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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10권 - 창씨개명에서 8.15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드디어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마지막 10권이구나. 10권을 쭉 읽었다면 더 몰입하고, 실제 그 시절을 사는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아빠가 이번에 읽은
것처럼 가끔씩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단다. 기억이 잊혀질 만할 때 다음 이야기를 읽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10권의 부제는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란다. 창씨개명은
일제 말기 1940년대에게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내세운 정책이란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로 바꾸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단다. 그리고 여러 신문사들이 강제
폐간되었는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이때 폐간되었단다. 조선일보는
이때 폐간된 것을 두고, 후에 자신들은 친일 신문이 아니고 민족지라고 주장하였는데, 뻔뻔한 변명이 아닐 수 없구나. 보다 못한 한겨레 신문이 팩트 폭격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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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에 <한겨레>는 <조선일보>를 지목해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적지 않은 돈일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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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가 길어지면서, 독립운동도 침체기를 겪었단다.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충칭에 자리를 잡았어. 그 동안 문제가 되었던 독립운동의 좌우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좌우합작노력도
진행되었단다. 그래서 김원봉이 이끈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기도 했어. 그래, 이념 싸움은 나중에 나라를 되찾은 다음에 하고, 일단 하나로 뭉쳐야지.
당시 한국광복군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단다. 군비가 부족하여 제대로 운영을 할 수가 없었어. 미주
동포들이 돈을 보내주었지만, 역부족이었어. 중국은 지원을
해주되 통수권을 요구해서 독립군을 화내게 했지만, 결국 군비 문제 때문에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중국에
넘겨주었단다. 하지만 중국도 광복군을 제대로 운영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임시정부는 다시 지휘권을 돌려달라고
했단다.
1.
일본은 그냥 땅만 점령한 것이
아닌, 온갖 만행을 저질렀단다. 그 중에 731부대의 생체 실험은 너무 잔인한 것이란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을 이용하여 이것저것 실험을 한 것이란다. 학창 시절 엄청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일본군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무서우면서 놀랬던 기억이 있구나. 사람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들을 버젓이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생체 실험을 주도했던 이들이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이것에는 미국도 큰 책임이 있단다. 미국은 생체실험 자료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그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했대. 하기야, 미국이
늘 겉으로는 평화를 위하는 것 같지만, 늘 자국의 이익이 제1순위인
나라 아니던가. 그들 또한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만행들이 한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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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4)
영국 BBC가 2002년 3월
방송한 화제작으로 이 부대원들의 생생한 증언과 생체실험을 겪은 중국 현지 피해자들의 소송준비과정 등을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경악할 만한 부분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비견될 가공할 전쟁범죄를 저지른 731부대
요인들이 나치와는 달리 아직도 일본 정계 및 보건 의료계에서 버젓이 핵심세력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고바야시
로쿠조(일본 국립 방역연구소 소장), 나카구로 히데토시(국방의학대학 총장), 나이토 료이치(녹십자
회장), 기타노 마사지(녹십자 대표이사), 가수가 추이치(트리오-켄우드
회장), 요시무라 히사토(교토 의학대학 총장), 야마나카 모토키(오사카대 의과대학 총장), 오카마토 코조(교토대 의과대학 학장), 다나카 히데오(오사카대 의과대학 학장) 등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부대에 남아 있던 포로들을 학살하고 실험용 쥐를 풀어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미국이 탐내던 실험 관련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을
면책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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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731부대뿐만 아니라 일본 감옥 안에서도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단다. 일본
감옥에서 자행된 생체 실험으로 돌아가신 분들 중에 윤동주 시인도 있단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나. 그리고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로 전향하는 와중에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했단 시인 이육사 님도
끝내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셨단다.
…
일본의 무모한 제국주의 욕심을
끝을 몰랐어. 세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식민지에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에, 일본은
아시아 여기저기를 점령했단다. 일본의 이런 확대에 미국의 신경이 거슬리게 되었고, 미국은 일본에 수출하던 석유에 제동을 걸었어. 그러자 일본은 미국을
기습 공격했단다. 1941년 12월 7일에 있었던 진주만 기습이었어. 일본의 예상치 못한 공격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국은 약 2달간 열세를 보였고, 일본의 승전보는
이어졌단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승기를 미국이 잡아갔단다.
일본이 아시아 이곳 저곳에서
전쟁을 하고, 미국과도 전면전을 하다 보니, 군수 물품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어. 곡식과 각종 금속을 강제로 훔쳐갔고, 사람들도
강제로 잡아가 일을 시켰단다. 1939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약 730만명이 강제로 끌려가 노동과 전쟁에 참가를 했다는구나.
정말 가슴 아픈 역사로구나. 더욱이 일본을 위해 싸우는 학도병 모집에 국내 지식인들이 앞다투었다고
하니 더 화가 나는구나. 그 지식인들 중에는 글을 쓰던 문인들이 많았는데, 타고난 글솜씨로 우리 젊은이들을 현혹했을 생각을 하면, 그들에게
그냥 친일파 딱지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다 처벌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리고 종군위안부가 있었단다. 이것은 731부대의 생체실험만큼 잔인한 짓이었단다.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전쟁터로 보낸 것이란다. 군인들을
위한 종군위안부로… 그때 끌려가신 분이 약 20만명이라고
하는구나. 이 문제는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음으로써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란다. 각종 국제 단체 등에서 사과하라고 압력을 가하니 마지못해 일본 정부는 사과를 했는데, 희한하게도 피해 국가인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미국에게 사과를 했다는구나. 별
그지 같은… 당시 위안부를 강제 연행한 일본 사람의 고백을 일본 정부는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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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68)
전쟁
당시 일본 야무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지는 “나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6,000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살~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겨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 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로 보내졌다. 종군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 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 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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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이 벌인 많은 전쟁들.. 뱁새가 다리 찢어진 격이라고 할까. 일본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단다.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을 시작했단다. 오키나와
상륙 작전으로 일본 본토에 거점기지를 만들었어. 그런데 이때 일본 민간인들의 알 수 없는 행동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많은 민간인들이 미국이 점령하자, 가족들이 서로
죽이고 자살하는 일들이 벌어졌구나. 일본군이 다른 점령지에서 한 짓을 알고, 자신들도 그렇게 될까 봐 그랬던 것일까.
…
강대국들은 전쟁 이후의 일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단다.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들이 이어졌어. 얄타회담은 1945년 2월 8일부터 8일간 미국, 영국, 소련이 모여서 논의를 했는데,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되, 신탁 통치를 해야 한다고 논의했다고 하는구나. 연합국이 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가지고 오면서, 1945년 4월 28일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잡혀 처형 당했고, 1945년 4월 30일에는
숨어 있던 독일 히틀러가 자살을 했단다.
그렇게 유럽은 전쟁이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고, 추축국 중에 이제 일본만 남았어. 일본이
무너지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 미국, 영국, 소련은 1945년 7월 22일 포츠담 회담을 열어 다시 한번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준다고 했단다. 일본의
마지막은 잔인한 한방이 기다리고 있었단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한 비밀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단다. 작년에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되면서 많은 사람이 알게 된 맨하튼 프로젝트로 만든 핵무기. 유럽이
이미 전쟁이 끝났고, 개발이 완료된 핵무기를 사용할 곳은 일본뿐이었단다. 1945년 8월 6일은
히로시마에, 8월 9일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길고 길었던 전쟁도 끝났고, 그보다 더 길고 길었던 일제 강점기도 끝이 났단다.
그런데 이 핵폭탄에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아무런 죄 없이 끌려간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있었단다. 그 수가 4~5만 명이라고 하니 적지 않구나. 예전에 다른 책에서 핵무기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나라가 일본이고, 두 번째가 우리나라라는 것을 본 적이 있단다. 일본에 끌려가 죽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음이 또한 가슴 아프구나.
…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전범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이를 주도했던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 재판을 대충 했단다. 그런데 미처 몰랐던 사실 하나. 조선인으로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포로 감시원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있었대. 일본의 적군이 보면 이들 또한 자신들의 적이잖아. 그래서 이들이 해방이 된 후 전범으로 낙인 찍혀 사형되었다고 하는구나.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 정부가 강제로 하라는 일을 했을 뿐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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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전후
연합군의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 C급 전범
5,700여 명 가운데는 조선인 148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 대부분(129명)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포로감시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일본 육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붙잡은 26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는 점과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지원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조선인들 중 129명이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범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은 겨우 7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높았던 일본 헌병의 처리 비율(4.3퍼센트)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시 노부스케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 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 책임은 불문에 붙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재판은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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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동안 수많은 억울한
사연을 갖고 운명을 달리 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넋들이 여전히 일본 땅 전역에 떠돌고 계실 것 같구나.
…
자, 이렇게 10권의 이야기를 해보았어.
결국에는 해방이 되었지만, 그 해방이 되는 과정이 괴로움의 연속이었구나. 그리고 만주 땅에서 일본에 맞서 싸워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던 광복군에 의한 해방이 아닌, 미국의 힘에 의한 해방이라서, 또 다른 시련들이 앞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해방이 되자마자 일본이 분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국이자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했던 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는가. 당시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다 보니 그런 결정을
한 것인데, 80년 가까이 그 분단이 이어지고 있으니, 당시의
결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도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지려나.
….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을 읽으면서 이 시절을 소설로 이야기한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과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가 생각났단다. 이
책들을 오래 전에 읽긴 했는데, 다시 한번 읽으면서 <한국
근대사 산책>을 소설로 복습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올해 독서계획으로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을
포함시켰단다. 그리고 주말마다 열심히 읽고 있는데, 이것도
곧 이야기해줄게.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39년 8월 23일 소련 모스크바에서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밀약이 이루어졌다.
책의 끝 문장: 일제 36년의
유산이 ‘잔재’의 수준을 넘어선 ‘현재를 재생산하는 실질적 원리’로 기능하는 걸 재평가하고 성찰해보면서
사회의 운영 원리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보는 건 어떨까?
1942년 작성된 임시정부의 내부보고서는 "미주 동포들이 보내주는 월 1,050달러의 지원금만으로는 300여 명으로 불어난 인원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간 줄곧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해온 중국 측은 한편으로는 재정지원 등을 내걸고 다른 쪽에서는 병사모집을 하는 광복군 지휘관에게 통행증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1942년 4월 임시정부는 광복군 통수권을 중국 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측도 광복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이 못 되자, 1943년 2월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군 지휘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중국 측에 하기에 이르렀다. - P53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3년 6월경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을 알고, 장제스에게 접근했다.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한국 요인 6명을 비밀리에 공관으로 초빙했다. 참석자는 김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원봉, 그리고 통역으로 참석한 안원생(안중근의 조카)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바로 이 약속이 카이로회담에서 이행된 것이다. - P149
역설이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위한 희생자에 대한 예우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단일인종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정반대다. 그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이다. 이름이 높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 만한 계기가 있으면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누가 너더러 그렇게 하랬어?"라는 식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극’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P163
일본에 대해 너그럽고 싶은가? 한국의 반일감정을 경멸하고 싶은가? 역사를 알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혹 오다가다 들은 게 있더라도 곧 잊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다. 물론 오늘의 일본인은 가족끼리 때려죽인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책임만 없는 것일 뿐, 일본 정부와 우익의 교과서 왜곡에 침묵한다면 스스로 간접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적 삶에선 지구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선량한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양심회복운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다. - P200
그러나 그 어느 쪽이건 한국이 미소 두 강대국이 그들 마음대로 갖고 노는 장난감과도 같은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작 분단되어야 할 나라는 전범국가인 일본이었건만,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이 분단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38도선에서의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분단 점령은 일본 분단 점령의 대용품이 되고 말았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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