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만유인력과 정확히 반대다. 이 힘은 서로를 밀어내기 때문에 산산이 부서져서 덩어리를
이루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만유인력은 당기고 암흑에너지는
밀어낸다. 즉 음과 양이다.
양 에너지는 공간을 계속 팽창시키고 있다. 팽창은 양의 기본 성질이다. 음의 성질과는 반대인 것이다. 우리의 우주 공간에 양의 힘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간은 계속 팽창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우주가 현재 팽창한다는 것은 오래전에 이미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몰랐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간에는 양이
있어서 팽창하고 있던 것이다. 음 때문에 물질이 출소되듯이 양 때문에 공간이 확장되는 것이다.
(53)
우리의 우주는 현재 팽창하고 있는데,
이는 우주의 내면에 아직 양의 기운, 즉 ☰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먼 미래에 ☰의 기운이 다 달아나버리면 우주는 ䷋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현재의 우주는 ䷊와 ䷋의 중간 상태인 것 같다. 먼 우주는 이미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서는 확장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이 있다. 우리의 우주는 현재
팽창 중이어서 아직 활력이 남아 있지만 다른 우주는 양의 기운이 다 달아나서 완전히 ䷋가 되어 있을 것이다.
(59)
옛 성인은 이 힘을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말하며, 이 기운은 우주에 가득 찬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자연의 안에는 원래부터 양의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이 기운은
어디서 온 것이 아니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양의 기운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주 대자연은 양이 있은 연후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자연에 가득 찬 양의 기운은 본시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써도 써도 다함이 없는 존대다.
우리의 영혼은 이 기운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다.
하늘의 기운 à 영혼 à 뇌 à 육체 à 사회
(91)
사상(四象)은 총체적으로는 순환이고, 하나씩 보면 그 안에 음양의 작용을 보여준다. 사상은 주역의 시작이다. 음양이 먼저 있고 그다음엔 그 작용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상이
아니면 주역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음양이 원소라면 사상은 그것들이 이루는 구조다. 구조는 또한 그 안에 변화를 담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순환으로
이어진다. 사상은 주역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개념으로, 만물의
뜻은 다 여기서 나온다.
(142)
이로써 괘상의 의미가 더욱 새로워졌는데, 이 괘상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지구에 적용해보자. 지구의 바닥에는 땅이 있을 것이다. 저
깊숙한 바다 속이 가장 아래인 것이다. 그 위에 해령(海嶺), 즉 바닷속의 산이 있다. 그 위에 물이 있다. 이것을 바다라고 한다. 바다 위에는 대륙이 있다. 대륙은 밝다. 그 위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그 위를 하늘이라고 부른다.
☰ 하늘
☴ 바람
☲ 밝음
☳ 대륙
☱ 바다
☵ 바닷물
☶ 산(바닷속)
☷ 땅(바닷속)
(173)
그런데 주역은 다름 아닌 뜻을 밝히는 학문이다. 뜻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니 바로 미래를 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당초 주역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주역이란 만물의 뜻을 규명하고
그것의 변화를 통해 미래를 살피는 학문이다. 공자도 주역의 괘상을 빌어 미래를 이야기한 사례가 많다. 공자는 점이라는 것도 많이 활용했는데 이는 사물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것에 함축된 미래를 살피고자 했던 것이다.
주역 원전은 말한다.
“주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데, 팔괘는 길흉을 정한다.”
(177)
미래란 오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실망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미래를 미리 정해놓고 살면
안 된다는 뜻이다. 미래가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예측은
자유다. 그러나 자기의 예측을 믿어서는 안 된다. 미래가
현실로 나타나면 ‘아, 이게 미래구나. 어제는 궁금했는데……’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206)
주역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괘상이다. 우리는 괘상을 통해 현상을 유추해내거나 혹은 현상에서 괘상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물의 뜻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해진다. 사물의 뜻을 분명히 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처세에 적용하든 인격수양에 사용하든 전쟁에 사용하든 질병 치료에 사용하든 그 사용처가 자유롭게 열려 있다.
이른바 ‘알고 행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삶의 작용은 더욱 위대해지는 것이다.
(248)
다른 괘상을 보자. ䷡(뇌천대장)과 ䷠(천산둔)이다. 각각 계층값은 같다. 하지만
괘상의 모양이 뒤집어졌다. 따라서 뜻도 뒤집어져야 한다. ䷡은
장군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는 괘상이고, ䷠은 엎드려 꼼짝 못하고 있는 형상이다. ䷡은 대범하고, ䷠은 쩨쩨하다. 괘상이란
제대로 관찰하면 그 내면의 의미가 서로 비교되면서 확실히 알게 되는 법이다.
이제 괘상이 눈으로 봐서 뒤집히면 그 뜻도 뒤집힌다는 것을
알았다. 이 얼마나 유용한 지식인가. 64개의 괘상 중 32개만 알면 나머지는 뒤집어서 해석하면 된다. 물론 32개를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작업량이 64에서 32로 반이 줄었다는 것에 만족하자.
(283)
이제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말할 때 일상 언어가 아닌 주역의
괘상으로 말하는 것이 더욱 쉬워졌다. 사물을 보고 즉각 그 뜻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다. 주역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머리로만 쉽게 이해하고 넘어가면
주역의 문리가 터질 수 없다. 수도하는 자세로 필사적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보람이 있다. 공자는 일생을 통해 주역을 공부했다. 이보다 더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