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앞뒤 가리지 않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는, 가끔은 쌍욕까지 거침없이 내뿜는 도올 김용옥 님이라 더욱 좋다. 도울 김용옥 님의 근간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권을 읽었단다. 김용옥 님은 거침없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고, 해박한
지식을 강연이라는 형식으로 전파해주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단다. 아빠도
그런 이유로 김용옥 님을 좋아하고, 그의 책들을 즐겨 읽고 한단다. 단점이
하나 있다면 책도 자신의 지식 수준으로 거침없이 쓰다 보니, 지식 수준이 낮은 아빠 같은 사람들은 읽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김용옥 님의 책을 읽기 전에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시작해야 한단다.
김용옥 님의 책들은 주로 고전이나
사상서에 대한 책들을 많이 쓰셨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일제시대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만해 한용운에 관한 책이란다. <님의 침묵>이라는
유명한 시가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싶구나. 아빠는 오래
전에 김삼웅 님이 쓰신 <만해 한용운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한용운의 삶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 하면서도 일제 탄압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모습은 또렷이 기억나는구나.
이 책은 도올 김용옥 스타일의
한용운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단다. 거침없이 자유롭게 쓰셨는데, 읽고
나니 그렇게 쓰신 것이 다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 그리고 왜 하필 이 시점에 만해
한용운일까? 싶었는데 서문 대신 쓰신 서시(序詩)를 읽어보니 알겠더구나.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작년 10월이니 윤석열의 내란 시도가 있기 두 달 전이란다. 이미 남아
있는 3년은 너무 길다고 큰소리가 나오던 시절이고, 정부가
왜 이렇게 친일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던 시절이란다. 김용옥 님도 친일파 정부가 답답했는지 작심하고
비판했어. 그리고 일제 시대 일제와 친일파에게 항거했던 한용운 님을 다시 공부하면서 오늘날의 친일파를
몰아내자는 의도도 있었던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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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찌하여
이 땅의 권력을 쥔 자들이
또
다시 일본에게
이
땅을 팔아먹고
일본의
이익에
우리
삶을 예속시키며
일본의
군대가
이
땅에 상륙하는 것을
도우려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의 사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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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러분! 친일파들을 물리칩시다.
현해탄
건너 그들의
고향으로
보냅시다.
밀정들을
동해 건너
그들의
조국으로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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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해 한용운은 안타깝게도 해방을
얼마 앞 둔 1944년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김용옥 님이
만해 한용운을 이야기하면서, 왜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가 학예회 때 춘 승무부터 이야기했는지 좀 의아했단다. 자신의 친구가 춘 승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조지훈 시인이 쓴
시 <승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어. 승무라는 것이 스님이 추는 춤이다 보니, <승무>가 시(詩))라서
스님이자 시인이었던 한용운 님과 연결이 되나 싶었어. 그런데 이번에는 조지훈 시인의 삶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청록파 시인으로 알고 있던 조지훈 시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어 좋긴 했지만, 한용운에 관한 책에 조지훈 시인의 이야기가 길어지네 하면서도 김용옥 님의 글쓰기는 역시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서
마음에 드네, 이러면서 계속 읽어나갔단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지훈 시인과
동시대를 살았던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서 조지훈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비교 설명도 해주었어. 어느
책에서 볼 수 없는 두 시인의 비교…. 예전에 김수영 시인에 대한 책을 읽어서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는데, 김용옥 님이 설명해주니 더욱 명확해졌고, 조지훈
시인에 대한 궁금증은 더 커지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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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나는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시의 세계를 사랑하고, 그 인간됨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후학이지만, 김수영이 조지훈보다 더 진보적이라든가, 조지훈이 김수영보다 더 보수적인
삶의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도무지 할 말이 아닌 것 같다. 수영과 지운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지훈이 한 살 먼저 태어났고,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점에 비명에
갔다) 지훈이야말로 역사의 굽이마다 정확한 행적을 남겼다. 지훈은
지조를 목숨보다 아끼는 선비였고 수영은 자유롭기에 좀 퇴폐적인 성향을 가진 도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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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님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을 했다는데 그때 조지훈 시인은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교수를 하고 계셨대. 하지만 과도
다르고 위치도 달라서 조지훈 시인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는구나. 김용옥 님은 나중에 다시 고려대학교 철학과로
입학했는데, 그때는 조지훈 시인이 병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라고 했어. 그런 조지훈 시인이 죽기 전에 하시던 작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용운 작품들을 모아서 출간하려던 작업이었단다. 드디어 조지훈 시인의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가 밝혀졌구나.
1958년 조지훈은 남정 박광 선생과 함께 고려대 애제자들과 함께
한용운 전집 출간 작업을 시작했단다. 그 작업은 10년 넘게
이어지고 1973년 전집 6권으로 출간하게 되었대. 그 사이에 조지훈 시인과 박광 님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한용운
전집 출간할 때 그들의 이름을 빠져 있었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조지훈과 박광의 공이 가장 크다면서, 그들의 이름을 뺀 행위에 대해 김용옥 님은 크게 비판을 하였단다. 한용옥
시인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지훈 시인에 의해 한용운 전집이 출간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다른 변절자들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키면서 말이야. 그리고 불교계의 자존심도 지켜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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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우리는
만해를 통해서 비로소, <독립 선언서>를 짓고도
자기 이름을 명단에서 빼달라고 비굴하게 요청한 육당이나, 창씨개명에 앞장서서 본인의 이름을 카야마 미쯔로오로
바꾸고, 황민화 운동,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며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군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독려한 춘원이아, 타쯔시로 시즈오로 이름을 바꾸고 카미카제 같은 전쟁범죄를
찬양하며 조선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한 미당 서정주(1915~2000) 등등의 민족지도자들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만해의 시가 오늘까지 살아있지 아니하면,
일본 식민지강점시대의 암울한 저류를 흐르던 우리민족의 정의감이 그 좌표를 잃고 증발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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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전투력에
트라우마가 있던 일본은 다시 쳐들어와 왔을 때는 그들부터 포섭하려고 했다는구나. 그래서 일제 시대 때
불교에 관대했고 불교계에서도 그런 정책들을 좋게 봤었나 봐. 예를 들어 스님들은 한양 도성 내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풀어주는 것들 말이야. 하지만
만해 한용운은 끝까지 호국불교의 자존심을 지키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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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7)
20세기 일제강점이라는 사건은
메이지시대의 권력다툼의 분규 속에서 태동한 사쯔마 계열의 정한론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결국 알고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이 재현일 수도 있다. 그 망상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남김없이 섬멸하기 위하여 이순신은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 땅에서 최후 일 척까지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임란의 의병의 활약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력이 출중한 부대가 승병조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님들은 철학이 있었고 호국불교의 사명이 있었고, 무술에
능한 자가 많았고, 조직적 전투력이 있었다. 명령계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기네 불교와는 달리 대처가 아닌 비구의 순결한 전통을
지니고 있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역(易)이 말하는 바, 이간(易簡)스러웠다는
것이다. 일본침략자들에게 승병은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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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해 한용운 님의 아홉 살 때
신동들이 뗀다고 하는 사서삼경을 읽은 것이 아니고 <서상기>라고
하는 찐하면서도 진보적인 성향의 애정소설을 읽었다고 하는구나. 그런 것들이 그의 감성 세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했어. 만해 한용운은 두 번의 출가 끝에 1905년 1월 26일 백담사에서 정식 스님이 되었다고 했어. 그 당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라는 사회진화학으로 분류되는 책을 읽었는데, 그것이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했어.
백담사에서 스님 생활을 시작한
한용운은 이후 금강산과 거봉산에서 수련을 하였고, 일본 유학도 갔으나 중도 하차하고 돌아오셔서 조선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조선불교유신론>을 1910년에 쓰셨단다. 이 책에서 대처승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어
논란도 있었으나 불교를 널리 퍼지게 하는 방안으로 제시했던 것이고 그 책의 핵심은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어.
1914년에는 <불교대전>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해 팔만대장경을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하는구나.
1915년에는 다시 백담사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2년 전 화재로 올 수 없어서 오세암으로
가셨대.
….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끝이 나고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중국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그
소식을 알고 여운형은 중국에 가서 크레인을 만났단다. 조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승전국이 지배한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논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대. 그래도 크레인은 어떤 형식으로 도움은 주겠다고 했어.
이 말에 여운형은 신한청년단
멤버들을 소집하여 탄원서를 작성했다는구나. 그 탄원서를 크레인에게 전달하였고, 윌슨 대통령에까지 전달되었대. 하지만 승전국들도 결국은 모두 제국주의
국가들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약소국의 독립 보장은 패전국에 지배당한 국가들에 제한되어 있었어. 그런 사실을 모른 우리나라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맞춰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이었던 거야.
한용운도 불교계를 대표해서 3.1운동에 참가하였고, 그
일로 약 3년간 투옥되었어. (1919.3.1~1921.12.22)
감옥에서 <조선도립의 서>라는 글을 썼고, 이 글은 독립신문에 실리면서 유명해지게 되었대. 감옥에서 출소하고
나서 서울 선학원에 잠시 있다가 다시 오세암으로 가셨대. 1925년
6월 7일 <십현담 주해>라는 책을 쓰고, 1925년
8월 29일 드디어 그 유명한 <님의 침묵> 시집을 출간하셨어. <님의 침묵>에는 모두 88편의 시가 실려 있단다. 88편의 시 중에 가장 유명한 시가 시집의 제목으로 뽑은 <님의
침묵>이란다. <님의 침묵>이라는 시뿐만 아니라 시집에 실린 많은 시에서 ‘님’과 ‘당신’ 등의 말이
나오는데 ‘님’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의
의견이 분분했다고 했어. 이 시를 쓴 시기하며 한용운이 그 전까지 걸었던 삶의 행적을 보았을 때 ‘님’은 우리나라라는 것을 누구나 알 텐데, 고의로 ‘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국소적인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구나. 친일파를 뉴라이트라고 포장해서 부르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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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이 첫 구절을 읽고 더욱이 1925년 만해가
이 시를 쓰던 시점에서 읽고, 3.1만세혁명을 떠올리지 아니하는 자는 천치바보이거나 위선자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만을 여기다 덧붙이면서 순수문학을 운운하는 자도 무뎌빠진 감상론자, 아니면 뉴라이트의 근대화론의 정당화를 위해 애쓰는 자들의 도피처가 될 것이다.
물론 만해의 시가 위대하고 옹혼한 까닭은 개인의 사랑의 테마와 조국의 운명 혹은 코스믹한 해탈의 테마가 항상 병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님은 갔습니다”의
최초의 인상이나 최종적 의미는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환상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민족의 독립이 가능하리라 믿고 목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민중적 좌절감의 절규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조국은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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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 속의 ‘첫 키스’라는 말은 3.1만세혁명이라고
이해하면 되고, ‘새로운 슬픔’은 역사의 단절과 민족혼의
좌절로 해석하면 된다고 했어.
…
지은이 김용옥 님은 한용운 님의
시를 극찬하면서 비슷한 시기의 다른 시들도 평가를 했었어. 최초의 신체시하고 하여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는 형편
없는 시라고 하면서 그런 형편 없는 시에 최초의 신체시라고 타이틀을 붙여주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강하게 비판했어.,
그리고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 역시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단다.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로 써서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타고르 시인… 김용옥 님은 그런 타고르를 다른 시각으로 보았단다. 인도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국에서 유학을 했고, 영어도 유창하여 자신의 시를 자신이 직접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대. 그렇게 영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시인이라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 같아.
당시 인도는 영구의 지배를 받는 어려운 시절이었고, 간디는 타고르에게 인도 독립을 위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때가 아니라는 식으로 거절을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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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그러나
타고르는 시종일관 거리를 두었다. 간디의 아이디어를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고 생각했고, 영국으로부터의 인도의 독립만이 장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립보다
인도인의 정신적 개화가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간디를 독립이 곧 인도인의 정신적 해방을 가져오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의 과정에서 인도인들은 근대적 가치를 배우고 구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타고르는 인도인의 기질에 배어있는 선민주의나 비합리성,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고, 아직도 서구에서 배울 것이 많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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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런 타고르가 우리나라에
대한 시를 어떻게 쓰게 된 것인가. 타고르가 일본에 방문하게 되었고,
그에 맞춰 우리나라 동아일보 기자가 일본에 찾아가 우리나라에도 방문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대. 하지만
거절 당하고 우리나라에 대해 짧게 시 한 편을 적어서 준 것이 바로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라고 하는구나. 김용옥 님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 상태에서
안전빵으로 쓴 시라고 하는구나. 김용옥 님이 타고르 시인을 이렇게 평가하니 정이 뚝 떨어지면서 타고르의
시를 읽고 싶은 생각도 뚝 떨어지는구나. 집에 언제는 읽어야지 하면서 타고르의 <기탄잘리>를 사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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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타고르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벵골의 구석에서 자라난 그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정감을 알 리가
만무하다. 그러한 타고르에게 민족의 구원을 기대는 예언자적 시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타고르는 근원적으로 픽션이다. 그가 쓴 등불시는 타고르와 간디의
사상적 대결을 연상시킨다. 타고르는 모르는 상대로부터 시를 부탁 받았기 때문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최대한 부딪힘 없이, 최대한 안전빵의 시를 쓴 것이다. 그러한 허구가 조선역사 정취의 1세기를 장악하였다면 우리의 한 세기
그 자체가 허구가 아니겠는가? 내 말이 너무도 혹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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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 한용운의 시가 타고르의
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었나 봐. 지은이 김용옥 님은 그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주시면서
만해 한용운의 시가 더 탁월하다면서 대학원과 초딩 만큼 차이가 난다고 했어.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집의
71번째 시의 제목은 <타골의 시를 읽고>라고
있다는 하는구나. 그 시를 통해 만해 한용운은 타고르의 시는 현실 떠나 이상을 노래한다고 평가를 했다는구나. 그 시를 읽어 보면 한용운은 타고르의 시를 좋게 평가한 것 같지는 않구나. 아래는
오타처럼 보이는 것이 몇 개 있는데, 오타가 아니라 초판본에 실려 있는 시 그대로 발췌해서 그런 것이란다. 옛날에는 저렇게 쓰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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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374)
<타골의 시 <GARDENISTO>를
읽고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최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모치는 백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랴고 떨어진 꼿을 줏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줏은 꼿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꼿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읍니다.
눈물을 떨어진 꼿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서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모리 좋다 하야도 백골의 입설에 입맞출 수는 없읍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서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서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겄읍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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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권의 이야기란다. 이번 책은 제법 어렵지 않고 잘 읽히는 것 같아 더 좋았단다.^^ 2권의 이야기도 조만간 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이 시대가 만해를 부릅니다.
책의 끝 문장: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모든 논의를 리얼하고 신실하게 만드는 것은 만해의 삶의 지조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혁명에 투신하였고, 지고의 선의 경지를 증득하였고, 시인으로서 고매한 언어를 구사하였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변절, 배신의 족적만 남겨도 위에 그린 삼각형들은 다 부서져 버린다. 멀리 산속으로 도망가 숨어 살면서 절개를 지키는 것은 혹 가할지 모르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살면서 호통을 치면서 당당한 지조와 타협 없는 절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면 그 경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지훈은 만해의 절개가 그의 삶의 업적을 빛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진주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서상기>에서는 최초의 무산지몽(巫山之夢)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도 남자중심의 기술이 아니라 여자의 주체적인 선택을 나타내고 있다. 여자는 더 이상 남자에게 "따멕히는" 존재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보다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다. 앵앵은 여러가지 방편을 통해 장생을 시험한다. 그의 상사병이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위태로운 증세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이불과 베개를 먼저 보내고 장생이 누워있는 서상(西廂, 큰 건물의 서쪽 회랑)으로 나아간다. 앵앵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모든 것을 비우는 듯한 극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 자태는 곡패 "원화령(元和令)"의 운을 밟는 시로써 표현되고 있다. - P176
조선불교유신의 개혁을 꿈꾸고, 또 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8만대장경을 재편집하는 웅장한 작업을 하였어도 그것은 문자의 장난이었지, 자기가 추구하던 진정한 존재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했다. 존재의 자유는 생활의 자유로 표현되지만, 생활의 자유는 내면의 정신적 자유가 달성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적 자유는 스스로를 속박한 자박(自縛)의 상태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해방의 소리를 해풍 속에 쓸려가 떨어지는 잡물의 추락성 속에서 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객수(客愁)의 어설픈 고뇌가 사라지고 나 만해는 삼천계를 향하여 할파하노라! 백설(白雪)과 도화(桃花)의 편편은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주의 실상일 때는 시공의 분별심을 초월하는 것이다. 복사꽃의 붉음이 흩날리는 백설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야말로 객수(客愁)가 사라진 고향의 모습이리라. 그것은 존재의 자유인 동시에 기나긴 방황을 거친 자기 삶의 족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 P236
조선왕조 전체를 개관할 때, 한글이 언문이라 하여 비하된 듯하나 그 실용적 가치는 꾸준히 증가되었으며, 세종의 창제동기를 충분히 실현되어 갔다고 볼 수가 있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여과없이 글에 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방대한 한글자료들이 방치된 채 연구되고 있지 아니한 것이 현금의 정황이다. 백성이 권력기관에 항의하는 괘서들이 한글로 쓰인 예가 많았다 하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로 한글의 사용은 급증하였다고 한다. 왜놈들이 읽지 못하는 암호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광해군 이후로 왕후들이 청정(聽政)이 많았던 까닭에, 한글정치라고 말할 정도로 국정문서에 한글이 많이 등장하였다. (김일근 <언간(諺簡)의 연구(硏究)>, 건국대학교출판부, p.330)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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