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홍타이지의 불만은 이어졌다. 홍타이지가 특히 맹렬히 비난한 것은 공유덕, 경중명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들이 귀순해 올 때 조선이 명을 도와 그들을 요격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전쟁의 단초를 여는 행위였다고 규정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 신료들을 비난하고 조롱한 점이다. 그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그들 서생(書生)들이 10년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한족 출신 귀순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그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181)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시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281)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 7,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친청파로 변신했다. 하지만 변신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64)

1633년 명의 반장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했던 이후 인조 정권이 보였던 태도 또한 유사했다. 당시 명과 조선이 공유덕 등의 귀순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후금은 분명 수군과 전함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이 사실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후금이 수군과 전함을 운용할 수 있게 된 이상, 유사시 조선이 피난처로 생각하고 있던 강화도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 어떤 대책이 제시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인조와 신료들은 여전히 강화도로 들어갈 궁리만 했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방어를 책임졌던 김경징은 청군이 날아서 건너오기 전에는 절대로 안전하다며 대책을 마련하라는 주장을 일축했다. 전쟁 이전 청이 너희는 보나마나 유사시에 강화도로 들어가려 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음에도 말이다. 급기야 1637 1 22, 청군은 전함을 동원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고, 강화도가 무너지면서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말았다.

인정 정권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략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예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가 커다란 비극을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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