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쇼핑을 멈추는 건 생각보다 큰일이다. 기분이 안
좋을 땐 뭐라도 사라고, 기분이 좋으면 그에 맞게 쇼핑을 하라고, 그게
네가 존재하는 방식이자 이유라고 온 세상이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요란한 목소리를 외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지속가능성 문제를 고민하다 보면 왜 시민들 개개인이 죄책감을 느끼고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곤 한다. 라면을 먹으려 해도 비닐봉지를 최소한 세 장은 버려야 하는데, 커다란 매대를 온갖 종류의 라면으로 채운 대형마트에서는 오히려 소비자를 향해 비닐봉지 사용을 줄이자고 외친다. 개인과 가정에서보다 기업에서 배출하는 비닐쓰레기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말이다.
그래서 걱정도 됐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옷을 사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게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말처럼 들릴 것 같았다.
(36)
패스트패션의 오염 규모를 가늠하는 데 참고할 만한 큰 숫자는 또 있다. 세계 물 소비량의 20퍼센트가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매년 의류 제조에 물 93조 리터가 쓰이는데, 이는 무려 500만 명이 생존에 쓸 수 있는 양이다. 서울 시민의 절반이 1년간 마실 수 있다.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따르면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 물이 약 7000피터, 티셔츠 한 장을 만드는 데는 약 2700피터가 필요하다. 청바지와 흰색 면 티셔츠는 각각 한 사람이 9년간, 3년간 마실 물을 집어삼키는 셈이다.
(37)
개인이 체감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의 오염을 일상으로 자리 잡게 한 ‘패스트패션’.
이 단어는 1989년 <뉴욕
타임스>가 스페인의 자라를 소개할 때 처음 등장했다. “패션쇼
런웨이에 오른 제품을 무려 15일 안에 대량고급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패션업체에서 새 옷을 기획하고 디자인해 제조 유통 출시하기까지 약 6개월이 걸렸지만, 자라는 이 모든 일을 2주 안에 해내는 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폭발적인 자원 낭비와 오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51)
버려지거나 세탁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옷은 제조 과정에서부터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킨다. 합성섬유로 만든 옷 5킬로그램을 세탁하면, 옷에서 떨어져 나온 미세플라스틱 600만 개가 세탁수를 통해 유출된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세탁기의 규격이 주로 10킬로그램을 감안하면, 한 번 세탁할 때마다 미세플라스틱이 1000만 개씩 나오는 셈이다. 옆집, 우리 동, 아파트
전체, 단지, 그리고 전국의 세대 수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금방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엄지 손가락 하나로 스마트폰 화면을 끌어내리며 업데이트된
신상품을 손쉽게 훑어보면서도 금세 싫증을 느끼는 우리의 인스턴트식 패션 취향의 대가는 머나먼 바다 건너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이미 우리의 삶과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68-69)
인도 농부들은 더 강력한 살충제를 구매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런데 농부들은 머잖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 강력한 살충제를
판매하는 회사가 자신에게 Bt면화를 팔던 바로 그 몬산토였기 때문이다.
Bt면화는 일반적인 식물과 달리 씨앗을 받을 수 없고 혹 씨앗을 받았다 해도 발아하지 않는 터미네이터 종자였기에 인도 농민들은 종자와
살충제를 해마다 구입해야 했고, 점점 늘어나는 부채로 신음했다.
(135)
모 패션 플랫폼 담당자 D는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쿠폰을 발급하고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하다 보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기 일쑤라고 털어놨다. 옷을 중개해
잘 팔수록 플랫폼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이다. 플랫폼은 이미 옷으로 돈을 벌고 있지 않다. 대신 셀러들에게 좋은 구좌를 비싼 가격에 판매해 수익을 낸다. 비싸고
잘 보이는 자리에 걸린 옷 광고를 본 소비자들은 또다시 소비하는 굴레에 빠진다. 소비자를 모아 판매자를
모으고, 판매자를 모아 소비하게 하는 플랫폼. 그 안에서
수요와 공급은 시작과 끝의 구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영원히 순환한다. 또다시 물건이 존재해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소비를 해야 물건이 존재하는 구조가 갖춰지는 것이다.
(149)
. 패션기업은 임금이 가장 저렴한 나라에 공장을
짓는다.
. 많은 옷을 싸세 제작하기 위해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력이 투입된다. (대부분 나이가 어린 여성 노동자나 이주 노동자다.)
. 경비 절감의 이유로 안전장치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공장에 산업재해가 발생한다.
. 수많은 노동자가 다치고 사망한다.
. 공장주나 기업 관계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 기업은 규제가 약하거나 임금이 저렴한 또 다른
나라로 이동해 새로운 공장을 짓는다.
(166)
그 후로 하나의 공식이 굳어졌다. 테러나 전염병
등으로 국가 경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소비였다. 자본주의에서 멈춤은 곧 재앙이다. 자본주의 세상에 태어났다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관성의 궤도에서
이탈할 수 없다.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최소 600억
달러 규모의 자산과 5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졌는데, 이는
테러리스트 때문이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가 갑자기 소비에 열정을 잃은 결과였다. 2006년 경기 침체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결국 부시 대통령은 자국민들을 향해 “소비하라”라고
직접 요청했다.
(184-185)
아시아는 타 대륙보다 명품을 압도적으로 많이 소비한다. 현재
세계 명품시장은 약 80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된다. 그중 37퍼센트가 아시아에서 팔린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구찌, 까르띠에, 불가리 같은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는 전체 매출의 50~60퍼센트를
아시아 소비자에게서 거둬들인다. 프라다, 샤넬, 버버리, 보테가베네타 등 세계 최고 브랜드 대부분의 매출 10퍼센트 이상은 한국인이 차지한다. 아시아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명품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186)
실제로 2021년 이후 여덟 개 이상의 하이엔드
브랜드가 한국 내 브랜딩과 유통을 담당하던 파트너와 계약을 종료한 뒤 한국 시장에 직접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을 공략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글로벌 투자 은행 모건 스탠리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1인당 명품 소비’가 가장 많은 국가였다. 2022년 한국인의 1인당 명품 소비액은 우리 돈 약 40만 4000원으로, 미국 34만 8000원, 중국 6만 8000원 등을 제치고 세계 최대를 기록했다. 2022년 한국 명품시장
규모는 전년보다 24퍼센트 성장해 세계 6~7위 수준인 168억 달러(약 20조 9000억 원)에 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주변에도 명품가방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많다.
(206)
사람들은 유행에 쉽게 휩쓸렸다가 유행이 지난 것에 금방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유행을 찾아 떠난다. 그사이 패스트패션 회사 CEO는 세계 5위까지 부호의 자리를 지키며 배를 불리고, 저임금 국가의 노동자들은
착취당하다 죽음에 이르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섬유폐기물은 지구를 덮치고 있다.
(219)
말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옷장에 잠들어 있는 티셔츠와 청바지도 오래오래 입을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패션이지, 페페트병으로 티셔츠나 청바지를 만들기 위한 물절약 공정 과정이 아니다. 기후위기를 고민하는 소비자도, 섬유폐기물로 몸살을 겪고 있는 지구도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제조와 판매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패스트패션 기업에게나
필요할 뿐이다. 페트병 티셔츠는 지구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매출을 늘리기 위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불과하다.
(260)
“우리가 입는 옷은 세 번 이상 세탁한 후에도 계속
입을 수 있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프란스 티메르만스가
패스트패션 제품의 형편없는 품질을 꼬집으며 남긴 말이다. 2030년까지 유럽연합 내에서 거래되는 모든
섬유 제품은 내구성, 수선 및 재활용 가능성 보장, 재활용
섬유 사용 확대, 유해물질 제거, 사회적 권리를 존중에 제조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의류 제조 과정에서부터 수선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했다. 한 옷을 오래 입게 하려는 지속가능한 순환 섬유 전략으로, 사실상
많이 싸게 파는 것이 곧 생존 전략이었던 패스트패션을 퇴출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옷을 일회용품 팔 듯
해치우며 돈을 벌던 패션산업은 이제 수선, 회수, 재사용, 재활용이 가능한 순환경제 비즈니스 모델에 한층 까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