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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은 시를 읽곤 한단다. 즐겨 읽는 편은 아니야.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자유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류시화 시인이라고 말할 것 같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류시화 시인은 시 뿐만 아니라
에세이도 참 좋단다. 시라는 것이 한 번 읽고 바로 와 닿지 않아 애를 먹이는 경우도 많은데, 류시화 시인의 시들은 한번에 가슴에 딱 달라붙어 마음을 위로해주기도 하고 기쁘게 해주기도 한단다.
나이를 먹게 되면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단다.
아빠의 예를 들어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류시화 시인의 시들을 읽어보면 그 말이 틀린 것 같단다. 시라는 것이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말들이 많은데, 류시화 시인이 어떤
사물을 두고 비유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단다. 평상시에는 연관성이 없어 보였는데, 류시화 시인이 이야기하니까 둘
사이가 그런가 보네…
삶을 노래하고, 죽음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희망을 노래하고, 그리움을 노래하는 류시화 시인의 이번 시집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도 좋았단다.
1.
아빠가 책을 읽고 나면 좋은
구절들을 발췌하곤 하는데, 시집은 아빠가 마음에 들었던 시 전체를 발췌한단다. 시라는 것은 전체를 다 읽어야 제대로 된 맛을 알 수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오늘은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시집에서 발췌한 몇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독서 편지를 대신할게. 책의 첫 번째 실려 있는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시는 연탄 시로도 잘 알려진 안도현 님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떠오르는 듯 했어. 물고기와 새를
통해 온 생애를 걸어봤냐고 묻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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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살아 있다는 것
뭍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그렇게
절망이 온몸으로
바닥을
친 적 있는지
그물에
걸린 새가
부리가
부러지도록
그물눈을
찢듯이
그렇게
슬픔이 온 존재의
눈금을
찢은 적은 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렇게
온 생애를 거는 일이다
실패해도
온몸을 내던져
실패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돌릴 겨를도 없이
두렵게
절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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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시화 시인의 책에 사랑이 빠질
수 없지. 이 책의 제목을 뽑은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는 사랑에 관한 시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되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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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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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라는 시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누군가가 아닌,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감수성과 창의성이 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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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당신을
발견한 내 눈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내 귀를 사랑한 것이고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다가간 내 목숨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
곁에서 웃는 나의 아픔까지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를 숨 쉬는
나의
폐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지대가
꽃나무가 사랑하듯이
슬픔의
무게로 기쁨의 가벼움을 사랑하듯이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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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음표>라는
시는 계속 질문을 하는 하는 시란다. 시를 쓰려고 이것저것 스스로 물어본 글들을 쭉 놓아놓은 듯 한데, 그것으로 좋은 시 한 편이 된 것 같구나. AI 시대에서는 누가
얼마나 더 좋은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더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단다. 그런 시대에 발맞춰 쓰신 시는 아니겠지? 이 시에 나온 질문들은 ChatGPT에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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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
물음표
우리의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발명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내
눈썹을 그릴 때 신은 어디서 검은 색을 얻었을까?
바다의
결정체인 소금은 왜 파란색이 아닐까?
숯은
불을 어디에 감추고 있을까?
바람은
자신을 손짓하는 나뭇잎을 어떻게 찾아갈까?
돌이
흘리는 눈물은 왜 냉정하지 않고 고단해 보일까?
무는
세상의 무엇이 보고 싶어서 흰 목을 빼고 있을까?
지빠귀처럼
사람도 자신의 얼굴을 정하고 태어날까? 그 얼굴은 어디서 고를까?
아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동안 빗방울의 심장은 두려울까? 두근거릴까?
거리에서
혼잣말하는 여인은 누구와 이야기하는 걸까?
속으로
우는 울음만큼 절창이 없다는 걸 갈대 피리는 언제 알았을까?
모든
전등은 왜 약간은 떨면서 켜져 있을까? 자신이 돌아갈 어둠에 맞서기 때문일까?
내가
그리워한 첫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금
간 사랑을 꿰매려면 얼마나 긴 인동초 꽃실 빌려야 할까?
왜
우리는 평생을 함께 지내는 자신과 행복하지 않을까? 더 큰 형벌이 있을까?
억새는
왜 지나가는 모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까?
내일을
알려면 얼마나 많은 어제를 불러 모아야 할까?
수십
억 인구 중에 왜 둘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당신의 나이고
당신은
언제부터 나의 당신이기로 결정했을까?
누가
인간의 몸을 본떠 물음표를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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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시는
곧 공부라고 생각했단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은 늘 아빠를 괴롭혔으니 말이야.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구나. 책 읽을 시간도 적은데, 거기에 시집까지 읽어보라고 할 수는 없겠구나. 시집은 나중에 감수성
충분해지는 이십 대에 읽는 것으로…^^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물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책의 끝 문장: 아무리 연습해도 나는 작별의 말이 서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