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157)

요컨대 정묘호란은, 홍타이지의 권력 강화 필요성 등 후금의 내부사정과 조선, , 후금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비롯된 복합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에서는 정묘로한을 강홍립이 후금을 사주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단순하게 규정하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송시열이 <삼학사전>에서 정묘호란을 강홍립이 오랑캐를 인도하여 국경을 침범한 사건이라고 했던 것을 비롯하여 서인계(西人系) 인물들은 대부분 강홍립이 오랑캐를 부추겨 도발한 전쟁으로 정의했다. 정묘호란을 아예 강노의 침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강노란 물론 강홍립을 가리킨다.

(208)

이렇게 표방과 실천이 서로 괴리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조의 행태에 대해 1630 3, 가평군수 유백증은 직격탄을 날린다.

, 오늘날 할 말이 많은데 나라의 흥망은 전적으로 군덕(君德)의 득실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자신하여 남을 따르게 점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으면서 이기기를 좋아하는 단점이 있으며, 인자함은 충분하나 위엄과 과단성이 부족하고, 근심하고 애쓰는 것은 간절하나 실덕(實德)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안으로는 주석(柱石)처럼 의지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외적을 막는데 간성(干城)처럼 맡길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인심이 원망하고 등을 돌려 역변이 잇따라 일어나고 공안(貢案)이 고쳐지지 않아 부역이 불균등하기만 합니다. 호령을 내리는 것도 조변석개(朝變夕改)라 은혜와 믿음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익만 따르고 공도(公道)가 무너져 벼슬길이 혼탁해져 뇌물 꾸러미가 조정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위급한 것이 마치 끊어지려는 실끔과 같은데, 신은 광해(光海)가 아직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259)

정묘호란 이후 조건은 이렇게 모병과 후금군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모문룡은 조선이 오랑캐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을 힐난했고, 후금은 그들대로 조선이 맹약을 어리고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조선 조정은 양자 사이에 끼여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은 부득이한 기미책(羈縻策)임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후금 사신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모병들은 이후에도 계속 사단을 일으켰고, 후금군도 그에 맞서 병력을 풀어 요격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모병들은 후금군에게 피해를 입을 경우 조선 관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요컨대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샌드위치가 되었고 청천강 이북 지역은 화약고가 되었다.

(370)

1634 11, 강학년은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인조가 자신을 장령으로 임명하자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인조의 실정을 조목조목 거론했다. 광해군의 아들을 죽인 것, 숙부 인성군을 죽인 것, 생부 정원군을 부묘하려는 것 등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조반정 이후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다음의 내용이다.

“<서경>정치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제어하고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전에 보전하라고 했는데 전하의 국사는 이미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들어섰습니다. 여러 차례 대란을 겪었음에도 조금도 허물을 반성하지 않고 고식책만을 써서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옛날 난정 때문에 나라를 전복시킨 자들과 똑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인데, 신은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전하께서 반정한 거사는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 세상의 드문 조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이(伯夷)가 있었다면 반드시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을 것이고, 엄연년이 있었다면 반드시 곽광(霍光)을 탄핵하는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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