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문규는 그제서야 친구의 지난날의 그림의 미완성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 참뜻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지난날의 친구와, 지난날의 친구의 그림이 가슴에 저리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미완성을 완성시킬 수는 있어도 완성을 미완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명 있는 걸 생명 없이 할 순 있어도 이미 생명이 없어진 것에 생명을 줄 순 없는 것처럼. 문규는 친구의 완성된 그림을 갖고 싶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써 그와 친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귀부인의 장막을 뚫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쓸쓸하게 친구의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화랑을 나왔다.

 

(163)

여보, 당신 이까짓 아파트 하나 샀다고 우리가 무슨 갑부라도 된 줄 알아요. 내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게. 아직 멀었어요. 철이 사립 국민학교 치다꺼리도 치다꺼리지만, 철이라고 만날 국민학교만 다니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아유 말도 말아요. 그뿐이면 또 좋게요. 과외 공부 안 시키우? 아이를 낳아놓기만 하면 뭘 해요. 사람 노릇을 시켜야지. 사람 노릇 시키려면 돈이 무진장 드는 거라구요.”

 

(181-182)

생활 양식은 서구화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의식은 아직도 고전적인 걸 미덕으로 치는 걸 너희들은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니? 과거의 생활양식 속에서도 부부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와 애정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했어. 아내는 옷 수발, 음식 장만 등으로 자기 존재와 애정 표현을 했고, 남편은 돈벌이와 바깥세상의 온갖 거친 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는 걸로 그 일을 했지만 지금 그런 분업의 한계가 모호해진 이상 어쩌겠니? 입으로도 해야지 입 뒀다 뭐 하니? 너희들도 열쇠 부부의 비극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내 방법 써먹어라.”

 

(264)

젊은이나 어린이들과의 이런 언어의 불통에는 편리하게도 세대차이라는 방패막이가 있어 열등감까지는 안 느껴도 된다. 그러나 우리 나이나 우리보다 얼마 젊지 않은 사람들의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까지 해야 되지 이 아니 서글픈 노릇인가. 그런 못 알아들을 말 중 외국에서 오래 살아온 친구들이 흔히 쓰는, 그쪽의 관용어에다 토씨나 접속사만 우리말로 하는 경우는 대강 넘겨짚어 알아듣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 물 건너온 티 좀 작작 내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상당한 지석인이어서 유창하게 논리적인 우리말 중 못 알아들을 말이 섞이면 적어도그게 사람 이름인자, 사람이라면 음악간가 문학간가 과학잔가? 또는 실재하는 사람인가 작중 인물인가, 아니면 새로운 주의나 경향, 사조(思潮)의 이름인가쯤은 짐작할 수 있어야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못 읽었다는 식의 실수를 안 할 수가 있다. 또 상대방을 함부로 높이 평가해 그런 학구적 상상력만 동원할 것도 아니다. 그가 한참 도취해서 찬양하는 게 내가 모르는 예술가가 아니라 내가 못 가본 술집 이름일 수도 있고 상품의 라벨일 수도 있다.

 

(285-286)

실례가 안 된다면 궁합을 보아드리기 전에 궁합의 유래부터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예로부터 궁합이란 원치 않는 청혼을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다고 전해지죠. 그건 다 아는 얘기고 오늘날까지 궁합이란 게 소멸하지 않고 날로 발전해온 과정 역시 남녀 간에 있어선 거의 영혼의 문제인 일방적인 사랑의 소멸과, 거기 따른 편리한 거절의 필요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게 나의 현장 체험인데요. 선생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321)

부인, 그래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전 지금 오래간만에 행복합니다. 가슴이 소년처럼 울렁입니다. 늙어도 행복할 권리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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