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고전 전기역학의 창시자 맥스웰(James Maxwell)은 1871년에 이미 이런 자기만족을 경고했다. “(측정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실험은, 중요한 모든 물리적 상수가 몇 년 안에 대략 추산되어
과학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 측정을 소수점 아래 수치까지 세밀화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만연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다. “꼼꼼한 측정의 노력에서 얻어야 하는 진정한 보상은 더 큰 정확성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분야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 아이디어의 발달이다.”
과학의 역사는 맥스웰이 강조한 대로 될 것이다.
(68)
보어는 원자물리학을 창시했다. 그의 모형은 오랫동안
열려 있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도 만들어냈다. 전자는 도약할지 말지를, 그리고 어떤 궤도로 도약할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양자 세계에서 다시
어떤 일들이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것 같고, 인과 원칙이 다시 힘을 잃는 것 같다. “인과성 문제는 나도 많이 괴롭습니다.” 몇 년 뒤에 아인슈타인은, 원인 없는 양자 도약의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때, 막스
보른(Max Born)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물리학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속으로 알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열심히 이용했다.
(141-142)
반면, 아인슈타인에게 콤프턴의 실험 결과는 확인
도장이었다. 그는 진보좌파 신문인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에 이렇게 기고했다. “콤프턴 실험의 긍정적 결과는, 빛이 에너지 전달뿐 아니라 충돌 효과 측면에서도 마치 개별 에너지 발사체로 구성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수년 전부터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라는 주장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빛은 파동이어야 했다. 맥스웰 이후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알고,
전기기술자는 그 지식으로 라디오와 방송기기를 만든다. 파동이어야 하는데 입자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이제 빛의 이론이 두 가지다. 둘 다 필수불가결이고, 20년에 걸친 이론물리학자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백할 수밖에 없듯이, 둘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연결도 없다.” 빛의 파동이론과 입자이론 둘 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 된다. 광양자는
간섭현상과 굴절현상 같은 빛의 파동현상을 해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광양자 없이는 콤프턴 효과와 광전
효과를 해명할 수 없다. 빛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파동과
입자. 물리학자는 이것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66)
1923년 말에 드브로이는 “길고 외로운 숙고 끝에” 단순하고 대담한 아이디어에 이르렀다. 그는 광전 효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보았다. 빛이
입자의 흐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입자 역시 어떤 면에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단히 새롭게 과감하게 근거가 빈약한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입자는 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응집된 알갱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70)
“ … 모든 물질에 이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빛만이 이런 분열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주 창조의 기본 재료인
모든 원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도 있는 이 논문이, 전자든
양성자든 모든 입자에는 파동이 있고, 이 파동이 공간을 이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주장을 반박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이 주장이
오로지 나의 고독한 숙고에서 나온 것임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기이한 주장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틀렸을 때 내게 닥칠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가장 깊은 확신으로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확정적인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노리는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수도 있습니다.”
드브로이가 강연을 마쳤고, 교수들은 당황하여 침묵했다.
(246-247)
하이젠베르크가 헝클어진 부스스한 금발과 소년 같은 앳된 얼굴,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뒤늦게 강당에 들어섰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지만, 벌써 양자역학의 선두 그룹에 있다. 그는 이론을 창시했다. 그는 이 이론을 간단히 ‘그 양자역학’이라 불렀고, 슈뢰딩거보다 몇 달 먼저 개발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 강연을 해야 할 사람은 슈뢰딩거가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여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행을 중단하고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서둘러 왔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레깅을 위해, “스팀롤러(증기로
가는 삼륜자동차)를 타기 위해”, 그의 말을 빌리면, 다른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북유럽에 갔었다. 그는 몇 주 전에 미에사 호숫가에서 야영하며 백야 속에서 양자역학을 곰곰이 생각했고, 양자역학을 이용해 헬륨원자의 기이한 긴 스펙트럼을 계산했고, 구드브란스달렌
골짜기에서 송네피오르까지 걸었고, 자신감을 가득 안고 뮌헨에 왔다. 스칸디나비아의
긴 햇살에 하이젠베르크의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렸다.
(262)
1928년에 디랙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디랙 방정식’이라 불리게 될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운 방정식 하나를 발명했다.
짧고, 완벽하다.
말이 없는 발명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공식으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물리학 방정식일 것이다.
디랙이 이 공식을 종이에 적었을 때, 물리학은 두
기둥 위에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혁신적인 이 두 기둥을 합칠 수 없었다. 슈뢰딩거
자신도 실패했다. 그러나 폴 디랙은 이 둘을 합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방정식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의 이론을 화해시켰다.
(287)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논문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물리학의 토대라고 여겼던 인과성을 흔들었다. “’현재를 정확히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인과법칙의 명확한 진술에서 틀린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현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의 가능성 확률만을 계산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통해 인과법칙의 무효성이 명확히 입증된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공간 혁명에서 감히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못했었다. 한때 뉴턴이 상상했던 시계태엽 우주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이마누엘 칸트의 문장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293)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른의 확률, 슈뢰딩거의 파동,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것을 상보성이 양립시킨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그런 고전적 파동이 결코 아닌데, 측정하지
않을 때만 예측 가능하게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파동은 보어 자신의 양자적 사고의 기초인
대응원리에 맞아야 한다. 양자 시스템의 특징에 대한 실질적 설명은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확률 구름을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측정하지 않는다. 실험은 구체적인 측정값을 도출한다.
(380-381)
막스 플랑크는 이런 대탈출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독일 과학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히틀러를 만나려 애썼다. 1933년 5월 16일 11시에 기회가
왔다. 플랑크는 유대인에도 ‘인류에 소중한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등
여러 종류가 있으니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는 부모가 유대인이지만 암모니아
추출 과정을 개발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독가스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독일에 기여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은 유대인이오. 모든 유대인은 엉겅퀴처럼 서로 들러 붙어 있소,.” “그러나 가치
있는 유대인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완전히 자해 행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일에서 이룩한 그들의
과학 업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외국을 유익하게 할” 거라고, 플랑크가
반박하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악명 높은 특유의 흥분 상태에 빠져 무릎을 거세게 때리며 점점 더 빨라지는
말로 일흔다섯의 노교수에게 고함을 치고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겠다고 위협했다. 플랑크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플랑크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한심한 멍청이!”
(432)
마이트너는 과학학술지 <자연과학 검토>에 논문을 발표할 때 성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저자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로크하우스 출판사 역시 저자를 남자로 예상하여 백과사전
원고를 의뢰하는 편지에 “미스터 마이트너”라고 적었다. 마이트너가 자신이 여자임을 밝혔을 때, 출판사는 원고 의뢰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프라하대학교가 그녀에게 강사직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마이트너는
오토 한의 실험실에서 “무급 객원연구원”으로 시들어갔을 터였다.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는 그제야 마이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냈다. 마이트너는 1913년 서른다섯 살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녀는
“과학의 경이로움”에 기뻐했고, 마침내 스스로 커피 살 돈을 벌게 되었다.
(466)
보어는 이따금 고등연구소 옆 아인슈타인 집에 들렀고, 두
노신사는 옛날처럼,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다퉜다. 옛날의
결투가 더는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루틴에 가깝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것은 위로이다. 그는 홀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너머에 있는 한 이론을
찾고 있다. 그의 사교 범위는 괴델과 몇몇 다른 친구들로 축소되었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한 아들과는 사이가 벌어졌고 다른 한 아들은 정신적으로
아프고, 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아인슈타인이 1955년 4월에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아무 결과도 도출하지 않는 공식들이 가득 차 적혀 있었다.
(479)
진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언제가
끝난다. 이 책의 물리학자들은 1945년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에 견줄 만한 진보를 더는 이루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공식을 찾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100년 전에 세운 그들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고, 우리의
컴퓨터칩과 의료장비 안에 들어 있고, 당시 이런 이론의 해석을 두고 그들이 겨뤘던 논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심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제기한 이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물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