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116)
“그리고 여자 애들한테는 차가운 분노가 있어야 해요. 여자 아이들은 싸늘하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 사그라지지 않는
원한, 용서하지 않는 재능과 협상을 회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해요. 무슨
얘기를 할 때는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그건 세상에서 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살아야 하는 데 대한 보상이에요. 남자에게 맞서 싸움을 해 이기면 자기 방식대로 계속 가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거죠. 여자한테 맞서면 온 우주가
다시 한번 다 바뀌어요. 왜냐하면 차가운 분노는 멸시와 모욕에 관한 한 어떤 문제에서든 언제까지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를 풀지 않는 법이니까요.” 사리마는 피예로에 대해,
리르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는 비난을 던지며 엘파바를 쏘아보았다.
(257)
“약에 대한 진실은 여러분이 말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야. 당신들은 악의 한쪽 면, 즉 인간적인 면만
발견했어. 영속적인 면은 그늘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아니면
그 반대이든가. 옛날 속담 같은 거지. 껍데기 속의 용이
어떻게 생겼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 보려고 껍데기를
깨는 순간 용은 더 이상 껍데기 속에 없을 테니까. 악의 본질은 비밀스러움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어.”
(283)
종교라는 꼬챙이가 몸 전체를 꿰뚫고 있다면, 움직일
때마다 의식할 것이다. 그런 사람의 정신적, 도덕적 체계에서
종교라는 언월도를 뽑아낸다면 제대로 서 있기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초원의 하마가 섬유질의 소화를
돕는 유독한 작은 미생물들을 몸속에 품어야 하듯이 인간도 종교를 품어야 하는 것일까? 종교를 벗어 버린
사람들의 역사는 종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설득력 있게 와 닿지 않는다. 그 진부하고 아이러니한
종교란 그 자체로 필요악인가?
(284)
이름 없는 신에게서 인격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다 쳐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거세게 몰아치는 한 줄기 공허한 바람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바람은
모든 것을 쓸어 버리는 강풍일 수도 있지만, 도덕적인 힘은 없을지 모른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육제의 호객꾼이 손님을 끄는 외침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교의 관념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요정 마차를 타고 구름 속 보이지 않는 곳을 맴도는 럴라이나라면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천년왕국이든 어디든
언제고 하늘에서 내려와 덮칠 것이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없는 신이 갑자기 들이닥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