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8)
이 대목에서 이낙선의 5.16혁명 데모는 대질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강영훈 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육사생도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그런 짓은 쿠데타의 경우에도 금기로 되어야 한다. 그 당시 육사 출신 대위 몇 사람과 내가 대질했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4년제 육사 출신 셋을 복도에서 만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전두환이었다. 하지만 내가 육본에 갔던 그날, 같은 11기 출신이라 해도 김성진(80년대 체신부장관) 등과 같은 장교는 지지 데모에 반대했고, 관망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105)
제4대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이었다.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증발해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정’되지 않은 인물. 누군가에 의해 영원히 ‘제거’됐을 것이라는 추측만 김형욱의 운명은 박정희 정권의 영욕을 상징하는
듯하다. 김형욱의 별명은 ‘뚝심의 돈까스’였다. 이 별명은 남재희 정치부 기자가 지어준 것이다.
(376)
71년 12월 6일 대통령 박정희는 돌연 국가비상사태라는 것을 선포했다. 특별담화
형식으로 발표된 ‘비상사태’는 북의 위협을 빗대 체제 강화를
꾀한, 말하자면 제1차 유신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헌법적 근거가 박약한 것이었다. 청와대측은
궁색한 나머지 당시 대통령 취임선서의 ‘나는 국가를 보위하고…’라는
구절에 비상사태 선포의 근거가 있다고 우겼다.
(629)
정보부가 캔 미량의 석유는 유리병에 담겨 청와대에 올려졌다.
박 대통령은 너무 기쁜 나머지 국무회의 때 유리병에 담긴 원유를 탁자 위 재떨이에 붓고 불을 붙여보였다.
그러나 경제성이 없는 석유였다.
애당초 비서실장 김정렴과 오원철 등은 “탐사가 끝날
때까지 발표 않는 게 좋겠습니다”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유 노다지’를 기대하고 정치적 효과에
사로잡힌 듯 그것을 발표해 버렸다.
희망이 크게 부풀면 절망도 깊다.
보통 한두 구멍 뚫다 마는 석유 시추는 포항에서는 무려 12구멍이나
시추되었다. ‘석유 원년(元年)’이니 하는 성급한 기대는 무참히 깨져갔다. 그리고 탐사 과정에서부터
주민들의 방대한 토지를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어 놔 90년대까지도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646~647)
그 무렵 박 대통령은 추가적인 미군 철수에 맞서 핵무기 개발을 꿈꾸고 ‘작전지휘권’을 지렛대 삼아 대미흥정을 벌였다. 그의 비공개 어록.
“미국 사람들은 작전권 이양 문제에 신경과민이다. 주한미군이 적어도 현수준을 유지하면 미군이 지휘관이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한미군 수가 현수준 이하로 감축되면 다시 작전지휘권 문제를 협의하겠다. 여기에 대해 미국 측은 못마땅해
가고 있고 답변이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자기 나라 군대를 몇 명 없고
장군만 몇 있다든지 하는데 남의 나라 60만인데 4만밖에
안 되는 미군이 지휘관을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한 상태 아닌가.
그러나 전쟁이 나면 해공군과 병참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6.25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작전지휘권을 미군한테 맡겨온 것이다. 이 문제는 휴정협정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