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른들의 글쓰기도 자기의 삶을 정직하게 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우리 문학이 크게 잘못된 글쓰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문학은
겨레의 삶과 말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방안에 앉아 글만 쓰는 데서 오는
필연의 결과였다. 삶과 말에서 떨어져 나간 문학은 일부 사람들의 오락물 구실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문장은 갈수록 사실과 사물을 떠난 병든 말의 희롱으로 떨어진 것이다. 우리 문학작품이 일본말과 일본말법을 퍼뜨려 우리 글 전체를 오염하고 우리 말을 병들게 한 사실도 바로 보아야
한다.
(12)
그렇다. 사람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것이다. 돈벌이로 글을 파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자기표현으로 글을 쓴다. 책이 책방에 산으로 쌓이고 거리에 넘치더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시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13)
그런데 앞에서 말한 아주머니가 왜 쓸 것이 없다고 했나 생각해본다. 그
아주머니는 아마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분 같다. 누구든지 만나면 자기 생각을 다 토해내어버리니 다시
더 할 말을 글로 쓸 필요가 없겠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아주머니도 다른 사람들 –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표현을 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남의 흉내만 내는 짓에 길이 들어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자기표현
대신에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또 버스안에서나 밤낮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의 표현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동안에 어느덧 그것을 자기표현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7)
소설이나 동화, 혹은 수필 같은 글을 처음 쓰는 이들의 글을 읽으면
흔히 첫머리가 부자연스럽게 시작된다. 근사한 말로 요란스럽게 꾸며놓은 글이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다가 한참 읽어나가면 그때야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해야 할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왜 글 첫머리를 이렇게 쓰는가? 문학이란 것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라면 보통 생활에서
쓰는 글같이 쉽고 분명하게 써서는 안된다는 그릇된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증거다.
(32)
중국글자말을 쓸 경우에 그 뜻을 잘못 알게 보는 보기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으니 그 첫째는 ‘글은 말보다 어렵게
써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쉽게, 더 친절하게 써야 한다’는
사실이고, 다음 또 하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중국글자말을
쓰지 말고 우리 말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45)
우리 나라 사람들이 거의 모두 걸려 있는 정신병이 있는데, 그것이
‘유식병’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쉬운 말을 하면 무식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이 잘 안 하는 말, 어려운 말, 유식한 말을 하고 싶어한다. ‘말을 한다’고 할 것도 ‘언어를
사용한다’고 보통으로 글을 쓰고 말도 그렇게 한다. ‘우리
집은 산 밑에 있는데’ 할 것을 ‘산 밑에 위치해 있는데’한다. 누구를 만났다든지, 무슨
책을 읽었다든지, 무슨 소식을 들었다든지 하는 말은 모조리 ‘접한다’고 한다. 그래야 공부를 한 사람,
유식한 사람으로 알아준다고 여긴다. 나는 아직 우리 나라 신문에서 ‘언어를 사용한다.’를 안 쓰고 ‘말을
한다’고 써놓은 기사를 읽은 저기 없고, 무슨 건물이 어디에
‘위치한다’고 안하고 ‘있다’고 쓴 신문 기사를 읽지 못했다. ‘사건이 발발했다’고 안 쓰고 ‘일이 일어났다’고
쓴 신문도 본 적이 없다. 거의 100년 전에 나왔던 <독립신문>에서 우리 말을 읽은 이후 쉬운 우리 말로 쓴
신문을 보지 못했다. 쉬운 말로 글을 쓰면 무식한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이라고 말할까봐 그렇게 쓰는 것이다. 유식한 척하려고, 학문이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만드는 신문임을 내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58)
우리는 모두 제각기, 자기가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서 그것부터 써야 한다.
자기의 삶을 바로 보고 그것을 풀어가려고 하는 데서 비로소 사물이 제대로 잡히고, 살아
있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자연조차도 삶 속에 들어온 것이라야 나뭇잎 하나라도 구름 한 조각이라도 비로소
제대로 살아 있는 모양과 빛깔을 띠고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165)
글은 저혼자 기분으로 써서는 안되고, 쓰는 재미에 취해서 쓰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오늘날 이 땅에서는 누구든지 엄숙한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끼리, 이웃끼리 나눠보는 정도의 글도 그 친구와 이웃들의 삶을
높여주는 글이 되어야 하겠지만, 더구나 온 나라 사람들이 읽으라고 내놓은 글이 값싼 이야기를 장난삼아
써놓거나, 세상 일을 바로 볼 수 없도록 하는 안개를 피우는 글 같이 되어 있으면 용서할 수 없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만 보고도 그가 쓴 글을 읽게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바른 글을 쓰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결심까지 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고, 그런 결심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반민족, 반민중의
글을 쓰지 않기 위해 온갖 고난을 달게 받을 생각만은 단단히 해야 하리라 본다. 만약 그런 마음이 서지
않는다면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글쓰는 사람이 가야 할 가시밭길이고, 또한 영광의 길이다.
(215)
글을 다 쓴 다음에는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보이거나 발표를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다듬어야 한다. 한번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고 빠뜨린 것을
써 넣고, 필요가 없는 말을 줄이고, 틀린 말이나 정확하지
않은 말을 고쳐 쓰고 하는 일을 글 다듬기라 한다. 전에는 이것을 중국사람들 말 따라 ‘추고’니 ‘퇴고’니 했는데 우리 말로 ‘다듬기’라고
하면 아주 알맞다.
글을 왜 다듬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의 글이든지 처음 써 놓은 글은
여러모로 잘못되어 있기가 예사다. 말을 잘못 썼거나 글자를 틀리게 쓴 경우도 흔히 있지만, 꼭 써야 할 내용을 빠뜨리는 수도 있고, 기분대로 쓴 것이 엉뚱한
말로 나타나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번 얽어서 고치고, 또
읽어서 고치고, 여러 번 줄이고 보내고 바로 잡아서 다듬을수록 좋은 글이 된다.
(217)
쓰고 나면 곧 그 자리에서 읽어 보고 잘못된 곳을 바로잡는다. 한
차례 그렇게 해서 다듬어 놓고는 며칠 뒤에, 될 수 있으면 그 글을 어떻게 썼던가를 거의 잊어버렸을
때 다시 찾아내어서 다듬는 것이 좋다. 글을 쓸 때는 흔히 마음이 흥분해 있어서 바로 뒤에 읽으면 그
글을 올바른 눈으로 보기가 힘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글이든지 적어도 두 차례는 다듬어야
한다.
(425)
나는 글과 사람은 따로 볼 수 없고, 따로 보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글과 사람이 다른 것처럼 보는 것은 우리가 글을 바로 보지 못했거나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잘못 이해하기도 예사이지만 글을 잘못 보는 일도 흔하다. 더구나
재주꾼들이 써놓은 글에 속아 넘어가는 일이 너무나 많다. 세상에는 사기꾼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로 남을 속이는 사람도 많지만 글로, 문학이라는 이름의 글로 사기를
치는 사람도 알고 보면 놀랄 만큼 많다. 적어도 내가 겪어서 알고 있는 바로는 그렇다. 다만 이런 사기꾼들은 훌륭한 문필가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말로 하는 사기꾼과 다를 뿐이다. 글은 온몸으로 써야 하는 것이지 머리로 써서는 안된다. 사기꾼들의
글이 바로 머리로 쓴 글이다.
(426)
이제 와서 새삼 또 친일작가를 들먹이느냐 할는지 모른다.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을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겨레가 살아 남으려면 역사 전체의 잘못된 흐름을 기어코 바로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한 번도 겨레의 이름으로 반역의 무리들을 정죄하지 못했으니, 그 일을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민주와 통일을
이룰 때까지는 말과 글의 사기꾼들을 철저하게 가려내고 비판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겨레정신을 세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