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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2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ㅣ 강신주의 장자수업 2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읽은 <강신주의 장자수업> 1권에 이어서 오늘은 2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게. 장자에 관한 책을 읽을수록 늘 느끼는
거지만, 장자는 일반적인 관념을 깨는 그런 사람인 것 같더구나. 보통
동양 철학자 중에 맹자를 혁명가에 어울린다고들 하는데, 장자의 사상 또한 관념과 상식을 깨는 측면에서
봤을 때 혁명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1권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누가 쓸모 없음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겠니. 2권에서도 그렇게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생각하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장자의 사상들이
계속 나온단다. 아빠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자꾸 잊혀져서 문제지만 말이야
…
장자의 이야기 속에 장자는 장자로
나오는 언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장주라고 하는 경우도 있단다. 장주는
장자의 본명이야. 장자(莊子)에서 ‘자(子)’는 공자, 맹자, 노자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장자는 ‘장
선생님’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돼.
..
우리가 한 곳에 정신을 팔리면
자신을 잊는 경우가 있단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경험할 수 있지. 재미있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옆에서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잖니. 우리가 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 하면 그 위험이 그대로 닥칠 수가 있어. 이런 점을 경계하는
글이 장자의 ‘조릉 이야기’에서 나온단다. 그늘에 정신 팔린 매미를 사마귀가 노리고 있고, 매미에 정신 팔린
사마귀를 까치가 노리고 있고, 까치에 정신 팔린 사마귀를 장주가 노리고 있는 상황이란다. 그렇다면 정신 팔린 장주를 노리는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장주는 이내 정신을 차리게 되는 거지. 역시나 까치를 쫓아 경계선을 넘어 온 자신을 보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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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0)
장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드러난 것을 지키며 나 자신을 잊으려 했고,
혼탁한 물을 보며 맑은 연못에 매료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그 사회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조릉에서 노닐 때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 기이한
까치가 이마를 스치고 날아들었을 때 나는 밤나무 숲에서 노닐며 나의 실제상황을 잊었다. 아니나 다를까, 밤나무 숲을 지키던 사냥터 관리인은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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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빠가 얼마 전부터 사진 찍는
것을 꺼려하게 되더구나. 언제 생겼는지 모를 주름과 흰 머리. 낯선
아빠의 모습. 그러면서 떠오르는 젊은 시절의 얼굴. 아빠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 책에서 아빠에게 가르침을 주는구나. 사라진 젊음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지나가고 사라진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삶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젊음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지금 중년의 삶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이야. 세상에는
없음은 없고, 오직 있음만 있다고… 생각의 차이로구나. 그 문구를 읽고 나서 가끔씩 셀카를 찍어본단다. 음, 아직 괜찮군.. 하면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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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건들과 제대로 관계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겁니다. 자신감을 상실한 그는 집 밖으로 나가기를 피할 테니까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없습니다.
50대 중년은 20대의 젊음에 집착하느라 ‘지금
여기(now & here)’ 50대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겁니다.<대종사> 편의 현해 이야기가 이 중년에게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없는 것은 없고 오직 있음만 있다는 걸 가르쳐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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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는
늙음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또 있는데 ‘맹손재 이야기’에서도
늙음과 죽음을 다루고 있단다. 여기서는 늙음을 젊음의 부재로, 죽음을
삶의 부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이야기한단다. 늙음을 젊음의 부재가 아닌 늙음 그 자체로
생각하라고, 유목민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므로 집에 소유와 정착이라는 개념이 없단다.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저곳에서 생활하고… 젊음과 늙음 또한 마찬가지라는
거야. 잠깐 젊음이라는 집에서 생활하다가 늙음이라는 집에서 생활하는 거지. 죽음 또한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음이라는 집이라는 거야. 장자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가 않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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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젊은
내가 나이고, 사지가 멀쩡한 내가 나이고, 살아 있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장자가 말한 헛된 꿈입니다. 이런 자의식은 늙음을 젊음의 부재로, 불구가 정상의 부재로, 죽음을 삶의 부재로 느끼게 됩니다. 늙음은 늙음으로, 불구는 불구로,
그리고 죽음은 죽음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물론 젊음을 늙음의 부재로, 정상을 불구의 부재로, 삶을 죽음의 부재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젊음은 젊음으로, 정상은 정상으로,
삶은 삶으로 긍정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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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장자는 자신의 장례식도 유목민처럼 풍장(風葬)으로 지내라고 했단다. 제자들이 까마귀가 선생님을 쪼아먹을까 두렵다
하니, 제자들이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할 말씀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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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장자가
곧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은 장례를 후하게 치르려고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해와 달을 한쌍의
옥으로, 별들을 다양한 구슬로, 그리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생각하고 있네. 내 장례용품에 어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려 하는가!”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는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쪼아 먹을까 두렵기만 합니다.”
장자가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되는 것이네. 그런데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를 빼앗아 땅강아지나 개미에
주려고 허니, 어찌 이렇게도 편파적인가!” <열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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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유명한 것 중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이야기가 있단다. 수레가 지나가는데 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를 상대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강한 상대에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을 이 한자성어로 빗대어 말하곤 한단다. 그런데 아빠는 그 거대한
수레의 맞짱 뜨는 사마귀의 용기에도 박수를 한번 보내주고 싶구나. 무모하지만 도전하는 자세, 나쁘지 않다고… 지은이 강신주는 장자 또한 사마귀였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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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어쩌면
장자도 수레와 맞서던 사마귀였는지도 모릅니다. 폭주하는 전거와 그것이 남긴 바퀴 자국 바깥에 거대한
초원과 우거진 산림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장자는 대붕이 됩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위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여유와 당당함으로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국가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고, 폭풍우나 산불 혹은 맹금 정도로
보아야 합니다. 천하로 상징되는 국가 질서쯤은 가볍게 날아 넘어가는 대붕의 길입니다. 바퀴 자국에도 잠시 머물고, 수레 위에도 잠시 머물고,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어딘가에도 머물 수 있는 대붕입니다. 수레에
잠시 날아든 대붕은 타인을 자유롭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저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며 그들이
자유를 결단하기를 바랄 뿐! 잠시 뒤 대붕은 그 광막한 초원으로 바람만 남긴 채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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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에서도 여러 달인들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2권에서도 <재경 이야기>에
달인 목수 재경이 등장한단다. 악기받침대를 단순히 악기만 잘 받쳐주면 되지만, 재경이 만든 악기받침대는 예술이 되어 악기보다 더 주목을 받는단다. 재경이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나무라는 대상과 재경 사이에 아무런 간섭 없이 하나가 되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하는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둘
사이에 아무 간섭 없이 둘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이 또한 공감 가는 이야기로구나.
…
장자가 속세를 떠나 살았다고
하지만, 그를 등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란다. 초나라
군주가 장자를 등용하려고 한 적이 있어. 장자는 무작정 거절한 것이 아니고, 거북이의 예를 들어 초나라 군주가 다시 제안하지 못하게 했더구나. 거북이가
화려한 비단보에 싸여 화려한 방 안과 진흙탕 속 중에 어디서 살고 싶겠냐고 하면서 말이야. 장자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 어떤 체제에 들어온다면, 병이 생기지 않을까 싶구나.
새는 가두지 않는 법. 더욱이 장자는 엄청나게 큰 대붕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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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장자가 복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초나라 왕은 두 사람의 대부(大夫)를 먼저 보내 그에게 말을 전했다. ‘국가 안의 모든 일을 선생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쥐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초나라에 죽은 지 이미 3000년이나 된 신령한 거북이 있는데, 왕이 이것을 상자에 넣고 비단보에 싸서 묘당(廟堂) 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내가 들었습니다.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게 되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했을까요?’ 두 사람의 대부는 말했다.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했을 테지요.’ 장자가 말했다. ‘그만 돌아가시오! 나는 앞으로도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닐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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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에
나오는 또 유명한 한자성어 중에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있단다. 원숭이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나면서 난리를 쳤고, 그래서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군말 없이 좋다고 했다는 일화를
통해 보통 우둔한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란다. 그런데 지은이 강신주 님은 2000년 넘게 사람들이 조삼모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하시더구나. 이
일화는 주인이 원숭이들을 사랑해서 부족해진 식량에 대한 배분에 대한 고민이 담긴 이야기라고 했어. 주인의
마음대로 음식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고 원숭이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배분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상대방
또는 아랫사람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소통의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앞으로 조삼모사라는 한자성어는 소통을 잘 하는 사람에게 써야 하나?
먼저 이 이야기를 잘 설명해서 상대방이 기분상하지 않겠구나.
….
아빠가 생각하기에 <장자>의 이야기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호접몽(胡蝶夢)’이라고
하는 나비의 꿈이 아닌가 싶구나. 나비의 꿈을 꾸고 나서, 문득
혹시 지금의 이 생활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야. 오래 전에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말이야. 우리의 삶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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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옛날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장주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物化)’고
말한다.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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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장자 이야기에 대해서
해보았는데, 장자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유란다. 자유라는 것이 지금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떠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는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는 것도 자유란다. 사실 아빠도 머무는 자유가 더 좋긴 하구나. 그래도 가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도 있고 말이야. 유목민처럼
머물고 싶을 때 머물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그런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지은이 강신주 님이 말씀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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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366)
떠날
수 있는 힘! 장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자유의 소중한 의미입니다. 국가에서도,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마저 우리는 떠날 수 있습니다. 떠나면 불행할 것 같고, 떠나면 살지 못할 것 같고, 떠나면 외로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떠나본 적 없는 불행한 영혼들의 착각입니다. 떠나서
행복할 수 있고, 떠나서 살 수 있고, 떠나서 새로운 누군가와
든든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강박적으로 떠나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떠날
수도 있지만 머무는 것도 진정한 자유의 또 다른 의미니까요. 그래서 자유인의 머물기는 가치가 있는 겁니다. 억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머물고 싶어서 머무는 것이니까요. 자유롭게
떠나고 자유롭게 머뭅니다. 그래서 자유인의 거동은 여러모로 유목민과 유사합니다. 유목민이 어딘가를 떠났다면 그는 그곳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가 어느 곳에 머물고 있다면 그곳의 풀들이, 바람들이, 물들이, 구름들이, 그리고 석양의 장관이 그를 행복하게 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일 수 있는 곳, 자신에게 충만한 삶의 뿌듯함을
안겨주는 곳에서 자유인은 머물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체의 불만과 투정도 없이 그냥 쿨하게 떠나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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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장자수업 끝.
PS,
책의 첫 문장: 내가 누군가 ‘귀가
밝다’고 말한 것은 그가 ‘특정한 저것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의 끝 문장: 개골개골!
불교에서 인간은 부처를 숭배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부처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가르침, 종교로서는 정말 개운치 않은 종교가 불교입니다. 분명한 것은, 승려들에게 복이 있으려면 중생들은 부처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중생들이 사찰을 찾아 시주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면 붕괴되는 종교! 탄생할 때부터 그 내부에 시한폭탄을 장착했던 종교! 그것이 불교입니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는 긴박감 때문인지, 종교성과 함께하는 불교의 인문성은 더 극적인 데가 있습니다. - P15
공수가 선을 그리면 양각기와 곱자에 부합했고, 그의 손가락은 사물에 따라 변할 뿐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영재(靈臺)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막혀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발을 잊는 것은 신발에 딱 맞은 것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에 딱 맞는 것이다. 앎에서 옳고 그름을 잊는 것은 마음에 딱 맞는 것이고, 내면의 변화도 없고 외부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마주친 사태에 딱 맞는 것이다. 처음으로 딱 맞았지만 일찍이 딱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것은 딱 맞음의 잊음에 딱 맞는 것이다. <달생> - P85
장자에게 ‘허(虛)’, ‘상(喪)’, 혹은 ‘망(忘)’ 등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세 개념은 모두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음을 잊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를 제외하고 동서양 사유의 전통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주장입니다. - P87
예(羿)는 아주 작은 표적이라도 활로 맞추는 데 능숙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찬양하지 않도록 하는 데는 서툴렀다. 성인은 ‘자연적인 것(天)’에 능숙했지만, ‘인위적인 것(人)’에는 서툴다. 자연적인 것에도 능숙하고 인위적인 것에도 잘 대처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인간(全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오직 벌레만이 벌레일 수 있고, 오직 벌레여야 자연적일 수 있다. 완전한 인간은 자연적인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연적이라고 여기는 것도 싫어하는데, ‘나는 자연적인가? 아니면 인위적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상초> - P203
젊은 내가 나이고, 사지가 멀쩡한 내가 나이고, 살아 있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장자가 말한 헛된 꿈입니다. 이런 자의식은 늙음을 젊음의 부재로, 불구가 정상의 부재로, 죽음을 삶의 부재로 느끼게 됩니다. 늙음은 늙음으로, 불구는 불구로, 그리고 죽음은 죽음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물론 젊음을 늙음의 부재로, 정상을 불구의 부재로, 삶을 죽음의 부재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젊음은 젊음으로, 정상은 정상으로, 삶은 삶으로 긍정해야 하니까요. - P229
<제물론>편 여희 이야기에서 장자는 "단지 크게 깨어날 때만, 우리는 큰 꿈을 꾸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장자꿈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날, 애틋함과 아련함이 교차하는 작은 느낌마저 상쾌한 바람으로 씻어보는 날입니다. 안녕! 장자! "지금까지 나는 장자가 된 꿈을 꾸었다. 자유롭게 당당한 장자였고 스스로 유쾌하고 기분이 좋았기에 자신이 나라는 걸 알지도 못했다. 갑자기 깨어나니 분명히 나였다. 내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장자가 내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장자 사이에는 반드시 구분이 있다. 이것을 ‘타자와 함께 변화한다’고 말한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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