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149)

곽은 학생이 박정희 정권 때 무엇을 해보았냐고 묻는 건 아니며, 늦춰 잡아 전두환, 그러니까 1980년대쯤을 상상했다고 가정했다. 그 시대에 자신이 한 일이 있다면 하나, ‘태어나는 일이었다. 곽은 자기가 그렇게 늙어 보이는지, 학생이 근현대사 연표 학습을 게을리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지루한 수업 분위기가 전환되길 기대하며 분유나 기저귀 같은 단어가 포함된 유머로 대답했다. 주름 개선 화장품 2종을 추가해 피부관리 루틴을 체계화했다. 가끔 혼자 재치 있는 대답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했냐고 묻지 그래요?’ 미시사를 포함한 세 권의 역사서를 읽고 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라고 메모했다.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였지만 젊은 사회학자의 저서는 고등학교의 심성 구조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흔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했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생활하며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들 했다. 퇴행보다는 조로(早老)가 나았다.

 

(204)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는 걸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언론은 정치에 발을 들였던 예술가들의 궁색한 말로와 군소정당의 반복적 실패를 부각중이다. 호사가들은 로나의 선언을 유력 정당 공천을 유리한 조건에 받기 위한 포석으로 폄하하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팬들조차 그녀가 순수함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또는 아스팔트에 있어야만,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296)

공항이란 무섭다. 들어가도 되는 곳과 들어가면 안 되는 곳과 들어가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들고 가도 되는 것과 들고 가면 안 되는 것과 들고 가야 하는 것도 정해져 있다. 그렇게나 엄격하면서 정작 중대한 사정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는다. 작은 딱지를 붙인 내 가방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내가 세상 저편이 갈 때까지 가방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내 손에 다시 쥐어질 수 있을까. 내 운명도 가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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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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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앞뒤 가리지 않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는, 가끔은 쌍욕까지 거침없이 내뿜는 도올 김용옥 님이라 더욱 좋다. 도울 김용옥 님의 근간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권을 읽었단다. 김용옥 님은 거침없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고, 해박한 지식을 강연이라는 형식으로 전파해주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단다. 아빠도 그런 이유로 김용옥 님을 좋아하고, 그의 책들을 즐겨 읽고 한단다. 단점이 하나 있다면 책도 자신의 지식 수준으로 거침없이 쓰다 보니, 지식 수준이 낮은 아빠 같은 사람들은 읽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김용옥 님의 책을 읽기 전에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시작해야 한단다.

김용옥 님의 책들은 주로 고전이나 사상서에 대한 책들을 많이 쓰셨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일제시대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만해 한용운에 관한 책이란다. <님의 침묵>이라는 유명한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구나. 아빠는 오래 전에 김삼웅 님이 쓰신 <만해 한용운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한용운의 삶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하면서도 일제 탄압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모습은 또렷이 기억나는구나.

이 책은 도올 김용옥 스타일의 한용운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단다. 거침없이 자유롭게 쓰셨는데, 읽고 나니 그렇게 쓰신 것이 다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 그리고 왜 하필 이 시점에 만해 한용운일까? 싶었는데 서문 대신 쓰신 서시(序詩)를 읽어보니 알겠더구나.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작년 10월이니 윤석열의 내란 시도가 있기 두 달 전이란다. 이미 남아 있는 3년은 너무 길다고 큰소리가 나오던 시절이고, 정부가 왜 이렇게 친일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던 시절이란다. 김용옥 님도 친일파 정부가 답답했는지 작심하고 비판했어. 그리고 일제 시대 일제와 친일파에게 항거했던 한용운 님을 다시 공부하면서 오늘날의 친일파를 몰아내자는 의도도 있었던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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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찌하여 이 땅의 권력을 쥔 자들이

또 다시 일본에게

이 땅을 팔아먹고

일본의 이익에

우리 삶을 예속시키며

일본의 군대가

이 땅에 상륙하는 것을

도우려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의 사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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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러분! 친일파들을 물리칩시다.

현해탄 건너 그들의

고향으로 보냅시다.

밀정들을 동해 건너

그들의 조국으로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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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해 한용운은 안타깝게도 해방을 얼마 앞 둔 1944년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김용옥 님이 만해 한용운을 이야기하면서, 왜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가 학예회 때 춘 승무부터 이야기했는지 좀 의아했단다. 자신의 친구가 춘 승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조지훈 시인이 쓴 시 <승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어. 승무라는 것이 스님이 추는 춤이다 보니, <승무>가 시())라서 스님이자 시인이었던 한용운 님과 연결이 되나 싶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조지훈 시인의 삶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청록파 시인으로 알고 있던 조지훈 시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어 좋긴 했지만, 한용운에 관한 책에 조지훈 시인의 이야기가 길어지네 하면서도 김용옥 님의 글쓰기는 역시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서 마음에 드네, 이러면서 계속 읽어나갔단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지훈 시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서 조지훈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비교 설명도 해주었어. 어느 책에서 볼 수 없는 두 시인의 비교…. 예전에 김수영 시인에 대한 책을 읽어서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김용옥 님이 설명해주니 더욱 명확해졌고, 조지훈 시인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지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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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나는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시의 세계를 사랑하고, 그 인간됨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후학이지만, 김수영이 조지훈보다 더 진보적이라든가, 조지훈이 김수영보다 더 보수적인 삶의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도무지 할 말이 아닌 것 같다. 수영과 지운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지훈이 한 살 먼저 태어났고,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점에 비명에 갔다) 지훈이야말로 역사의 굽이마다 정확한 행적을 남겼다. 지훈은 지조를 목숨보다 아끼는 선비였고 수영은 자유롭기에 좀 퇴폐적인 성향을 가진 도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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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님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을 했다는데 그때 조지훈 시인은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교수를 하고 계셨대. 하지만 과도 다르고 위치도 달라서 조지훈 시인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는구나. 김용옥 님은 나중에 다시 고려대학교 철학과로 입학했는데, 그때는 조지훈 시인이 병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라고 했어. 그런 조지훈 시인이 죽기 전에 하시던 작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용운 작품들을 모아서 출간하려던 작업이었단다. 드디어 조지훈 시인의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가 밝혀졌구나.

1958년 조지훈은 남정 박광 선생과 함께 고려대 애제자들과 함께 한용운 전집 출간 작업을 시작했단다. 그 작업은 10년 넘게 이어지고 1973년 전집 6권으로 출간하게 되었대. 그 사이에 조지훈 시인과 박광 님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한용운 전집 출간할 때 그들의 이름을 빠져 있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조지훈과 박광의 공이 가장 크다면서, 그들의 이름을 뺀 행위에 대해 김용옥 님은 크게 비판을 하였단다. 한용옥 시인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지훈 시인에 의해 한용운 전집이 출간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다른 변절자들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말이야. 그리고 불교계의 자존심도 지켜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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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우리는 만해를 통해서 비로소, <독립 선언서>를 짓고도 자기 이름을 명단에서 빼달라고 비굴하게 요청한 육당이나, 창씨개명에 앞장서서 본인의 이름을 카야마 미쯔로오로 바꾸고, 황민화 운동,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며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군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독려한 춘원이아, 타쯔시로 시즈오로 이름을 바꾸고 카미카제 같은 전쟁범죄를 찬양하며 조선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한 미당 서정주(1915~2000) 등등의 민족지도자들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만해의 시가 오늘까지 살아있지 아니하면, 일본 식민지강점시대의 암울한 저류를 흐르던 우리민족의 정의감이 그 좌표를 잃고 증발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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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전투력에 트라우마가 있던 일본은 다시 쳐들어와 왔을 때는 그들부터 포섭하려고 했다는구나. 그래서 일제 시대 때 불교에 관대했고 불교계에서도 그런 정책들을 좋게 봤었나 봐. 예를 들어 스님들은 한양 도성 내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풀어주는 것들 말이야. 하지만 만해 한용운은 끝까지 호국불교의 자존심을 지키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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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7)

20세기 일제강점이라는 사건은 메이지시대의 권력다툼의 분규 속에서 태동한 사쯔마 계열의 정한론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결국 알고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이 재현일 수도 있다. 그 망상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남김없이 섬멸하기 위하여 이순신은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 땅에서 최후 일 척까지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임란의 의병의 활약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력이 출중한 부대가 승병조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님들은 철학이 있었고 호국불교의 사명이 있었고, 무술에 능한 자가 많았고, 조직적 전투력이 있었다. 명령계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기네 불교와는 달리 대처가 아닌 비구의 순결한 전통을 지니고 있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역()이 말하는 바, 이간(易簡)스러웠다는 것이다. 일본침략자들에게 승병은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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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해 한용운 님의 아홉 살 때 신동들이 뗀다고 하는 사서삼경을 읽은 것이 아니고 <서상기>라고 하는 찐하면서도 진보적인 성향의 애정소설을 읽었다고 하는구나. 그런 것들이 그의 감성 세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했어. 만해 한용운은 두 번의 출가 끝에 1905 1 26일 백담사에서 정식 스님이 되었다고 했어. 그 당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라는 사회진화학으로 분류되는 책을 읽었는데, 그것이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했어.

백담사에서 스님 생활을 시작한 한용운은 이후 금강산과 거봉산에서 수련을 하였고, 일본 유학도 갔으나 중도 하차하고 돌아오셔서 조선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조선불교유신론> 1910년에 쓰셨단다. 이 책에서 대처승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어 논란도 있었으나 불교를 널리 퍼지게 하는 방안으로 제시했던 것이고 그 책의 핵심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어. 1914년에는 <불교대전>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해 팔만대장경을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하는구나. 1915년에는 다시 백담사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2년 전 화재로 올 수 없어서 오세암으로 가셨대.

….

1918 1차 세계 대전이 끝이 나고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중국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그 소식을 알고 여운형은 중국에 가서 크레인을 만났단다. 조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승전국이 지배한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논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대. 그래도 크레인은 어떤 형식으로 도움은 주겠다고 했어.

이 말에 여운형은 신한청년단 멤버들을 소집하여 탄원서를 작성했다는구나. 그 탄원서를 크레인에게 전달하였고, 윌슨 대통령에까지 전달되었대. 하지만 승전국들도 결국은 모두 제국주의 국가들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약소국의 독립 보장은 패전국에 지배당한 국가들에 제한되어 있었어. 그런 사실을 모른 우리나라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맞춰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이었던 거야. 한용운도 불교계를 대표해서 3.1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일로 약 3년간 투옥되었어. (1919.3.1~1921.12.22)

감옥에서 <조선도립의 서>라는 글을 썼고, 이 글은 독립신문에 실리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대. 감옥에서 출소하고 나서 서울 선학원에 잠시 있다가 다시 오세암으로 가셨대. 1925 6 7 <십현담 주해>라는 책을 쓰고, 1925 8 29일 드디어 그 유명한 <님의 침묵> 시집을 출간하셨어. <님의 침묵>에는 모두 88편의 시가 실려 있단다. 88편의 시 중에 가장 유명한 시가 시집의 제목으로 뽑은 <님의 침묵>이란다. <님의 침묵>이라는 시뿐만 아니라 시집에 실린 많은 시에서 당신등의 말이 나오는데 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했어. 이 시를 쓴 시기하며 한용운이 그 전까지 걸었던 삶의 행적을 보았을 때 은 우리나라라는 것을 누구나 알 텐데, 고의로 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국소적인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구나. 친일파를 뉴라이트라고 포장해서 부르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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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님은 갔습니다. ~~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이 첫 구절을 읽고 더욱이 1925년 만해가 이 시를 쓰던 시점에서 읽고, 3.1만세혁명을 떠올리지 아니하는 자는 천치바보이거나 위선자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만을 여기다 덧붙이면서 순수문학을 운운하는 자도 무뎌빠진 감상론자, 아니면 뉴라이트의 근대화론의 정당화를 위해 애쓰는 자들의 도피처가 될 것이다. 물론 만해의 시가 위대하고 옹혼한 까닭은 개인의 사랑의 테마와 조국의 운명 혹은 코스믹한 해탈의 테마가 항상 병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님은 갔습니다의 최초의 인상이나 최종적 의미는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환상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민족의 독립이 가능하리라 믿고 목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민중적 좌절감의 절규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 ~ ~ 사랑하는 나의 조국은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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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 속의 첫 키스라는 말은 3.1만세혁명이라고 이해하면 되고, ‘새로운 슬픔은 역사의 단절과 민족혼의 좌절로 해석하면 된다고 했어.

지은이 김용옥 님은 한용운 님의 시를 극찬하면서 비슷한 시기의 다른 시들도 평가를 했었어. 최초의 신체시하고 하여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는 형편 없는 시라고 하면서 그런 형편 없는 시에 최초의 신체시라고 타이틀을 붙여주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강하게 비판했어.,

그리고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 역시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단다.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로 써서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타고르 시인김용옥 님은 그런 타고르를 다른 시각으로 보았단다. 인도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국에서 유학을 했고, 영어도 유창하여 자신의 시를 자신이 직접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대. 그렇게 영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시인이라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 같아. 당시 인도는 영구의 지배를 받는 어려운 시절이었고, 간디는 타고르에게 인도 독립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때가 아니라는 식으로 거절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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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그러나 타고르는 시종일관 거리를 두었다. 간디의 아이디어를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고 생각했고, 영국으로부터의 인도의 독립만이 장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립보다 인도인의 정신적 개화가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간디를 독립이 곧 인도인의 정신적 해방을 가져오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의 과정에서 인도인들은 근대적 가치를 배우고 구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타고르는 인도인의 기질에 배어있는 선민주의나 비합리성,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고, 아직도 서구에서 배울 것이 많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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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런 타고르가 우리나라에 대한 시를 어떻게 쓰게 된 것인가. 타고르가 일본에 방문하게 되었고, 그에 맞춰 우리나라 동아일보 기자가 일본에 찾아가 우리나라에도 방문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대. 하지만 거절 당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짧게 시 한 편을 적어서 준 것이 바로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라고 하는구나. 김용옥 님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 상태에서 안전빵으로 쓴 시라고 하는구나. 김용옥 님이 타고르 시인을 이렇게 평가하니 정이 뚝 떨어지면서 타고르의 시를 읽고 싶은 생각도 뚝 떨어지는구나. 집에 언제는 읽어야지 하면서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사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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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타고르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벵골의 구석에서 자라난 그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정감을 알 리가 만무하다. 그러한 타고르에게 민족의 구원을 기대는 예언자적 시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타고르는 근원적으로 픽션이다. 그가 쓴 등불시는 타고르와 간디의 사상적 대결을 연상시킨다. 타고르는 모르는 상대로부터 시를 부탁 받았기 때문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최대한 부딪힘 없이, 최대한 안전빵의 시를 쓴 것이다. 그러한 허구가 조선역사 정취의 1세기를 장악하였다면 우리의 한 세기 그 자체가 허구가 아니겠는가? 내 말이 너무도 혹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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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시가 타고르의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었나 봐. 지은이 김용옥 님은 그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주시면서 만해 한용운의 시가 더 탁월하다면서 대학원과 초딩 만큼 차이가 난다고 했어.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집의 71번째 시의 제목은 <타골의 시를 읽고>라고 있다는 하는구나. 그 시를 통해 만해 한용운은 타고르의 시는 현실 떠나 이상을 노래한다고 평가를 했다는구나. 그 시를 읽어 보면 한용운은 타고르의 시를 좋게 평가한 것 같지는 않구나. 아래는 오타처럼 보이는 것이 몇 개 있는데, 오타가 아니라 초판본에 실려 있는 시 그대로 발췌해서 그런 것이란다. 옛날에는 저렇게 쓰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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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374)

<타골의 시 <GARDENISTO>를 읽고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최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모치는 백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랴고 떨어진 꼿을 줏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줏은 꼿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꼿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읍니다.

눈물을 떨어진 꼿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서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모리 좋다 하야도 백골의 입설에 입맞출 수는 없읍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서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서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겄읍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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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권의 이야기란다. 이번 책은 제법 어렵지 않고 잘 읽히는 것 같아 더 좋았단다.^^ 2권의 이야기도 조만간 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 시대가 만해를 부릅니다.

책의 끝 문장: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모든 논의를 리얼하고 신실하게 만드는 것은 만해의 삶의 지조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혁명에 투신하였고, 지고의 선의 경지를 증득하였고, 시인으로서 고매한 언어를 구사하였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변절, 배신의 족적만 남겨도 위에 그린 삼각형들은 다 부서져 버린다. 멀리 산속으로 도망가 숨어 살면서 절개를 지키는 것은 혹 가할지 모르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살면서 호통을 치면서 당당한 지조와 타협 없는 절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면 그 경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지훈은 만해의 절개가 그의 삶의 업적을 빛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진주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서상기>에서는 최초의 무산지몽(巫山之夢)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도 남자중심의 기술이 아니라 여자의 주체적인 선택을 나타내고 있다. 여자는 더 이상 남자에게 "따멕히는" 존재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보다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다. 앵앵은 여러가지 방편을 통해 장생을 시험한다. 그의 상사병이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위태로운 증세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이불과 베개를 먼저 보내고 장생이 누워있는 서상(西廂, 큰 건물의 서쪽 회랑)으로 나아간다. 앵앵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모든 것을 비우는 듯한 극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 자태는 곡패 "원화령(元和令)"의 운을 밟는 시로써 표현되고 있다. - P176

조선불교유신의 개혁을 꿈꾸고, 또 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8만대장경을 재편집하는 웅장한 작업을 하였어도 그것은 문자의 장난이었지, 자기가 추구하던 진정한 존재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했다. 존재의 자유는 생활의 자유로 표현되지만, 생활의 자유는 내면의 정신적 자유가 달성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적 자유는 스스로를 속박한 자박(自縛)의 상태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해방의 소리를 해풍 속에 쓸려가 떨어지는 잡물의 추락성 속에서 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객수(客愁)의 어설픈 고뇌가 사라지고 나 만해는 삼천계를 향하여 할파하노라! 백설(白雪)과 도화(桃花)의 편편은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주의 실상일 때는 시공의 분별심을 초월하는 것이다. 복사꽃의 붉음이 흩날리는 백설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야말로 객수(客愁)가 사라진 고향의 모습이리라. 그것은 존재의 자유인 동시에 기나긴 방황을 거친 자기 삶의 족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 P236

조선왕조 전체를 개관할 때, 한글이 언문이라 하여 비하된 듯하나 그 실용적 가치는 꾸준히 증가되었으며, 세종의 창제동기를 충분히 실현되어 갔다고 볼 수가 있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여과없이 글에 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방대한 한글자료들이 방치된 채 연구되고 있지 아니한 것이 현금의 정황이다. 백성이 권력기관에 항의하는 괘서들이 한글로 쓰인 예가 많았다 하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로 한글의 사용은 급증하였다고 한다. 왜놈들이 읽지 못하는 암호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광해군 이후로 왕후들이 청정(聽政)이 많았던 까닭에, 한글정치라고 말할 정도로 국정문서에 한글이 많이 등장하였다. (김일근 <언간(諺簡)의 연구(硏究)>, 건국대학교출판부, p.330)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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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게 바로 독재자들이 써먹는 전형적인 수법이야. 팔십 넘은 나이에 이승만도 나 아니면 이 나라는 안 된다는 했거든.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른 게 바로 경제문제야. 박 통이 경제개발을 추진했고, 그 덕에 이만큼 잘살게 됐다. 앞으로 계속 더 잘살게 되려면 박 통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 아주 그럴듯한 감언이설이고, 판단력이 약하거나 가난한 일부 국민들은 속아넘어 가기 딱 좋은 괴변이야. 그러나,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박 통이 아니라 하루 14시간이 넘는 중노동, 그러면서도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형편없는 작업환경 등 온갖 악조건 속에서 피땀을 흘리며 일해 온 국민들의 노력과 힘이라는 것을 이번 데모에서 동시에 일깨워야 해. 국민 여러분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이 진실을 밝혀 박 정권이 유포해 온 최면에서 국민들을 깨어나게 하는 게 우리들의 또다른 임무야. 국민들이 그 최면에서 깨어나는 건 바로 박 정권이 안주하고 있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거니까.”

 

(73)

서경혜가 말하는 것은 긴급조치 1호의 5항과 6항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전체 7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 1 8 17부터 시행한다.

 

(75)

맞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오. 그러나 그런 인식을 하는 건 극소수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한 문제요. 참 불행하게도, 박 정권은 그동안 경제발전을 자기네 업적으로 선전하는 데 크게 성공했고, 현명하지 못한 대중들은 정치선전에 최면되면서 대중들의 약점인 영웅주의에 빠져들어 박정희를 경제를 일으킨 영웅으로 믿고 받들게 되었소. 대중들이 그렇게 된 데는 그동안 그 영웅주의를 깨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야당, 언론, 지식인들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소. 다시 말하면 정치, 사회적 투쟁이란 폭넓은 대중들이 호응과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데, 오늘의 현실에서 그게 과연 얼마나 가능할 것이냐 하는 것이오.”

 

(134)

이상재는 자꾸 눈앞에 떠오르는 허미경의 모습을 지우려고 애썼다. 허미경은 그렇게 짓밟히고 얼마나 받았을까. 양품점 차린 돈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결혼을 단념한 눈치였는데,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 놓은 보상이 그 양품점이라면 말이 되는가. 그 두 배를 받았다 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 강제로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놓은 것은 범죄다. 분명 사회적 범죄다. 그런데 그게 다 돈으로 해결이 된다. 도대체 그자가 지금까지 망쳐온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망쳐놓을까. 그런데도 그자는 돈의 힘으로 죽는 날까지 건재할 것이다. , 돈이란 무엇인가…… 과연 이 세상에 진실이란 있는 것인가…… 내일 아침 신문들을 본 민다리의 오빠들은 어찌 될까. 자기네 편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그러다가 끝내 체념하고 그자가 조금 낮게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재벌은 거대한 산이다. 아니, 산맥이다. 돈으로 덮이지 않을 사회악은 없고, 그들은 그 무기로 완전무장되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잉태해 낸 공룡이고 악마들이다. 노동 착취를 일삼으면서 그 따위 짓들을 하는 한 그들은 분명 사회의 악마들이다.

 

(221-222)

물론 싫어하지요.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언제까지 착취만 당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GNP 80불에서 시작한 경제개발이 15년이 된 지금 600불이 넘었어요. 이렇게 경제가 발전한 건 누구 때문인가요? 박 통 때문인가요? 기업주들 때문인가요? 그게 아니지요. 그건 그동안 모든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과 형편없이 적은 임금에 시달리면서도 뼛골 빠지게 일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기업주들은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정당한 보수를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기들 배만 더 불릴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정부는 또 아직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자본을 더 키워야 한다면서 기업들 편만 들고 있어요.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돼요.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공장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싸워야 해요.

 

(287-288)

유일민은 곰탕집으로 걸어가며, 술이나마 없었다면 이 세상을 어찌 살았으랴, 하고 생각했다. 술은 세상사의 괴로움이나 고통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일시적인 망각제나 도피처 역할은 해주었다. 특히 악몽을 피할 수 있는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감정을 토해내는 것도 괴로움과 고통이 덜어지는 것 같은 착각의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묘해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끼리 술잔을 나무며 속 깊은 하소연을 하고 나면, 실제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음은 다소 편해지고 또 하루를 살 수 있는 위인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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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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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국어책(?)을 한 권 소개할게. 아빠가 학창시절 어렵다고 생각한 과목 중에 하나가 국어였단다. 주제 파악을 하거나 문맥의 의미하는 바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어. 그리고 읽는 이에 따라 주관적인 생각이 다르니, 같은 글을 봐도 그 글에서 느끼는 감상이 다를 수 있는데, 한 개의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핑계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요즘도 책을 읽고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이 아빠의 주관적인 느낌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읽은 느낌이나 작가가 의도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제는 그것에 틀렸다고 채점을 받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구나.

가끔 너희들이 모르는 문제를 물어볼 때, 국어책을 들고 오면 바짝 긴장하게 되더구나. 얼마 전 인터넷서점에 눈에 띄는 국어 책이 한 권 있었어. 평점이 만점을 육박하는 그런 책이었지. 황선엽이라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이 쓴 <단어가 품은 세계>라는 책이야. 부제로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수업이라고 적혀 있었어. .. 어휘력을 높일 수 있다고? 이 책을 읽으면 너희들이 물어보는 국어 문제에 좀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 책은 아빠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단다.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참 재미있고 유익하고 하겠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첫 문장으로 대신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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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단어의 뿌리를 탐구하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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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쓰던 말, 무심코 쓰던 말…. 그 말이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그냥 쓰는 말그런 말들의 유래를 이야기해주는 그런 책이란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날마다 하는 양치질이라는 말의 유래 같은 거..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양치질이라는 말누군가 그 말이 어떻게 생겨났을 것 같냐고 물어보면, 좋을 양()에 이 치()라고 이야기할 것 같구나. 그런데 아니었어. 단어라는 것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쓰다가 정착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양치질도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더구나.. 옛날에 칫솔이 없던 시절 이에 낀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했는데, 버드나무 가지를 한자어로 양지(楊枝)라고 한대. 그래서 예전에는 양지질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 이와 관련이 있는 ()’로 바뀌었다는 거야. .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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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0)

,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하였는데 그 도구를 재료의 명칭인 양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도구를 사용하는 행위를 양지질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양지질이라고 말이 이를 닦거나 헹구는 행위 전반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고, 시간이 더 많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양지나 양지질이라는 말이 기원적으로 버드나무 가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우리나라는 한자 문화권이었으므로, 한자어 가운데 를 뜻하는 이 치()라는 한자가 있으니 세월이 흘러 양지라는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 쓰이면서 를 혼동하여 쓰게 되었고, 양지나 양지질이 양치 내지 양치질이라는 말로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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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이렇듯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단어의 유래도 이야기해주고, 새로운 단어가 생성되는 과정도 이야기해주고, 시간이 흐르면서 뜻이 달라지는 단어들도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아주 유익해

 

1.

정지용 시인의 유명한 <향수>라는 시가 있단다. 이것은 노래로도 만들어져서 더욱 유명한 시란다. 그 노래 가사 중에 얼룩백이 황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소가 당연히 젖소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룩백이면서 어떻게 누런 소(황소)가 될 수가 있지? 황소란 누런 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큰 수소를 의미한단다. 아빠도 아직 기억하는데 우리 말 중에 이 접두어로 붙어 크다라는 뜻을 가진 말들이 있어. 큰 소를 뜻하는 말로 한소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황소로 바뀌었대. 그리고 <향수>라는 시에서 나온 얼룩백이는 젖소가 아니라고 하는구나. 우리나라에 젖소가 들어온 것은 1960년대 이후이고, <향수>라는 시는 1927년에 쓴 시이니 젖소를 모르던 시절이라는구나. 그렇다면 얼룩백이는 어떤 소일까? 호랑이 무늬를 가진 칡소가 바로 얼룩백이라고 하는구나. 이 책에 얼룩백이 칡소의 사진도 실려 있는데 정말 호랑이 무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멋지게 생겼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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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요즘 사람들은 얼룩백이 소라고 하면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점박이 무늬의 홀스타인 젖소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홀스타인 품종의 소가 널리 보급된 것은 1960년대 이후라고 합니다. 이 시가 발표된 때는 1927년이니 당시에 홀스타인 젖소가 우리나라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홀스타인 젖소도 아니라면, 얼룩백이 소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여기서 얼룩백이란 칡소를 말합니다. 오늘날 한우의 대표는 누런 소가 되었지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소는 누런 소 외에도 흰 소, 검은 소, 몸에 호랑이처럼 줄무늬를 가진 칡소 등 다양한 종류의 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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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것 중에 하나가 개의 새끼는 강아지, 소의 새끼는 송아지, 말의 새끼는 망아지라는 말이 있는데, 왜 고양이의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 따로 없을까? 궁금했어. 고양이를 집에서 키운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했었어. 그런데 이 책에서 그 이유를 알려주었단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또 대표적인 가축 돼지의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 없는데 그 이유도 함께 알려주었단다. 그 이유는 다소 충격적이었단다. 바로 고양이와 돼지가 각각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었다는 것어른 고양이와 어른 돼지를 나타내는 말이 도태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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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예전에는 돼지와 고양이의 새끼를 뜻하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는 무엇일까요? 바로 돼지와 고양이입니다. 무슨 말장난이냐고 할지 모르나 돼지와 고양이는 원래 새끼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성체를 뜻하는 말로 변한 것이지요.

옛날에는 돼지와 고양이가 새끼를 뜻하는 말이었다면 성체를 뜻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전 사람들은 돼지를 돝이라 하였고 고양이는 괴라고 하였습니다. 돝이라는 말은 현대에는 사라져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우리가 지금도 자주 사용하는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윷놀이에서 도, , , , 모 할 때 의 형태로, 또 마산 앞바다에 있는 돝섬이란 지명에, 또 물고기 이름 돗돔에 남아 있습니다. 돗돔은 원래 돝돔에서 유래한 것인데 돝이란 말이 사람들 사이에 쓰이지 않게 되면서 표기까지도 ㅅ으로 바뀌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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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갈매기살, 김치 등 여러 단어들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단다.

 

2.

또 같은 단어인데 다른 것을 나타내는 단어들도 이야기해주었어. 김유정 님의 대표적인 소설 <동백꽃>도 그런 단어 중에 하나란다. 동백꽃라고 하면 남부 지방에서 겨울에도 피어나는 빨간 꽃을 떠오르게 된단다. 우리가 지난 겨울에 놀러 갔던 통영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잖니.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제목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보지 않았구나. 심지어 소설 속에서 동백꽃이 노랗다고 한 문장도 있었던 것 같은데의심을 해볼 만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김유정의 소설 속의 동백꽃은 우리가 지난 겨울, 통영에서 본 그 동백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단다. 그 꽃은 그 꽃이 아니야. 엄마한테 이야기했더니, 얼마 전에 Jiny의 교과서에서 봤다고 하더구나. 작년에 JIny의 국어 교과서에 <동백꽃>이 실려 있었잖니.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바로 생강나무 꽃이라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왜 생강나무 꽃을 동배꽃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두 나무의 용도가 비슷해서 그랬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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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강원도에서는 왜 생강나무를 동백이라 불렀을까요? 이유는 두 식물의 용도가 공통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백나무 씨앗에서 짜는 동백기름은 식용으로도 쓸 수 있지만 부녀자들의 머리에 바르는 기름으로도 많이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백이 자라지 않는 강원도에서는 동백기름 대신 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사용하였어요. 동백기름 대신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그 이름까지도 동백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초기에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동백나무를 뜻하는 <Camelia>라고 제목을 붙였다가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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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중에 해당화도 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는 해당화와 중국에서 이야기하는 해당화가 다른 꽃이래. 해당화(海棠花)의 한자어도 동일한데 말이야.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해당화의 뜻은 바다 근처 사는 꽃이라는 뜻이고, 중국의 해당화는 바다 건너 넘어온 꽃이라는 뜻이라고 하는구나. 그래서 중국의 해당화는 우리나라에서 산사나무라도 하는 나무의 꽃이라고 하는구나.

….

엄마와 아빠라는 말에도 비밀이 있을 줄이야…. ‘엄마아빠라는 말에는 이미 호칭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래. 엄마는 ’+’!’, 아빠는 ’+ ‘!’ 이렇게 말이야. 이름으로 부를 때는 의 호격조사를 붙이는데, 엄마와 아빠를 부를 때는 그냥 엄마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이유가 호격조사가 포함되었던 말이라서 그렇구나. 그런데 오늘날 엄마와 아빠는 명사로 굳어져서, 엄마야, 아빠야 하는 말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런데 엄마야도 많이 쓰이면서 또 명사화가 될 조짐이 보인다고… ‘엄마야가 해 줘~” 이런 말을 쓰잖니참 재미있는 단어의 진화로구나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책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어 참 재미있게 읽었단다. 이 책에 나온 것들을 오래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기대는 안하련다. 그리고 이 책의 후속작이 꼭 나왔으면 좋겠구나. 아름다운 우리말들이 얼마나 많니..

이 책은 너희들도 꼭 읽으면 좋겠지만 너무나 바쁘신 몸들이니…^^ 아빠가 이 책에서 나온 것들을 부지런히 이야기해주어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저는 단어의 뿌리를 탐구하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책의 끝 문장: 이를 인지하고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선택으로 언어는 변화합니다. 없던 의미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기존의 부정적인 의미가 완화되거나 심지어는 미화되어 쓰이기도 하며, 의미가 추가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잘 쓰이지 않게 되면서 한때의 유행어로 남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쓰이게 되어 안착하기도 하지요. 기존에 알던 단어가 새로운 의미로 쓰일 때, 그리고 그 단어를 자신도 쓰게 될 때 왜 이런 의미로 쓰이는 걸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많은 단어를 무심코 써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P44

제가 생각하는 국어학자 역할은 이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오" 하고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뒤쫓아 가면서 확인하는 거죠. 다만 그 방향이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이건 생객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선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고 사람들의 방향이 맞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 P107

갈매기살의 갈매기는 ‘가로막’이라는 말이 변한 형태입니다. 갈비와 삼겹살 사이의 부위가 갈매기살이라고 하였는데요. 갈비는 가슴에 위치하고 삼겹살은 배에 있으니 갈비와 삼겹살 사이란 가슴과 배의 경계 부위가 됩니다. 포유류의 가슴과 배는 횡격막(橫膈膜)이라는 얇은 막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한자어 횡격(橫膈)을 우리말 ‘가로’로 바꾸어 횡경막에 해당하는 말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가로막입니다. 세로가 이닌 가로로 되어 있는 막(膜)이라는 의미이지요. - P219

요즘은 어떤 사람을 두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라고 부르나요? 잘 알지 못하는 남자 어른을 두고 아저씨라고 하거나 마찬가지로 잘 알지 못하는 여자 어른을 두고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예전에는 남자 친척을 모두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삼촌, 외삼촌, 숙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부, 이모부를 모두 구분해 부르지만, 예전에는 이들을 모두 아저씨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주머니 역시 고모, 이모, 숙모, 백모 할 것 없이 집안의 여자 어른을 부르는 단어였습니다. - P228

그러다 보니 김치가 우리 고유의 음식이므로 김치라는 단어 또한 순우리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김치는 침채(沈菜)라는 한자어가 변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침채는 담글 침(沈)에 채소 채(菜)자로 ‘채소를 담근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현대 한자음으로는 침채이지만, 옛 한자음으로는 팀ㅊ.l이었고, 사람들이 말할 때는 딤ㅊ.l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딤채를 김치냉장고 브랜드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고 있지요.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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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보수가 중시하는 자유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자유만 넘쳐나는 사회가 되면, 산업혁명 때 노동자들처럼 인간다운 대우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반대로, 진보가 중시하는 평등만이 강조되어 인간의 본능인 자유가 침해당하는 수준까지 이르면, 공산주의와 가까워진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가 적절히 섞여 균형을 이루었을 때 올바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진보와 보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 존재하는 것이 맞다.

 

(11-12)

극우는 전체주의, 순혈주의, 자국중심주의, 군국주의 등의 특징을 보이며, 자민족우월주의로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런 성향들은 처절한 애국심으로 드러나면서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나치즘과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가 대표적인 극우이다. 그러나 친일매국과 반공 우파들은 자국보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자민족우월주의는커녕 조선을 비하하며 같은 민족인 북한에 대해 배타적이고 혐오하는 감정을 지녔기에 통일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반민족 세력이다. 세상에 이런 극우는 없다. 그렇다면 이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매국적이고, 독재를 추종하고, 반민족적이고, 자학사관에 빠져 있고, 최근에는 내란과 학살을 옹호하는 이들을 칭하는 용어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44-45)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자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은 재산을 챙겨 일본으로 도망가거나 한반도 어딘가로 잠적했다.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의 자본가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주요 산업 시설은 대부분 북한에 집중되어 있었고, 해방 직후 북한은 남한으로의 전력 송출을 끊어 버렸다. 그로 인해 남한은 전력 무방비 상태에 놓여 공장 가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해외 공포와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면서 남한의 인구는 급속히 증가했다.

쌀도 부족했고 생필품도 부족했다.

인플레이션은 당연했다.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했다.

해방 직후 남한은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근대화되었더라면, 해방 직후 남한의 가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132)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자들이었고, 민족주의자들이 모두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친일파의 대다수는 민족주의자였다.”

내가 만든 문장이지만 반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슬프다.

 

(162)

뉴라이트의 이승만 띄우기에 대해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뉴라이트가 김구를 깎아내리는 이유는 이승만을 띄우기 위해서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아무리 이승만을 띄우려 해도, 김구에게 눌려 이승만이 높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이승만에게 혈광 등 300개를 켜 대도 이승만의 얼굴에는 김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울 수밖에 없다.”

 

(190-191)

임시정부의 리더들은 장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카이로에 가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통께서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독립에 대한 확약을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후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한국만큼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식민지 상태였더라도 독립을 시키기로 약속을 받았다.

 

(217)

여운형의 독립운동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친일매국 세력들,

여운형의 통일노선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분단주의자들,

여운형의 탈이데올로기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반공주의자들,

여운형의 인간애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독재와 학살 추종자들.

이들에게 여운형은 두려움 그 자체다.

 

(228-229)

남한의 어떤 역사학자도 제주4.3사건을 연구하면서 김일성과의 연계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4.3봉기의 주역 김달삼이다. 김달삼은 4.3사건 초기인 1948년 제주를 탈출한 후 북한으로 올라가 4.3봉기의 과정을 알렸다. 자기가 봉기를 일으켜 놓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는데 자기만 섬을 탈출하여 월북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김달삼의 이러한 행동이 4.3봉기의 정당성을 훼손한다. 다행히 제주도민 역시 김달삼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그동안 김달삼은 6.25전쟁 전 1950 3월 강원도 정선군 김달삼모가지잘린골에서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학에서 6.25전쟁 중에 인민군 군복을 입은 채 1950 9월 전자했다고 기록한다.

4.3봉기를 일으킨 김달삼이 훗날 북한과 연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4.3봉기 자체를 북한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제주4.3사건과 광주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뻔하다. 이승만의 제주도민 학살과 전두환의 광주시민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픈 독재추종 세력의 몸부림이다.

 

(273)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면서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이 자신의 안전을 우려했듯이 친일파들 역시 독립운동가나 일반 조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일본인은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친일파는 갈 곳이 없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야반도주하여 산속으로 숨어들기도 했고, 변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또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집에 틀어박혀 조선인 눈에 띄지 않으려 애를 썼다. 개중에는 광복을 반기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친일파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8 15일부터 태극기를 든 자들이라고 한다.

 

(277)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꼽았다. 그러나 신채호가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제일대사건으로 이승만의 친일파 처벌 실패를 꼽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이승만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이승만이 독재를 했든지 6.25전쟁 때 무능의 극치를 보였든지 간에 이승만이 친일파 처벌만 제대로 했더라면 나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든 대립은 이승만이 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282)

영국의 브로크웨이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을 체포해야 한다. 유엔에 있는 영국 대표는 이승만을 부정하고 그의 정권을 끝내도록 요구해야 한다.”

영국의 레이놀즈 뉴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승만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모든 명분을 완전한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다. 이승만이 한국을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만큼 유엔이 한국을 맡아야 한다.”

한국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또 다른 책임을 져야 하는 미국은 침묵을 택했지만, 영국은 침묵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희대의 자국민 학살자이다.

 

(322)

6.25전쟁으로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이 되었다는 주장은 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미국을 지구적 차원의 패권국으로 부상하게 해 준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도 제2차 세계대전도 아니고, 6.26전쟁이었다. 미국의 패권에 기여한 정도란 측면에서 보면 어떠한 사건도 6.25전쟁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저비스, <한국전쟁이 냉전에 미친 영향>

 

6.25전쟁을 통해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었음을, 다시 말해 미국이 지구적 차원이 패권국이 될 수 있었다. – 6.25전쟁 참전용사의 아들이자 대법권 마이클 펨부룩, <미국의 세계가 시작된 곳>

 

6.25전쟁을 통해 미국이 지구적 차원의 패권국으로 부상하고자 할 당시 필요한 체계를 구축할 있었다. – 조지위싱턴대 교수 리처드 쏜턴,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376)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은 1960~1970년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개발과 시대 흐름을 같이했다. 특히 냉전체제 경쟁에서 자유 진영의 승리를 위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국인의 근면성과 성실함은 어느 국가와도 견줄 수 없다. 한국인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잘 먹고 잘산다. 더군다나 한국인은 영리하고 학구열도 높다. 여기에 부정할 수 없는 천민자본주의적인 마인드가 더해져, 남보다 잘살고 싶은 열망이 우리의 경제성정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한 채, 오로지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는 가난했을 것이라는 자학적이고 피동적인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412-413)

결국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기억되는 서울역회군(1980.5.15)이었다.

당시 회군을 결정했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그 후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의 후신인 보수 정당에서 국회의원만 5선을 했고,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회군을 반대했던 서울대 복학생 대표 이해찬은 노무현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회군에 대한 또 다른 반대자, 당시 서울대 대의원의장 유시민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또한, 당시 경희대 학생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을 역사의 죄인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들은 광주의 죽음에 대해서 아파해야 했다.

 

(459)

남한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된 지 두 달 후인, 12, 북한에서는 신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면서 김일성이 주석에 취임했다. 남한의 박정희는 초강력 대통령이 되었고, 북한의 김일성은 갑자기 주석직을 신설하고 주석이 된 것이다. 통일 분위기가 조성된 이후 남북한 양국의 독재 권력이 오히려 강화된 것이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서로 짜고 통일 분위기를 이용하여 자신들만의 권력을 강화한 셈이다.

 

(487-488)

그런데 여기에 끝판왕 보수 대통령이 등장했다. 사실 보수 대통령도 극우 대통령도 아닌, 친일매국 세력의 대통령이자 주술 대통령 윤석열이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 윤석열정부가 북한과의 전쟁을 계획한 정황이 너무 많이 드러났다. 북한의 NLL공격을 유도했고,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 국지전을 유도했다. 남한 특수부대에 북한 인민군복을 입혀 내란을 선동하는 한편, 국방부 장관은 북한의 오물풍선이 시작되는 지점을 원점 타격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이 정도면 그냥 전쟁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494-495)

다시 정리하자면,

뉴라이트는 몰역사적, 친일 반민족적, 친독재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뉴라이트는 인간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집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라이트는 일제강점기에 수탈당한 조선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이승만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을 오히려 빨갱이로 취급한다. 또한, 위안부 할머님들에 대한 망언을 일삼고, 세월호 유가족을 조롱하는 비인간적, 패륜적인 성향을 보인다.

뉴라이트는 정의로움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은 잠재적 매국노들이다.

 

(522)

작금의 반일 정서가 싫은 친일파들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은 천년의 적이고, 일본은 백년의 적이다.”

사실 이 말은 북한의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유언으로 했던 말이다. 신친일파와 일부 꼴통 보수들은 김정일의 말을 신줏단지 모시듯 믿고 있다. 진정한 종북이다. 최근 김정은도 이 말을 달고 산다고 한다. 이는 미국과 관계 개선을 바라는 북한 정권이 북한 주민들의 반중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와 함께 나온 말이었다. 북한이 이러한 대중외교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편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또한, 북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 중 한 나라가 중국이라고 하니, 역시 반갑다. 언젠가 통일을 두고 중국과 대립할 수 있는 우리입장에서는 북한동포들의 중국에 대한 거부감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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