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시베리아 유배형은 여러 가지로 유익했다. 우선 죄수를 이용해서 시베리아라는 광활하고 척박한 땅을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개척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베리아가 러시아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지역이라고 공포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 권력 체제를 비판하는 도스토옙스키 같은 위험인물을 사회에서 격리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정부는 17세기 중반부터 사형보다 시베리아 유배형을 더 애용했다. 이때부터 시베리아는 20세기 러시아 혁명 때까지 유배의 땅으로 각인되었다.


(28)

우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 도시를 건설한 황제인 표트로의 도시라는 의미이며 네 차례에 걸쳐서 이름이 바뀌었는데,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페트르부르크’, 1914년에는 페트로그라드’, 1924년 레닌 사망 후에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최근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에 정작했다.


(67)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침략해 자유민이던 흑인들을 강제로 끌고갔다는 생각은 노예 무역에 관한 가장 큰 오해다. 유럽의 노예 상인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 노예 시장에서 이미 노예 신분으로 팔려 온 흑인을 구매했다. 노예로 농산물이나 공산품처럼 무역으로 거래되었으며, 아프리카에는 노예를 유럽 상인에게 판매하는 상인이 존재해 이들을 주축으로 노예가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대략 7세기부터 <맨스필드 파크>의 배경인 19세기에 이르기까지 9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가 고도로 발달한 노예 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유럽 상인들은 개인 상인에게 노예를 구매하기보다는 노예를 체계적으로 거래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아프리카의 권력자와 거래하기를 원했다.


(84-85)

과거 시험에서 뽑는 인원을 정원(定員)이라고 하는데 식년시의 경우 문과는 33명을, 무과는 28명을 선발했다. 여기서 33명은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 33(), 28명은 밤하늘 별자리 28(宿)에서 유래했다. 보신각종이 아침에는 33번을 저녁에는 28번을 울리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별시는 정원이 따로 없었다. 특히 무과 별시는 전쟁이나 북벌을 이유로 한꺼번에 수천 명을 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무슨 돈으로 한꺼번에 수천 명이나 선발한 무인을 관리로 임용할 수 있었겠는가. 애초부터 별시는 유생과 무인의 사기를 북돋을 목적이었고, 급제자의 수만큼 임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06-107)

역사가들은 왕의 치세와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오직 왕이 돋보이고 빛나야 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대제국을 건설한 왕들이 대개 사자나 신하를 지방에 보내 세금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 지대의 상황과 민심 그리고 이웃 나라의 동태와 같은 정보를 끊임없이 수집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이런 정보는 제국을 유지하고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첩보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심도 많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심심찮게 병사들의 편지를 몰래 읽었다. 또 겉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고 병사들이 나누는 사적인 대화를 엿들으며 속마음과 사기를 파악하려 했다. 요즘으로 치면 개인의 이메일을 들여다보고 통화 내용도 도청한 것이다.


(120)

사람들은 본인이 질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롤랑 바르트가 쓴 <사랑의 단상>을 읽으면 왜 우리가 질투를 부끄러워하는지 알게 된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의 대해 괴로워한다.”


(146)

미합중국의 법은 인쇄물 검열을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두 개의 기관에 부여한다. 이 무서운 권한을 행사하는 기관은 법원이나 경찰이 아니라 세관과 우체국이다. 세관은 불온하다고 판단한 책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지정할 수 있고, 우체국은 운송 자체를 막음으로써 불온한 책의 유통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미국 우체국 직원은 본인의 판단을 근거로 특정 책을 불온서적으로 낙인찍고 운송을 금지할 수 있는 기이한 특권을 가진 셈이다. 우체국의 판단으로 수천 명의 독자를 잃고 파산한 언론사도 있었다. 우체국이 불온한 책이라고 판단하여 발송에서 제외해버리면 신문사는 방법이 없다. 놀랍게도 미국의 우체국은 오늘날에도 이 권한을 행사한다. 여전히 우체국이 불온 문서를 통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149-150)

자신의 원고와 편지를 소멸하고자 했던 카프카는 문단의 대선배인 찰스 디킨스에게 한 수 배웠어야 했다. 디킨스는 미래를 내다보고서 자신의 원고와 편지를 꾸준히 부지런하게 불태웠다. 그는 1860년부터 1870년 죽을 때까지 사적이고 공적인 편지를 모두 태웠다. 평소 외도가 잦았던 디킨스는 사후에 편지가 공개되어 자신의 명성이 훼손될 위험과 자식들이 편지를 출판사에 팔아치울 위험을 모두 염두에 두었다. 디킨스는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원고를 태워서 폐기해 카프카와 달리 자신의 의도와 반해 유고가 출판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다.


(172)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의 관계는 해피 엔딩이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렇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덴바덴에서 여비까지 모두 도박장에 바친 데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이 집세를 올리자 할 수 없이 최후의 보루였던 투르게네프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에게는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덴바덴에서 도박을 쓸 요량으로 투르게네프에게 50루블을 빌리고 갚지 않았는데 투르게네프는 이 일을 잊지 않고 <연기>라는 소설에 100루블을 빌리고선 갚지 않은 채 유유히 바덴바덴을 떠나는 한 배은망덕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인물의 모델이 자신이라고 확신해 <연기>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질세라 <악령>에서 투르게네프를 비꼬고 비판하며 복수를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투르게네프의 친유럽적인 사고를 풍자한 것으로 모자라 그의 성격까지 꼬집어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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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누구나 한번 들어서 파악할 정도로 쉬우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클래식의 주요 소비자였던 18~19세기 유럽 사람들은 남들에게 스스로가 얼마나 고상한지 보여주려고 예술을 활용했습니다. 최근까지도 유럽의 상류층은 음악 취향을 교양의 척도라고 여겼어요. 교육 받지 않은 사람은 듣기 힘들도록 의도적으로 진입 장벽을 높인 거죠.


(23)

관점에 따라 클래식 문화 자체에 그런 예의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귀족들이 음악회에 참석하는 데에는 옷을 자랑하려는 목적도 있었거든요. 성년식 파티에 입고 가기 위해 값비싼 드레스를 하나 장만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런데 그 드레스를 성년식 외에 입을 없다면 너무 아깝지 않겠어요? 새로 장만한 연미복을 입고 칵테일 한잔 기울일 곳도 있었으면 했을 테고요. 음악회, 그중에서도 특히 오페라 공연은 멋진 옷을 입은 상류층의 사교 무대였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식으로 음악회를 대하는 분위기가 남아있죠. 우리에겐 다소 뜬금없을 수 있겠지만요.


(43)

내가 아는 세상의 모든 마법 중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은 음악이다.”

<해리 포터>에서 덤블도어 교수가 한 말입니다. 멋있지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대사라 강의 때마다 소개하고 있답니다.


(54-55)

하지만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진화론의 기초를 마련했던 찰스 다윈은 150여 년 전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죠. 음악을 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 유전자가 음악에 반응하는 거라고요. 이 설명은 지금에 와서는 크게 주목받고 있진 않지만, 경험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나요? 가끔은 말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보다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게 효과적일 때가 있잖아요. 음악만이 전달할 수 있는 진정성이 있으니까요.


(89)

. 피아노를 잘 친다는 건 신체적인 테크닉과 관련이 있습니다. 빨리 칠 수 있는 능력이야 당연하고 음량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하죠. 이게 어려운 이유는 열 손가락에 능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엄지는 힘이 세지만 민첩하지 못하고,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은 특히 힘이 약하죠. 이런 차이를 극복하고 모든 손가락으로 비슷하게 건반을 누를 수 있어야 합니다.


(199-200)

교향곡에서는 D장조와 C장조를 많이 사용했어요. 흔히 D장조는 즐겁고 유쾌하며 호전적이고, 그와 비슷하게 C장조는 밝고 화려하며 진취적인 조라고 얘기합니다. 모차르트 스스로 g단조를 숭고하고 감동적인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에 체념하게 하는 조성이라며 특별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50여 개의 모차르트 교향곡 중에서 g단조로 된 교향곡은 다 두 곡밖에 없지만요. 영화 <아마데우스> 도입부에 나온 <교향곡 25>이 바로 g단조이다.


(218)

여기서 말하는 바리톤은 가수가 아니에요. 보통 바리톤이라고 하면 남성 성악가의 포지션 이름이라고 여기지만, 같은 이름의 금관악기도 있고, 현악기도 있습니다. 하이든이 많이 작곡해야 했던 곡은 현악기 바리톤을 활용한 곡이지요. 첼로처럼 활로 켜는 중심 현들이 있고 옆에 별도로 하프처럼 뜯을 수 있는 현이 부착된 악기인데 아마 본 적 없을 겁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인기가 없어서 잘 연주하지 않거든요. 비슷하게 낮은 음역을 담당하는 현악기로 첼로라는 우수한 악기가 있는데 굳이 바리톤을 사용할 이유가 없죠.


(239-240)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전까지 유행한 악기들과 달리 엄청나게 무거웠어요. 바이올린이나 첼로, 플루트 같은 악기는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할 수 있었지만 피아노는 한번 집에 들여놓으면 다른 데로 옮기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주로 바깥 활동을 하던 남성보다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던 여성이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피아노가 여성의 악기로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연주 자세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피아노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어울리는 얌전한 자세로 연주할 수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켜려면 팔을 높이 들어 휘저어야 해요. 첼로는 두 다리를 벌려야 합니다. 관악기는 숨을 거칠게 몰아쉴 수밖에 없고요. 그에 비해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는 여성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아노 연주는 점점 프랑스어나 바느질처럼 고상한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신부 수업의 필수 코스가 되었습니다.


(296)

오페라 부파는 일종의 코미디극으로, 오페라 세리아와 함께 18세기 중반에 큰 인기를 누린 오페라의 장르입니다. 오페라 세리아가 영웅의 이야기나 신화에 나오는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면 그와 반대로 오페라 부파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을 풀어냅니다. 나폴리에서 시작된 오페라 부파에는 우스꽝스러운 재밋거리를 즐기는 나폴리 지역 하층민의 취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본에 나폴리 방언이 많이 나오고 음악은 언제나 가볍고 흥겹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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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그러나 눈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감각기관이어서 사람에 따라 똑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로 그 똑 같은 뜨거운 땅이 데이비드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개, 해면동물, 해초들로 반짝거리며 환영의 손짓을 보냈다. 학생들이 안면을 트고, 서로 추파를 던지고, 길게 늘어선 침대 중 자기 자리를 고르는 동안, 데이비드는 슬그머니 해변으로 내려가 평생 처음으로 소금기 밴 바닷물에 손가락을 담갔다. 까맣고 부드러운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이어서 녹색을 띤 돌을 집어 들었다가 하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평생 그를 따라다닐 다급한 마음이 흘러넘쳤다.


(57)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76)

그건 그렇고, 데이비드는 다윈이 신을 없애버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추구는 여전히 고귀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자연의 사다리의 형태, 그러니까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지위가 정해져 있는지를 드러내줄 가장 높은 청사진에 대한 추적을 계속 이어갔다. 다만 이제는 그 질서를 만드는 것이 신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믿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그 청사진은 여전히 가장 결정적이고 많은 것을 알려줄 비밀들을 품고 있을 터였다. 데이비드는 물고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상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진짜 창조 이야기, 인간을 만드는 데 어떤 생명의 실험들이 필요한지를 알아내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일은 다른 생물들의 우연한 실수와 성공들 속에 쓰여 있는, 잠재적으로 인류가 더욱더 진보하도록 도와줄 실마리들을 찾는 것이었다. 이는 키를 잡고 있는 창조주의 존재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가시의 사명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93)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132-133)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 지진과 화재가 준 교훈이다. 그가 지은 집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지은 집이지만, 그는 집 밖에서 서 있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도시가 되는 것이다. 도시란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창조한 것들보다 높이 올라가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181)

우생학은 1883년 유명한 박식가이자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만든 단어이다. <종의 기원>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골턴은 사촌의 책을 읽고 깊은 영감을 받아, 그 책을 내 정신 발달 과정의 신기원이라고 불렀다. 지구에서 생물의 배열을 결정하는 자연석택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그는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요컨대 가난, 범죄, 문맹, “정신박약”, 방탕함 등 그가 피와 관련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특징들을 교배함으로써 말이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이 기술을 우생학이라고 불렀다. “좋은출생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조합해 만든 단어다. 그리고 그는 자기-다윈의 사촌인!-말을 들어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얼핏 과학적으로 들리는 유럽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195)

스턴은 한 연구팀과 함께 수년간 그 기록들을 분석했고, “부적합자란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그 범주 안에서 살아갔는지에 관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턴의 글에서 알 수 있듯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 다른 연구들은 과도하게 치우친 비율로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불임화의 표적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초에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2500명 이상을 강제로 불임화했음을 인정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우생학위원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백 명의 흑인 여성들을 찾아내 불임화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1933년과 1968년 사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약 3분의 1이 미국 정부에 의해 불임화되었다.


(226-227)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 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228)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242)

, 만약 당신이 아직도 물고기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과학적으로 타당한 한 집단에 몰아넣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바늘이 있는 폐어들과 실러캔스를 당신 생각에 그들이 당연히 소속된 곳인 물속에 송어와 금붕어와 함께 밀어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범주를 어류라고 부를 수도 있다!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공통 조상을 지닌 모든 후손이 함께 포함될 수 있도록 몇몇 다른 생물들도 어류라는 집단에 집어넣어야 한다.

물가에 걸터앉아 있는 개구리들은 어떨까? 그 개구리들도 발로 차서 같은 물속에 집어넣어라.

저 하늘 높이 나는 새들은? 그 새들도 물에 빠뜨려라.

소들은? 물론 소들도 들어간다.

당신의 엄마는? 당연히 어류다.

어떤가? 그럴듯한가? 그렇지 않다면,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낸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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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우주는 공()이다. 존재에는 실재가 없다.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실재하지 않기에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고, 깨닫지 못한 이들이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 뿐이다.


(333-334)

세계와 자신의 불합치. 어떻게든 이 행성에서 살아갈 이유를 만드는 다른 존재들과 달리 끊임없이 이 행성의 출구를 찾는 존재. 합일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느끼는 고통과 불안. 이해 받을 수 없다는 외로움이 굳어져 만든 마음의 외벽. 동시에 이 세상에 입장해 꼬박 스물네 해를 넘긴 후에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세상과 이 애의 관계였다. 남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애에게도 길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애의 우물은 왜 생겨난 것일까. 유라는 고민했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기야 그 애조차 찾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애초에 유라가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351-352)

저는 언제나 더 넓은 세계를 갈망했습니다. 그 욕망만이 저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머물고 있는 세계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제 욕망은 오로지 그 세계만을 꿈꿨습니다. 제 바람은 언제나 바깥에서 불어왔습니다. 아무리 배를 타고 멀리 나아간다 한들 그 세계에 발붙이고 있는 한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 저는 언제나 괴로웠습니다. 당신은 제 고통을 모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세계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갈 수 없는 그 고통 말입니다. 제 안은 텅 비어 있습니다. 저는 욕망을 좇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은 세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제 그 욕망이 그 세계를 벗어나 더 큰 세계를 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가 오롯이 저에게 고통만 준다면,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387-388)

사고는 순간이다. 잠시 눈을 뗀 사이, 잠시 방심한 사이, 잠시 안심한 사이. 하지만 그것은 사고에 대해 잘 모르는 소리다. 사고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점층적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확률을 좁혀가며 그 순간을 향해 뻗어나간다. 그리하여 지점에 충돌하기 전까지 그 일을 막을 무수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사회가 존재하고 국가가 존재한다. 개인이 사고의 질주를 눈치채지 못하고 막을 수 없을 때, 국가가 대신하여 사고의 확률을 미리 막아야 한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 해 일어난 사고의 횟수로 알 수 있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고 막을 수 있던 숱한 일들이 안일하고 무책임한 사회 곳곳에 넘실거린다. 그러니 사고는 한순간일 수 없다. 사고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차분히 그 지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지도를 보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었던 그 순간,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그 남자가 이인의 눈에 다시 보인 것도 한순간의 사고가 아닌 이전의 일로부터 파생된 사고의 연장선일 뿐이며 그로 인해 운전대를 급하게 틀다 절벽 아래로 차가 떨어진 것도 결국 계획되어 있던 일인 것이다. 누군가로, 혹은 세상의 어떤 불합리한 힘으로부터.


(404-405)

삶과 죽음의 경계는 슬픔의 척도 같았다. 얼마만큼 슬프고 괴로운지를 알리기 위해서는 삶에서 죽음으로 기꺼이 넘나들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거짓된 고통, 거짓된 슬픔 혹은 크지 않은 고통, 크지 않은 슬픔이 되었다. 고통과 슬픔, 좌절과 모멸, 증오와 살의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누간가 살라고 말했다.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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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슈테판 성당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온몸에 지니고 있다. 원재를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었는데 큰불이 나서 무너졌다. 그 자리에 14세기 초부터 2백여 년 걸려 새로 성당을 지었는데 종교 건축양식으로 바꾸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흔적은 성당 전면에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길이 107미터 너비 34미터, 축구장만 한 땅을 딛고 선 본당 건물에는 첨탑이 넷 있는데 남탑인 슈테플이 136미터로 단연 높다. 벽돌을 생선 뼈 모양으로 짜 맞춘(herring bone) 지붕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 쌍두(雙頭)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내부시설은 권력자의 취향과 유행에 따라 여러 차례 달라졌지만 중앙설교대를 비롯한 중심 공간을 고급 대리석과 화려한 귀금속으로 꾸민 것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32)

온몸을 적셔 준 비엔나커피의 달콤함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우울함을 덜어주었다. ‘이성은 고상할지 몰라도 사람의 내면을 항구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해. 매 순간 더 강하게 인간을 끌어당기는 것은 감각인지도 몰라. 어때? 그런 것 같지 않아? ‘비엔나커피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잠깐, 오해를 피하려면 비엔나커피라고 따옴표를 한 이유를 말해야겠다. 빈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딱 한군데,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렸던 중앙역 로비의 비스트로에 비엔나커피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비엔나커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길다방 커피에 생크림을 올린,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정체불명 음료였다.


(66-67)

사람들은 비운의 주인공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지만, 빈 사람들이 시씨를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운명에 의해 권력형 셀럽이 되었지만 시씨는 자기다운 삶을 추구했다. 그녀는 남편이 황제여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혼인했다. 황후의 권력과 화려한 궁정 생활에서 의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빈을 떠나 여행자의 삶을 영위했다. 아름다운 몸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처절한 노력을 쏟았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 했다. 운명을 거부하거나 극복하지는 않았으나 운명에 갇히지도 않았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의미를 느끼는 인생을 살아나가려고 번민하고 도전했다. 그리고 그런 끝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역사의 위인은 아니었으나 사랑할 만한 미덕을 지난 황후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시씨의 사진과 초상화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는 빈의 상인들을 욕하지 마시라. 그들은 시씨를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73-74)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로지 타고난 성격과 재능 덕분에 유능한 군주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 형제가 없었기에 어려서부터 군주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권력 행사와 관련한 직접 간접 경험을 쌓았다. 쇤브룬 궁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내게 말했다. “리더십을 형성하려면 지적,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학습과 경험을 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그런 기회를 얻는다면 누구라도 탁월한 리더가 될 수 있다. 나를 보라.”


(101)

도나우강은 알프스 남쪽 경계를 타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빈을 지난 다음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직각으로 몸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헝가리를 벗어날 때 다시 동으로 전향해 카르ㅏ티아산맥과 발칸 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 북부를 가로지른 후 루마니아 남부 평원과 우크라이나 저지대를 거쳐 흑해에 들어간다. 숱한 지류를 끌어안으며 알프스의 발원지에서 흑해까지 3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도나우의 품에서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자라났다. 1990년대에 라인강과 연결하는 운하가 개통되어 이제 도나우 물길은 흑해에서 북해까지 통하게 되었다. 하류의 도나우는 잔물결이 흐르는 푸른 강이지만 빈과 부다페스트 구간의 도나우 상류는 그렇지 않다. 탁류가 빠르게 흐르는 위험한 강이다.


(114)

부다페스트의 화려함은 헝가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상처를 감쪽같이 지워버린 빈과 달리 부다페스트는 그 모든 것을 내놓고 보여줌으로써 여행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증언하는 초대형 기억 공간을 조성한 베를린 말고는 부다페스트만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적극 홍보하는 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다페스트에서 반드시 그런 것을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알면 부다페스트가 더 정겹게 안겨 오는 느낌이 들 것이다.


(135)

언드라시(Andrassy Gyula, 1823~1890)는 오늘날 슬로바키아공화국에 속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백작의 아들이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민족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했고 세체니 이슈트반의 눈에 들어 스물세 살에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48년 귀족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크로아티아 영토전쟁에 종군했으며 헝가리혁명 정부의 명에 따라 이스탄불로 파견되어 오스만제국 정부의 협력을 끌어내려고 했다. 혁명을 진압한 합스부르크제국은 그를 반역자의 두목으로 지목했다.


(181)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Jan Hus, 1372~1415)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188-189)

그래서 보헤미안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보헤미아인에 해당하는 체코 말은 체키인데 뜻은 정반대에 가깝다. ‘체키는 슬로바키아인이나 모라비아인 같은 소수민족을 제외한 보헤미아의 체코인을 가리키는 체코 말이고, ‘보헤미안은 독일인과 집시를 비롯해 체코인이 아닌 보헤미아 사람을 지칭하는 외국어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인이었다.


(209)

체코 사람들은 성 바츨라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 소설, 영화, 연극, 노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가 죽은 지 1천 년이 된 1929 9 28일부터 체코슬로바티아공화국 정부가 개최한 축제를 보려고 75만 명의 시민들이 프라하에 몰려들었다. 지금도 해마다 그날에는 성당마다 대대적인 추모 미사를 연다. 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였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도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긴 세월 외세와 종교권력의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자존과 독립을 갈구했던 보헤미아 민중이 역사에서 그를 불러냈다. 영운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248)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 2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네 차례 번갈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그때마다 고열의 화염폭풍이 도심을 집어삼켰다. 군수품 공장과 기차역뿐 아니라 주택, 상점, 호텔, 술집, 교회, 성당, 병원, 오페라하우스, 영화관, 동물원, 학교, 엘베강의 선박까지 도심 반경 3킬로미터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터지고 녹고 부서지고 불탔다. 사망자만 20만 명이라며 연합국을 비난한 나치 정부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폭격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몇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258)

집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종교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양식은 건축기술의 발전, 활용할 수 있는 건축자재의 변화, 건축주가 동원할 수 있는 재정의 규모 등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건축주의 철학과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로마제국 시대에 지은 교회는 무섭지 않다. 아테네 도심 골목의 오래된 정교회들은 아담하고 소박하고 정겹다. 원래 성당이었던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글라스로 경외심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은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이었던 시대의 지배적 건축양식이다. 그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은 민중이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복종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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