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
그런데 말이야, 태곳적부터 사람은 그놈의 답답증
때문에 말을 내지르다 보니 문자가 생겨났고 답답증 때문에 소리를 내지르다 보니 음악이 생겨났고 모양을 나타내어 보고 싶은 답답증 때문에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게 생겨났을 성싶은데, 그래서 그놈의 답답증 때문에 종교니 철학이니 윤리 도덕이니, 그게 다 춥고 배가 고파서 생겨난 게 아니란 말이야. 답답증, 다시 말하면 마음이 춥고 배고파서 생겨난 건데 그래서 인간은 동물보다 복잡해졌단 말이야.
(588-589)
“여덟이에요. 나인
그렇다 치고, 난 엉큼하질 못해서 탁 털어놓는 거예요. 마음은
간절하면서 안 그런 체하는, 소위 그 숙녀라는 물건들을 보면 메스꺼워서 원, 나같이 솔직만 하다면 세상은 아주 살기 좋고 밝아질 거예요. 한국
사람들의 병이 바로 그거 아니에요? 남이 갖다주어서, 그래야
겨우 먹고 싶지도 않지만 권하니까 먹는다는 식으로 말에요. 배 속은 비어서 꾸럭꾸럭 소리가 나는데 한
푼어치 가치도 없는 체면치레는 사실 치사한 거예요. 난, 결혼
문제에도 그래요. 따지고 보면 목적은 간단한 데 공연한 사탕발림을 한단 말예요. 결혼이라는 것도 수지계산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627-628)
“운명이라든가 행운이라든가 혹은 부조리라든가 막연한
말인데 한편 근본적인 것일 수도 있고…… 한데 그런 것 밀쳐놓고, 아득바득
애쓰는 그 껍데기만 살짝 벗겨본다면? 역시, 역시 그렇거든. 의리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 쌓이고 무너지고 한단 말이야. 마치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리고 떠밀리다가는 큰길로 나와 있었다는 것과 비슷하게……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본인의 의사하고는 상관이 없이 천재가 되어 있기도 하고 천치가 되어 있기도 하고, 그게 운명이라든가
행운이랄 수 없는 게 오늘이거든. 역학적인 것이란 말일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한, 저절로 움직이는 역학적 현상이란 말일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한, 저절로 움직이는 역학적 현상이란 말일세. 운명과
마찬가지로 자연도 물러나 버린 빈터에서 인간이 주인만 되었더라면…… 망상이지 망상일세. 어디 본인의 의사만의 부재한가? 그 타의라는 것도 타인의 의사가
아니란 말이야. 인(人)자를
빼어버린 타, 다만 타, 그것뿐이지. 홍수를 이루며 떠내려가는 사물의 의사가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