들을 소개해 주었어. 네 개의 타령을 이야기해주었는데,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고 하여 안타깝더구나.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옹고집 타령>, <장끼 타령>, <변강쇠 타령>, <숙영낭자전>은 아빠가 줄거리를 잘 몰라서, 타령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 줄거리를 읽는 재미가 있었단다. 이 책에서 요약해준 것이 아닌 원작 전체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숙영낭자전>은 아빠가 예전에 사 두었는데, 아직 읽지 못했구나.

Part 3, Part 4, Part 5는 판소리와 좀 무관한 이야기란다. 우리나라 고전 음악이라고 퉁치면, Part 3 삼국시대의 향가, Part 4고전 시가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뜬금없이 Part 5에서는 고전 소설을 소개해주고 있단다. <이생규장전>, <옥단춘전>, <금방울전>, <정수정전>을 소개해주었는데, 아빠 생각에는 페이지 채우려고 포함시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구나. 짧게 영화 소개해주는 콘텐츠처럼 Part 5는 우리나라 고전 소설을 소개해주는 것 이상은 없었단다. Part 3은 향가들을 소개해주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향가들이 많지 않아서 이 책에 소개해준 향가들은 예전에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 배운 향가들이 대부분이구나. 그리 새로운 향가는 없었어. Part 4에서는 고전시가인데,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시를 소개해 주었단다. 이 또한 엄격히 이야기하면 판소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판소리에 대해 알고 싶었던 아빠로서는 조금 실망한 책이 되었단다. 오늘은 그래서 짧게 마칠게. 이상.

 

PS,

책의 첫 문장: 한 발만 더 내디디면 허공입니다.

책의 끝 문장: 정수정의 기개와 용기, 담대함과 능력을 읽고 계속 상기하다 보면 자신에게도 어느 순간 그 단단함이 깃들 수도 있으니까요.


용왕의 병은 다름 아닌 술병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봉건국가의 무능한 왕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를 두고 대립하는 별주부와 토끼는 왕을 옹호하거나 왕을 비판하는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교 사회의 규범 중 하나인 ‘충’을 드러내는 별주부와 임금을 조롱하는 토끼 중,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마 토끼에게 더 마음이 끌릴 것입니다. 별주부가 임금의 무능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의 노력이 부족함을 스스로 한탄하는 모습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별주부가 답답하거나 미련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지금 시대에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지혜로 스스로를 지키는 토끼 같은 인물에 더 쉽게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지요. - P84

<도솔가>에서 월명사가 부르는 노래는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노래는 인간의 고통과 해탈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요소를 포함합니다. 도솔천은 신적인 존재가 사는 곳으로, 이 노래를 통해 인간은 신과 소통하려 하며, 구원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신라시대는 불교가 널리 퍼져 있던 시기였으며, 사람들은 인생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불교적 구원을 열망했지요. <도솔가>의 가사는 불교적 해탈의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노래는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신성한 존재의 자비와 구원을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죠.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신과의 소통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 노래는 당시 신라 사람들에게 종교적 소망의 길을 제시한 중요한 철학적 의미였을 것입니다. - P180

<원가>에서 잣나무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집니다. 잣나무는 변하지 않는, 견고한 존재로 나타나며, 왕과 신하 간의 굳은 약속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효성왕이 신충을 잊고 뜻하지 않게 배신한 것은, 잣나무가 말라죽어간다는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약속의 무효화와 신하의 원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잣나무가 변치 않은 푸르름을 유지하는 것처럼, 왕도 신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이어가야 한다는 교훈을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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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8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변강쇠타령 너무 궁금해가지고 진짜 힘들게 구해서 변강쇠전 읽으려고 했거든요. 아 그런데 진짜 극기의 인내심이 아니면 불가능했어요. 무슨 장면하나에 비유를 몇십개씩 해놨는데 실감이 나는게 아니라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다가 장면들이 다 날아가는.... 그리고 한자말 너무 많아서 진짜 어렵더라구요. 전 어릴 때 TV에서 창극 많이 보고 큰 세대인데도 판소리는 내용을 따라가는 것도 어려워요.

bookholic 2025-09-20 00:4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변강쇠전이라고 하면 야한 생각부터 떠오르는데, 장벽이 높은 작품이었군요..^^
 
목로주점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4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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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2권의 이야기를 해줄게. 1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목로주점>19세기 프랑스 하층민들의 삶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찬반 논란까지 일었던 작품이라고 했잖니. 그래도 주인공 제르베즈가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집도 장만하고 자신만의 세탁소도 장만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하면서 1권이 마무리되었단다. 그리고 2권에서는 제르베즈의 하나 남은 퍼즐인 사랑이 완성되길 바라면서 책을 펼쳤단다.

제르베즈의 생일 잔치 이후 쿠포는 랑티에와 아주 친한 술친구가 되었단다. 그래서 랑티에는 자주 제르베즈의 집에 찾아왔단다. 쿠포라는 사람은 1권에서 지붕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몸만 다친 것이 아니라 머리도 크게 다친 것 같구나. 그 이전에는 성실해 보이고 제르베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빌런이 따로 없구나. 랑티에가 누구니.. 제르베즈의 전 남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으나, 다른 여자랑 도망 간 사람이잖니. 결혼만 안 했지, 오랫동안 같이 살고 아이들도 낳았는데 말이야. 그런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 말이 되니. 제르베즈가 얼마나 불편한 상황이겠니.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랑티에는 특유의 사교력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서 마을 사람들도 랑티에를 대부분 좋아했단다. 랑티에는 이 마을로 이사 오고 싶다는 하자, 쿠포의 자신의 집으로 이사오라고 했어. 방 하나를 비워줄 수 있다면서 말이야. 제르베즈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쿠포는 결정하고 랑티에는 쿠포와 제르베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단다. 이제 쿠포와 랑티에는 집에서 술을 자주 먹고, 쿠포는 종종 만취하여 정신을 잃었단다. 그 때가 기회다 싶어 랑티에는 제르베즈에게 계속 수작을 부렸고, 결국 그들은 선을 넘어서고 말았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르베즈가 끝내 랑티에를 거부하기를 바랬지만, 결국 아빠의 바램과는 반대로 되었단다.

처음이 어렵지, 그 이후 랑티에는 계속 제르베즈에게 접근했어. 마을에는 당연히 안 좋은 소문이 났지. 그런데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놓은 랑티에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제르베즈의 탓으로 돌렸단다. 일이 그렇게 되자 제르베즈는 자신을 짝사랑하고 거금까지 빌려준 구제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었어.

 

1.

문을 열고 난 이후 계속 수입이 늘어나기만 하던 세탁소도 점점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단다. 세탁의 질도 떨어져서 단골도 줄어들었어. 그러다 보니 빚은 다시 늘어나고, 집안의 가구나 물건들을 전당포에 맡기는 신세가 되었단다. 결국 더 이상 세탁소를 유지하기 어려워져 집까지 내놓게 되었단다. 그것을 비르지니와 푸아송 부부가 산다고 했단다. 비르지니가 누구니. 1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은 친한 척하며 지내지만 먼 옛날 주먹다짐을 했던 사이잖니비르지니에게만은 집을 내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제르베즈의 집은 결국 비르지니에게 팔리고 말았단다.

제르베즈, 쿠포, 그리고 그들의 딸 나나는 작은 공동주택으로 이사해야 했어. 아참, 제르베즈와 랑티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모두 성장하여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었단다. 이젠 세탁소도 없기 때문에 제르베즈는 다른 세탁소에서 직원으로 일해야 했어. 쿠포는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술독에 빠져 살고 있었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정신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어. 이렇게 삶이 팍팍하고 되는 일이 없다 보니, 세탁소의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결국 짤리고 말았어.

제르베즈도 우연히 술을 먹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 제르베즈도 알코올 중독 수준이 되었단다. 돈이 생기면 술을 먹었고, 술에 취했을 때만이 삶의 고통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아. 제르베즈는 오랜 시간 잘 살아보겠다고 노력했지만, 결국 둑 무너지듯, 공든 탑이 무너지듯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단다. 제르베즈는 세탁소 일도 얻지 못해 굴욕적이지만, 결국 비르지니의 집에서 청소나 설거지를 하게 되었어. 그런데 제르베즈에게 그렇게 수작을 부렸던 랑티에가 이제는 비르시니의 바람 상대가 되어 있었단다.

….

한편 제르베즈의 딸 나나는 어느덧 15살이 되었단다. 엄마의 미모를 물려받아 나나도 예뻤단다. 나나는 여직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나나의 외모 때문에 남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쿠포는 오히려 나나의 행실을 탓하며 나나를 때렸단다. 집에 오면 쿠포는 매일 나나를 때리고, 나중에 가서는 제르베즈도 나나를 때렸어. 결국 나나는 가출을 했단다. 이런 집구석에서 살기 어려웠을 거야. 자신의 편이 하나도 없는나나가 어떤 늙은 영감과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어. 제르베즈는 나나를 찾으러 무도장에게 갔다가 오히려 자신이 춤에 빠지게 되고, 이제 제르베즈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것인가. 제르베즈와 쿠포는 결국 나나를 찾아 집으로 데려왔지만, 그들의 폭행은 여전했어. 나나는 결국 다시 가출하고 다시 집에 끌려오고, 이런 것을 반복하는 삶이 되고 말았어.

쿠포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을 들락날락 하는 신세가 되었단다. 제르베즈도 정신병원만 안 갔지, 거의 알코올중독 수준이었어. 집의 물품들을 팔아 술을 사먹었고, 이제는 더 이상 팔 물건도 없는 거렁뱅이가 되었단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여 하루 먹을 것을 구했을 뿐이야. 그러다가 우연히 구제를 만났단다. 구제는 여전히 제르베즈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나 봐. 제르베즈를 집에 데리고 와서 먹을 것을 주었어. 제르베지는 자존심이 조금은 남아 있었나 보구나. 밥을 먹고 배가 부르자 구제에게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니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집으로 돌아왔단다. 다시 굶주림의 연속이었어. 구포는 정신병원을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고 말았단다. 그리고 몇 달 뒤 제르베즈는 집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단다.

제르베즈가 이렇게 비극적인 죽음이 이른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제르베즈 자신만의 잘못은 아닐 거야. 랑티에, 구포 등 남자를 잘못 만난 이유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 나라의 시스템에 제대로 완비되지 않아 이런 하층민들이 어려움에 빠지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지은이 에밀 졸라는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 것이 소설을 통해 널리 알려지는 것이 프랑스 정부는 싫었던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는 있는 것 같구나. 우리나라에서도 가난 때문에 죽음에 이른 사람들의 뉴스를 간간히 들을 수 있잖니, 국가의 존재의 첫 번째 이유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 아니겠니. 이제 정부도 바뀌었으니, 기대를 좀 가져보자꾸나. 그나저나 쿠포와 제르베즈가 모두 죽었으니 딸 나나는 홀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하기야 폭행만 가하는 부모는 없는 것이 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아빠가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시리즈>를 두어 작품 더 사두었는데, 그 중에 <나나>라는 작품이 있단다. 조만간에 <나나>를 읽어봐야겠구나. 제르베즈의 불쌍한 딸 나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부디, 나나라도 해피엔딩이 되길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그 후 첫번째 토요일, 저녁식사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던 쿠포는 열시경 랑티에를 데리고 나타났다.

책의 끝 문장: 이제 편히 잘들라고, 어여쁜 부인!

  


"비자르가 부인을 발로 차서 죽인 거라고요." 제르베르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부인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거든요. 배 속 어딘가에 탈이 난 게 분명해요. 맙소사! 부인은 사흘 동안이나 몸을 뒤틀면서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어요…… 아! 아마 노예선에 보내진 불한당들도 그 남자만큼 악한 짓을 하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남편한테 맞아 죽는 여자들을 일일이 신경 쓰다보면 법이 할 일이 너무 많아지겠죠. 매일같이 맞고 사는 여자들한테는 한 대 더 맞고 덜 맞는 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안 그래요? 그런데도 그 불쌍한 여자는 자기 남편이 참수형이라도 당할까봐 거짓말을 하더라구요. 글쎄, 물통 위해서 떨어져서 배를 다친 거라면서…… 그러고는 밤새 비명을 지르다가 죽었어요." - P38

당연하게도 나태와 빈곤함이 자리 잡은 곳에는 불결함이 따라왔다. 과거에 제르베즈의 자존심이었던 하늘을 연상시키는 근사한 파란색 가게는 이젠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창들과 판유리는 거리를 달리는 마차에서 튄 오물로 온통 뒤덮였다. 진열창 선반에 매달아놓은 놋쇠봉에는 병원에서 죽은 여자 고객들이 미처 찾아가지 못한 회색빛 누더기 옷 세 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천장에서 말리는 축축한 세탁물들의 습기 탓에 벽에서 떨어져 나간 퐁파두르 스타일의 사라사 벽지는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거미줄처럼 너덜거렸다. 수없이 반복된 부지깽이질로 인해 구멍이 뚫리고 부서진 난로는 고물상에 쌓인 낡은 무쇠 조각처럼 보였다 - P87

다시 시트로 랄리를 덮어준 제르베즈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아이는 점점 더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랄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예전에 검은 눈빛뿐이었다. 어린 소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으로 그림을 자르고 있는 자신의 두 아이를 응시했다. 방 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망연자실한 비자르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아니, 이럴 수는 없다. 이건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아! 이렇게 엿 같은 인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제르베즈는 비자르의 집을 뛰쳐나와 정신없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삶에 깊은 회의가 느껴져 아무 승합마차에나 뛰어들어 그대로 바퀴에 깔려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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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프릴다 칼로는 다다이즘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927년이라면 새로운 미술 사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때였고, 장래에 화가가 되기로 한 프리다 칼로는 그런 것들을 유심히 보고 따라 하려 했죠. 그중 하나가 이 실험 작품(미구엘 리라의 초상)입니다.

먼저 다다이즘이 무엇인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다이즘은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미술 사조입니다. 설명을 확실히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다다이즘이 아닙니다. 알쏭달쏭하시죠? 다다이스트들이 한 말을 보시죠.

우리가 다다라고 부르는 것은 공허에서 비롯된 엉뚱한 짓거리다.” – 후고 발

다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 리하르트 웰젠베크

                     

(45)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순간과 사람이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 역시 그랬습니다. 그녀의 경우는 좀 독특합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그 순간을 함께했던 유일한 사람이 그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프리다 칼로 하면 떠오르는 그 사고의 순간에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던 그 사고에서 프리다 칼로를 처음 목격한 의사는 그녀의 치명적인 부상을 보고 그녀를 포기하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말렸던 사람도 그 사람입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입니다.


(102)

프리다 칼로는 평생 엄청난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남자든 여자든 육체적 관계를 통해 고통을 위로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더 많은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119-120)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상상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사랑도 그 이상이었고요. 그것은 둘의 행동이나 편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 편력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이런 생각까지 한 것입니다. 자신과 디에고 리베라를 아예 반씩 잘라 붙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죠. 한순간도 떨어지지 못하게 말입니다.


(126-127)

이런 모든 상황에도 프리다 칼로는 남편을 비하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묵묵히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디에고 리베라. 시작

           디에고 리베라. 창조자

           디에고 리베라. 내 아이

           디에고 리베라. 내 남자 친구

           디에고 리베라. 화가

           디에고 리베라. 내 연인

           디에고 리베라. 내 남편

           디에고 리베라. 내 친구

           디에고 리베라. 내 어머니

           디에고 리베라. 내 아들

           디에고 리베라.

           디에고 리베라. 우주

           통합의 다양성

           왜 나는 그를 디에고 리베라라고 부르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자신의 것이다.


(204-205)

트로츠키가 일반인이었다면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던 연인의 작품을 걸어놓을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국민 영웅이며,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소련 공산주의 혁명의 3대 거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걸어놓는다면 비난할 사람이 없었죠. 추종자들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프리다 칼로가 이 그림을 준 것은 어쩌면 그를 존경하던 디에고 리베라를 향한 보복 심리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배신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을 자신이 차버림으로써 남편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죠. 남편은 트로츠키를 대단한 혁명가로 평가했고, 그가 소련에서 축출당해 갈 곳이 없을 때 멕시코로 망명하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디에고 리베라도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부인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부인의 불륜 상대가 자신이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211)

<도르시 헤일의 자살>이 이렇게 그려진 것은 프리다 칼로 입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에게 고통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을 잊기 위해서는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 시간을 두고 희석시키는 것이죠.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프리다 칼로의 방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양편에 오해를 낳았던 이 그림은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현재는 익명으로 기증되어 피닉스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216)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색깔에 관해 쓴 적이 있습니다.

 . 녹색 : 따뜻하고 좋은 빛

 . 붉은 보라색 : 아즈텍. Tlapali(그림과 그림 그리기에 사용되는 색상을 뜻하는 아즈텍어), 붉은 선인장의 오래된 피,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살아 있는

 . 갈색 : 점의 색깔, 썩어가는 잎의 색깔, 지구

 . 노란색 : 광기, 질병, 두려움, 태양과 기쁨의 일부

 . 코발트블루 : 전기와 순수, 사랑

 . 검은색 : 없다, 정말로 없다

 . 잎의 녹색 : 나뭇잎, 슬픔, 과학, 독일 전체가 이 색깔이다

 . 연두색 : 더 많은 광기와 미스터리, 모든 유령들은 이 색상의 옷을 입는다. 최소한 속옷이라도

 . 다크그린 : 나쁜 소식과 좋은 사업의 색깔

 . 네이비블루 : 거리감, 부드러움도 이 파란색일 수 있다

 . 마젠타 : ? 글쎄, 누가 알겠어!


(281)

조금 아프다고 해서 수술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받는 것이죠. 또 한 번의 수술로 모든 증상이 해결된다면 다시 받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받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프리다 칼로는 사고 이후 32번 이상 수술을 받았습니다. 39살이 되던 1945년에도 프리다 칼로는 또 한 차례 척추 수술을 받게 됩니다. ‘혹시나 좋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물론 잘못 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위험도 있었지만, 이전 수술 이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고, 아직은 젊으니 기대를 해본 것이죠.


(302)

1944년 프리다 칼로는 한 평론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는 어린 시절 사고 당시 몸에 흐르던 피를 보았던 생생한 기억이고, 또 하나는 탄생, 죽음, 그리고 생명을 이끄는 끈에 관한 나름의 생각이다. 마지막 한 가지는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이다.”


(345)

죽기 얼마 전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난 건강하게 잘 탈출했다.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절대 어기지 않을 생각이다. 디에고 리베라에게 감사하고, 나의 테레에게 감사하고, 그라시 엘리타, 그리고 딸에게 감사하고, 주디스에게 감사하고, 이사우아 미노에게 감사하고, 루피타 주니에게 감사하고, 파릴 박사와 폴로 박사와 아르만도 나바로 박사와 바르가스 박사에게 감사한다. 나 자신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삶을 지탱하려는 나의 엄청난 의지에도 감사한다.

기쁨, 인생 만세. 디에고 리베라 만세. 테레 만세. 나의 주디스 그리고 내게 놀라우리만치 잘해주었던 모든 간호사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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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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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작년에 처음으로 알게 된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시리즈. 그 시리즈는 총 20작품인데, 작년에 <패주>를 읽고 나서 아빠가 가끔씩 루공 마카르 총서 시리즈를 읽겠다고 했잖니. 그래서 두 번째로 집어 든 작품이 아빠의 기준에서 에밀 졸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목로 주점>이란다. <목로 주점>은 루공 마카르 총서 시리즈의 순서대로는 일곱 번째에 해당한단다. 이 시리즈는 주인공 간에 연결이 되어 있지만, 각 작품이 독립적인 작품이라서 순서 없이 읽어도 상관은 없단다. 하지만 그래도 아빠의 성격상 순서대로 읽으면 좋은데, 우리나라에는 루공 마카르 총서 시리즈가 모두 번역되어 있지도 않고, 출판사도 여러 출판서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을 듯 하구나. <목로 주점>은 에밀 졸라의 대표작답게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이 되었는데, 아빠는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책으로 읽었단다.

두 권으로 출간되었으며, 오늘은 <목로 주점> 1권을 이야기해줄게. 이 작품은 출간 당시 프랑스 파리의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너무 적나라하게 그렸다고 해서 찬반양론에 휩싸이기도 했다는구나. 오늘날 읽어도 당시 파리의 하층민의 삶을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하고, 파리의 모습, 결코 깨끗하지 않은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자신들의 민낯이 그대로 그려진 소설이다 보니, 이 책의 출간을 반대했을 만도 하구나. 우리는 덕분에 당시의 파리의 시대상을 알 수 있구나. 물론 재미는 당연하고 말이야. 그럼, 1권의 이야기를 해보자..

 

1.

때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을 하던 시기였단다.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이었지.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을 즉위한 것이 1848년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로 즉위한 것이 1852년이니까, 그 사이가 이 소설의 시작 지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구나. 주인공 제르베르는 22살의 여자로, 절름발이 장애를 가지고 있고, 벌써 아이가 두 명이나 있단다. 그것도 여덟 살이나 된 클로드, 그리고 네 살인 에티엔이다. 그러니까 열 네 살 때 임신을 하게 된 거야. 아이들의 아빠는 스물여섯 살인 랑티에라는 남자인데, 둘은 결혼하지는 않았단다. 제르베르의 아빠인 마카르가 결혼을 결사 반대했기 때문이래. 이 사연의 자세한 내용은 루공 마카르 총서 1 <루공가의 행운>에 실려 있다고 하는구나.

랑티에는 그리 책임감 있는 남자는 아니야. 일자리를 찾느라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고 집안 일은 거의 신경을 쓰지도 않아. 어느날 랑티에는 제르베르와 함께 산 이후 처음으로 외박까지 했어. 제르베르는 랑티에를 기다리다 밤새 걱정을 했지만, 아침 여덟 시 넘어 귀가한 랑티에를 보고는 화가 나서 큰소리를 치고 부부싸움을 대판 했단다. 그리고 빨래를 하려고 세탁장에 갔어. 그런데 빨래를 하던 중 아이들이 찾아와서 아빠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고 하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세탁장에 있던 베르지니라는 여자가 말하길, 랑티에가 자신의 여동생 아델과 함께 도망을 갔다는 거야. 그러면서 제르베르를 조롱하고 욕을 했어. 제르베르도 참을 수 없어 둘은 말싸움 끝에 몸싸움을 했단다. 옷이 찢어지고 피나고 몽둥이까지 휘두르는 사태로 번졌지만 다른 여인네들도 그저 구경을 말뿐이었단다. 삶이 지루한 그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나 싶구나. 제르베르와 베르지니가 지치고 나서야 싸움을 말렸단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제르베르. 랑티에가 남아 있는 돈까지 다 가지고 가서 제르베르는 빈털터리가 되었단다.

함석공 쿠포는 제르베르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랑티에가 도망가서 제르베르가 혼자가 되자 계속 구애를 했어. 랑티에가 도망간 이후 제르베르는 더 이상 남자와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고, 애 둘 있는 여자가 무슨 결혼을 하냐면서 쿠포의 구애를 계속 거절했단다.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던가. 그리고 제르베르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쿠포의 경제력에게 마음이 흔들렸어. 결국 제르베르는 쿠포의 계속된 구애를 받아들였지. 쿠포의 누나들은 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특히 둘째 누나 로리외는 제르베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구포는 제대로 된 결혼식을 하겠다고 돈까지 밀리고 손님들을 초대했어. 하객들은 다들 비슷비슷한 처지의 하층민들이었단다. 결혼식에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아서, 비도 많이 왔어. 피로연은 저녁 시간인데 그 때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 있고, 비도 많이 오고 해서 그들은 누군가의 제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가기로 했단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어 피로연 하기로 예약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시끌벅적하고 난리통도 그런 난리통이 없었단다. 서로 언쟁도 심하게 하고 나중에는 식사값 가지고 식당 주인과 시비도 붙었어. 어찌됐든 잊지 못할 결혼식이로구나.

 

2.

4년이 흘렀어. 그 동안 빚을 갚느라 고생했지만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단다. 그리고 딸 아이도 하나 낳았는데 이름은 나나라고 했어. 아빠가 루공 마카르 총서 몇 권을 더 구매를 해 두었는데 그 중에 제목이 <나나>라는 책도 있었단다. <나나>의 주인공이 바로 제르베르와 쿠포의 딸이겠구나. 그 책도 나중에 읽게 되면 이야기해줄게. 나나를 낳고 또 3년이 흘렀어. 그 시절도 시간이 잘도 가는가 보구나. 제르베르와 쿠포는 그동안 아껴 모은 돈으로 그 동안 꿈꾸었던 세탁소 딸린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단다. 제르베르도 그 동안 다른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이제 자신 소유의 세탁소가 생긴 것이란다. , 얼마나 기뻤을까.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쿠포가 지붕 위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떨어지는 사고가 났단다.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어. 한 동안 어쩌면 영원히 함석공 일을 다시는 못할 수도 있었어. 그리고 이 사건으로 세탁소를 계약하기 어려워졌단다. 하지만 제르베르는 정성껏 쿠포를 간호했단다. 쿠포는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만큼 성격이 횡폭 해져갔어. 신경질도 자주 부리고 먹지 않던 술도 먹기 시작했어. 사고의 여파일까? 원래 근성이 드러나는 걸까?

그들이 살고 있는 건물에 살고 있는 구제라는 대장장이가 있었어. 구제는 제르베르를 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단다. 제르베르가 세탁소 차리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구제는 제르베르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어. 제르베르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세탁소를 차려 빨리 돈을 갚으면 된다는 생각에 구제가 빌려주는 돈으로 세탁소 딸린 집을 결국 살 수 있었단다. 다행히 세탁소는 번창하여 조수도 두 명이나 고용했단다. 하지만 남편 쿠포의 술버릇은 점점 안 좋아지고 술주정도 점점 심해졌어. 어느날은 만취한 쿠포가 귀가하여 제르베르를 때리기도 했단다. 술이 원수인가? 남편이 원수인가?

가끔 제르베르는 대장간에 구제를 보러 가면 마음의 위안을 찾는 듯 했어. 제르베르의 아들 중에 에티엔이 구제의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어서 아들 보러 간다는 핑계로 구제를 만나러 간 거야. 구제가 자신을 짝사랑을 한다는 것을 알면, 그를 더욱 멀리해야 하겠지만, 제르베르도 자신의 삶이 힘들다 보니 위안이 필요했던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쿠포와 헤어져 구제와 살 수 있는 상황은 안되고 말이야.

어느 날 그 마을에 비르지니가 남편 포아송과 함께 이사를 왔단다. 비르지니는 오래 전에 제르베르가 세탁장에서 심하게 싸운 여자잖니.. 더욱이 비르지니의 남편 포아송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경찰이었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다행인지, 발톱을 숨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인지 제르베르와 비르지니는 옛 일은 이야기하지 않고 친하게 지냈단다. 비르지니는 제르베르의 세탁소도 자주 찾아왔단다. 그러던 어느날 비르지니는 자신의 동생과 도망을 갔던, 비르지니의 전남편이나 다름없는 랑티에의 소식을 알려주었어. 자신의 동생 아델과 대판 싸우고 헤어졌다고당연히 오래 못 갈 사이라 짐작은 했지

제르베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잔치를 하기로 했단다.  세탁소의 작업대를 정리하고 식탁으로 이용하고 식탁의 자리수인 열 네 명을 초대하려고 했어. 처음으로 하는 생일잔치이니 먹을 것도 충분히 준비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인 로리외와 화해도 했단다. 생일 잔치 당일 시간이 되어 다들 모였는데, 남편인 쿠포가 오질 않았어. 구제와 제르베르와 비르지니가 쿠포를 찾으러 나섰는데, 역시나 어떤 술집에서 술을 먹고 있는 것을 끌다시피 데리고 왔단다. 그런데 오는 길에 제르베르의 전남편이나 다름없는 랑티에를 만나 거야. 술 취한 쿠포는 랑티에와 싸울 기세였으나 잘 말려서 제르베르의 생일 잔치에 데리고 왔단다. 생일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오랜만에 배를 가득 채우고 술도 먹고 노래도 신나게 불렀단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지. 그 구경꾼들 사이에는 제르베르의 전남편이나 다름없는 랑티에도 있었단다. 그런 랑티에를 구포가 발견했어. 구포는 당장 달려가 랑티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지만, 이내 곧 친해져서 구포는 랑티에를 데리고 왔어. 그렇게 랑티에도 제르베르의 생일잔치에 합류하게 되었단다. 생각도 없고, 눈치도 없고 배려도 없는 구포와 랑티에로구나. 랑티에는 또 무슨 꿍꿍이로 그곳에 나타난 것일까. 이래나 저래나 제르베르만 불쌍하구나. 그래도 오늘은 제르베르의 생일이잖니.. 제르베르의 생일잔치는 성황리(?)에 끝이 났단다.

여기까지가 <목로주점> 1권의 이야기란다.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의 팍팍한 삶이 느껴졌단다. 그리고 주인공 제르베르를 응원하면서 읽게 되는데, 주변의 남자들이 안 도와줘서 답답하기도 했단다.

2권에서는 좀 나아질까? 희망고문은 갖지 않는 걸로조만간 2권도 이야기해줄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제르베즈는 새벽 두시까지 랑티에를 기다렸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쿠포 가족이 잔치의 후유증을 떨쳐내려는 듯 밤새도록 죽은 듯이 잠자는 사이, 열린 창문으로 몰래 들어온 이웃집 고양이가 예리한 이빨로 조심스럽게 거위의 뼈를 갉아 먹으며 결정적으로 거위를 끝장내고 있었다.


제르베르는 의자 등받이에 젖은 옷들을 걸쳐놓았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가구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너무나 큰 충격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듯했다. 그녀에게 남은 돈이라고는 세탁비로 남겨둔 4수 중 1수가 전부였다. 그사이에 마음이 진정된 에티엔과 클로드가 웃는 소리에 제르베즈는 창가로 가서 두 팔로 아이들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바로 그날 아침, 노동자들과 파리의 거대한 일터가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던 그곳에서 회색빛 도로를 바라보면서 잠시 자신을 잊고자 했다. 그 시각, 세관의 담벼락 뒤쪽 도시 위로는, 분주한 일상으로 인해 달구어진 도로에서 뜨거운 복사열이 뿜어져 나왔다. 제르베즈는 바로 저 용광로 같은 뜨거운 길바닥 사로잡혀 외곽 도로의 오른쪽 끝과 왼쪽 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의 삶은 바로 저곳, 도살장과 병원 사이의 공간에 달려 있다는 예감과 함께. - P58

인간의 육체가 쇠로 된 기계와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자 애쓸 때조차 그의 우울함은 커져만 갔다. 물론 언젠가는 기계가 노동자들을 모두 죽이고 말 터였다. 그 때문에 이미 그들의 하루 일당은 12프랑에서 9프랑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어쨌거나 소시지를 만들 듯 리벳과 볼트를 찍어내는 이 커다란 짐승들은 전혀 유쾌하지가 않았다. 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삼 분 정도 기계를 응시했다. 그러면서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 아름다운 황금빛 턱수염이 위협적으로 곤두섰다. 그러다가 온화함과 체념의 기운이 그의 표정을 점차 누그러뜨렸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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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1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에밀 졸라 작품 3개 읽었는데 목로주점만 좋았어요. 패주랑 나나는 진짜 괴로웠습니다. ㅎㅎ 그래서 남은 제르미날은 좀 쉬다가 읽으려구요.

bookholic 2025-09-13 22:19   좋아요 0 | URL
에밀 졸라 소설 읽기 전에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