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프릴다 칼로는 다다이즘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927년이라면
새로운 미술 사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때였고, 장래에 화가가 되기로 한 프리다 칼로는 그런 것들을
유심히 보고 따라 하려 했죠. 그중 하나가 이 실험 작품(미구엘
리라의 초상)입니다.
먼저 다다이즘이 무엇인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다이즘은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미술 사조입니다. 설명을 확실히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다다이즘이
아닙니다. 알쏭달쏭하시죠? 다다이스트들이 한 말을 보시죠.
“우리가 다다라고 부르는 것은 공허에서 비롯된 엉뚱한
짓거리다.” – 후고 발
“다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 리하르트
웰젠베크
(45)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순간과 사람이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 역시 그랬습니다. 그녀의 경우는 좀 독특합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그 순간을 함께했던 유일한 사람이 그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프리다 칼로 하면 떠오르는 그 사고의 순간에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던 그 사고에서 프리다 칼로를 처음 목격한 의사는 그녀의 치명적인 부상을 보고 그녀를 포기하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말렸던 사람도 그 사람입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입니다.
(102)
프리다 칼로는 평생 엄청난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남자든 여자든 육체적 관계를 통해 고통을
위로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더 많은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119-120)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상상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사랑도 그 이상이었고요. 그것은
둘의 행동이나 편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 편력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이런 생각까지 한 것입니다. 자신과
디에고 리베라를 아예 반씩 잘라 붙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죠. 한순간도 떨어지지 못하게 말입니다.
(126-127)
이런 모든 상황에도 프리다 칼로는 남편을 비하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묵묵히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디에고
리베라. 시작
디에고
리베라. 창조자
디에고
리베라. 내 아이
디에고
리베라. 내 남자 친구
디에고
리베라. 화가
디에고
리베라. 내 연인
디에고
리베라. 내 남편
디에고
리베라. 내 친구
디에고
리베라. 내 어머니
디에고
리베라. 내 아들
디에고
리베라. 나
디에고
리베라. 우주
통합의
다양성
왜
나는 그를 디에고 리베라라고 부르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자신의 것이다.
(204-205)
트로츠키가 일반인이었다면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던 연인의 작품을 걸어놓을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국민 영웅이며,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소련 공산주의 혁명의 3대 거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걸어놓는다면 비난할 사람이 없었죠. 추종자들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프리다 칼로가 이 그림을 준 것은 어쩌면 그를 존경하던 디에고 리베라를 향한 보복 심리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배신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을 자신이 차버림으로써 남편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죠. 남편은 트로츠키를 대단한 혁명가로 평가했고, 그가
소련에서 축출당해 갈 곳이 없을 때 멕시코로 망명하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디에고 리베라도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부인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부인의
불륜 상대가 자신이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211)
<도르시 헤일의 자살>이 이렇게 그려진 것은 프리다 칼로 입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에게
고통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을 잊기 위해서는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 시간을 두고 희석시키는 것이죠.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프리다
칼로의 방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양편에 오해를 낳았던 이 그림은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현재는 익명으로 기증되어 피닉스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216)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색깔에 관해 쓴 적이 있습니다.
. 녹색 : 따뜻하고 좋은 빛
. 붉은 보라색 : 아즈텍. Tlapali(그림과 그림 그리기에 사용되는 ‘색상’을 뜻하는 아즈텍어), 붉은 선인장의 오래된 피,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살아 있는
. 갈색 : 점의 색깔, 썩어가는 잎의 색깔, 지구
. 노란색 : 광기, 질병, 두려움, 태양과
기쁨의 일부
. 코발트블루 : 전기와 순수, 사랑
. 검은색 : 없다, 정말로 없다
. 잎의 녹색 : 나뭇잎, 슬픔, 과학, 독일 전체가
이 색깔이다
. 연두색 : 더 많은 광기와
미스터리, 모든 유령들은 이 색상의 옷을 입는다. 최소한
속옷이라도
. 다크그린 : 나쁜 소식과
좋은 사업의 색깔
. 네이비블루 : 거리감, 부드러움도 이 파란색일 수 있다
. 마젠타 : 피? 글쎄, 누가 알겠어!
(281)
조금 아프다고 해서 수술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받는 것이죠. 또 한 번의 수술로 모든 증상이 해결된다면 다시 받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받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프리다 칼로는
사고 이후 32번 이상 수술을 받았습니다. 39살이 되던 1945년에도 프리다 칼로는 또 한 차례 척추 수술을 받게 됩니다. ‘혹시나
좋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물론 잘못 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위험도 있었지만, 이전 수술 이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고,
아직은 젊으니 기대를 해본 것이죠.
(302)
1944년 프리다 칼로는 한 평론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는 어린 시절 사고 당시 몸에 흐르던 피를 보았던 생생한 기억이고, 또
하나는 탄생, 죽음, 그리고 생명을 이끄는 끈에 관한 나름의
생각이다. 마지막 한 가지는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이다.”
(345)
죽기 얼마 전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난 건강하게 잘 탈출했다.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절대 어기지 않을 생각이다. 디에고 리베라에게 감사하고, 나의 테레에게 감사하고, 그라시 엘리타, 그리고 딸에게 감사하고, 주디스에게 감사하고, 이사우아 미노에게 감사하고, 루피타 주니에게 감사하고, 파릴 박사와 폴로 박사와 아르만도 나바로
박사와 바르가스 박사에게 감사한다. 나 자신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삶을 지탱하려는 나의 엄청난 의지에도 감사한다.
기쁨, 인생 만세.
디에고 리베라 만세. 테레 만세. 나의 주디스
그리고 내게 놀라우리만치 잘해주었던 모든 간호사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