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2)

헐버트 눈에 비친 서울은 자연의 상쾌함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첫 편지(1886 7 10)에서 서울은 쾌적한 도시입니다. 제가 얼마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면 어머니는 안도하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 신문 기고문에서, “서울은 높이 치솟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원형극장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산 정상을 따라 만들어진 서울의 성벽은 거리가 5~6마일 정도가 된다. 높이는 몇몇 곳에서는 2,000 피트도 더 된다. 도시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이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라며 서울의 공기를 반복적으로 칭찬하였다. 서울에는 매가 머리 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맴돌고, 밖에 나다니면서 정신을 못 차리다간 뱀이 목덜미에 떨어질 판이라고도 했다.

 

(47)

헐버트는 영어에서 학생들이 ‘f’‘r’, ‘v’, ‘th’ 등의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발견했다. ‘will not’‘willot’으로 발음하는 등 연어 발음에서도 어려움이 나타났다. 헐버트는 학생들이 장치 국제무대에서 영어를 원활하게 구사해야한다면서 발음 교정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문장 암송이 영어 공부의 첩경이라며, 학생들이 문장을 완전히 암송해야만 집에 갈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은 한문 서예를 공부해서인지 펜으로 영어 쓰기는 아주 잘했다. 일부 학생은 심지어 자신보다 더 잘 썼다고 회고했다.

 

(59)

헐버트는 조선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제대로 볼 책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이 직접 서양에서 가르치는 근대 서적을 출판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1890 1 27)에서 저는 조선인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이 저를 붙들도록 하겠습니다.(I am going to make myself so valuable to Koreans that they can afford to let me go.)”라면서 조선에 계속 남아 종교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정치경제, 국제법 등을 망라한 서양의 근대 서적을 조선 글자로 소개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전설과 신화를 수집하고 있으며 앞으로 책을 낼 예정입니다. 조선어와 여타 언어 사이의 유사성도 연구하고 있습니다.”라며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뒤이어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에만 관심이 있다면서 자신은 수학책도 소개하고 학교용 교과서 출판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헐버트의 이러한 결기는 조선이 근대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진정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사민필지>의 저술과 교과서 편찬 등의 결과물을 낳는다.

 

(77)

그는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했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글자 하나당 발음 하나의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 수백 년 동안 존재했다. 감히 말하건대 아이가 한글을 다 떼고 언어생활을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영어 ‘e’하나의 발음과 용법의 규칙과 예외를 배우는 시간보다 적게 든다.”라고 조선어가 영어보다 우월함을 설파했다. 그는 이어서 어떤 문장에 영국인들이 스무 단어를 써야 할 때 조선인들은 열세 단어만 쓰면 된다.”라고 조선어의 언어학적 우수성을 갈파하였다. 또한, 동사의 어형 변화 형태를 설명하면서 영어 ‘give’와 우리 말 주다를 비교하였다. 그는 “’준다의 어근이며, ‘주게는 미래시제의 어근이고, ‘주어는 과거시제의 어근이다. 직설법 형태의 어미는 모두 이지만 어간과 어미 사이의 음절 이 들어가 주난다가 되고, 이를 준다로 줄여서 말한다.”라고 풀이하여 언어학의 천재성을 과시했다.

 

(86)

<사민필지>는 단순한 세계지리 책이 아닌 각 나라의 사회제도를 폭넓게 담은 일반사회책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서양에서 출판된 지리, 사회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회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사민필지>는 머리말에 이어 태양계, 땅떵이(지구)를 설명하고, 이어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순서로 각 대륙의 나라를 개별적으로 소개하였다. 각 나라 설명에서 조선인들의 상식이 미치지 못하는 종교, 군사력, 정치체계, 사회제도 등을 담았다. 헐버트는 각 나라의 정치체계를 설명하면서 정사를 임금이 마음대로 하는 나라와 백성의 주장을 존중하는 나라로 구분하였다. 미국은 대통령을 4년마다 선출하고, 국민 대표기관인 의회가 있고, 재판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하였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주권재민 사상을 심어주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여긴다. 헐버트는 또 각 나라를 4등급으로 분류하여  정치체계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였다. 1등급은 미국을 포함해 12개 나라이고, 러시아, 일본은 2등급에, 조선은 청나라와 함께 3등급에 분류되었다. 조선은 전제군주의 나라로 신분제가 있고, 한자를 힘써 공구부하고 유고만을 준행하며, 신앙의 자유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124-125)

헐버트는 한국 교육에 종사하면서 교과서 체계를 갖추는 일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한성사범학교에 재직하던 1900년 봄 새로 부임하는 학부대신을 만나 교과서 편찬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여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고 한 편지에서 밝혔다. 여름에는 수학책을 완성하여 학부에 넘겼다며 곧 책이 출판될 것이라고 했다. 학교들로부터 여러 종류의 교과서 중문이 쇄도하고 있다고도 했다 관립중학교 시절인 1902년에도 교교서 발간을 위해 자금을 댈 단체를 고위 직급의 한국인들과 함께 구성하였으며, 보통학교에서 사용할 12권의 책을 결정하여 곧 인쇄에 들어갈 것임을 밝혔다. 그동안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책 발간이 어려웠는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뻐하였다. 각 책 당 5,000부를 찍고 책값도 비용을 감당하는 수준에서 책정하겠다고 밝혔다. 이 책들이 전부 한글로 출판되기에 한자에 대한 오랜 투쟁의 승리하고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책들이 어떤 형태로 출판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그가 교과서 편찬에, 그것도 한글로 된 교과서 편찬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127)

헐버트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주권을 잃지 을사늑약 다음 해인 1906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면서 한국인들에게 교육에 전념하여 힘을 기르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미개해서 자치 능력이 없다고 국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일본인들의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라며 한국인들에게 교육을 통해 일본을 따라잡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는 또 미국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 정신을 위배했다며 지금이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한국에 교육 투자를 강화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교육에 대한 투자에서 가장 크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이 말은 한국인들의 깊숙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라며 한민족의 성공 잠재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142)

대한제국의 안녕과 근대화는 나를 비롯한 이곳 외국인들도 마음속 깊이 원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독립은 한국인들에게만큼 나에게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한국인들의 삶과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이란 마음대로 행동하는 방임이 아니다. 타인의 희망과 권리를 무시하는 독립은 무정부상태가 뒤따른다. 진정한 독립이란 국가든 개인이든 자연물이든, 어떤 존재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적을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받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아직 자유를 살짝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앞으로 대한제국은 어느 나라로부터도 종속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랜 세기에 걸쳐 응고된 자만심, 이기심, 편견의 족쇄도 걷어차야 한다. 오랜 세기에 걸쳐 응고된 자만심, 이기심, 편견의 족쇄도 걷어차야 한다. 국가의 모든 힘을 인민의 삶의 질 향상에 쏟아부어야 한다. 대한제국은 방해받지 않고 자신이 세운 최상의 목표를 달성하는 길로 들어서고,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교양 있는 충성스러운 인민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들어섰을 때만이 자유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대한제국의 안녕을 참으로 바라는 한 사람이 한민족의 행운을 간곡하게 빈다.” 대한제국이 어떤 독립을 이뤄야 하는가를 명쾌히 제시하였고, 헐버트의 한민족 사랑이 오롯이 담겼다. <독립신문> 영문판은 헐버트의 연설을 대한제국이여 전진하자라고 이름 지으며, “헐버트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라고 보도했다.

 

(150-151)

만약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과도한 지적 부담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고, 반상제도를 고착시키고, 편견을 추구기고, 게으름을 조장하는 한자를 내던져 버리고 자신들이 모든 소리글자 체계인 한글을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데 너무 늦다는 법은 없다. 이제라도 한글을 써야 한다.”

헐버트는 또 1896 10 <조선소식>  “나는 영국인들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결국 한자를 버리리라 믿는다.”라고 하여 이미 백 년도 훨씬 전에 한글 전용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전용하고 한자가 보완적 기능을 하는 현실을 보면서 헐버트의 예지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188-190)

헐버트는 대중음악의 대표 노래로 아리랑을 선택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현저히 빼어나고 듣기에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노래라면서,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음식에서 쌀과 같은 존재이다.”라고 아리랑의 위치를 설정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조선 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주식인 쌀에 비유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까지도 읽어냈다. 헐버트는 아리랑은 1883년부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의 진짜 마지막 공연은 까마득한 미래의 일로서 아마도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원한 노래가 될 것이다.”라고 아리랑의 미래를 예견하였다. 그는 아리랑 후렴구 노랫말은 서정시요, 교훈시요, 서사시라면서,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다. 부르는 이들마다 노래가 다르다. 조선인들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조선인들의 예술적 끼를 칭송하였다. 조선 음악이 나라 밖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 헐버트는 한민족의 음악적 재능을 세계에 설파하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 젊은이들이 오늘날 케이팝K-pop으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을 한 세기도 전에 예견한 혜안이었다.

 

(215)

헐버트는 책을 마치며 한민족에세는 참으로 감동의 글을 남겼다. 그는 예언자 흉내를 내는 것은 역사가의 본분이 아니며, 역사가는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예단하려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한민족이 장차 경이적인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희망하는 예단은 허용돼야 한다.”라고 하여 한민족이 세계 속에 우뚝 서리라고 예언하였다. 헐버트가 한민족 역사를 15년 동안 천작하며 내린 한민족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자 결론이지 않은가.

 

(219-220)

헐버트는 미국인 그리피스가 1882년에 쓴 책 <은둔의 나나(Hermit Nation)>에 대해서도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책은 서양에서 조선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책으로 헐버트도 조선에 오기 전에 이 책으로 조선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헐버트가 조선에 와 보니 이 책에 오류가 너무 많았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그리피스가 조선에 와 보지도 않고 일본인이 쓴 글만 읽고 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은둔을 뜻하는 ‘hermit’이라는 단어도 오늘날의 한국인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면서 한국인들은 그저 편안하게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리피스가 미국의 한 잡지에 한국에 대해 글을 기고하며 <한국, 난쟁이 제국(Korea, the Pigmy Empire)>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기고문 내용도 백제를 히악시(hiaksi)’라고 하는 등 오류가 넘쳐났다. 헐버트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평곤> 1902 7월호에 그리피스 기고문에 대한 반박의 글을 실어 “’pigmy’라는 단어는 아프리카의 왜소한 흑인종을 가리킨다. 미국인들이 이 기고문을 읽으면 한국인을 미개한 열등 민족으로 인식할 것이 뻔하다.”라며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관한 글을 쓰려면 제발 한국에 직접 와서 보고 쓰라고 호소하였다. 1904년 런던의 한 수도원 행사에서 헐버트는 그리피스와 직접 맞닥트리기도 했다. 그리피스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친일 연설을 하자 헐버트는 그리피스에게 다가가 어디 두고 보자라며 대판 설전을 벌였다고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226)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종말>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모국 미국의 친일정책을 비난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 미국의 처신에 대해 한국에 어려움이 닥치니 미국이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사말도 없이(When the pinch came we were the first to desert her, and that in the most contemptuous way, without even say good-bye.)”라고 공사관을 맨 먼저 철수한 미국을 맹비난하였다.

 

(276)

<재팬크로니클>이 석탑 약탈을 공식화했음에도 다나까는 계속 버티며 석탑을 돌려주지 않았다. 헐버트는 국제 여론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헐버트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서도 석탁 약탈 사실을 폭로하였다. 1907 7 10일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연설을 하며 경천사 십층석탑 약탈 사건을 예로 들었다. <만국평화회의보>가 헐버트의 주장을 보도하자 <뉴욕포스트>등 국제적인 신문들이 이를 받아 대서특필하였다. <뉴욕타임스>도 헐버트 회견 시가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베델도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계속적으로 일본에 석탑 반환을 촉구하였다. 석탑 약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국제적으로 들끓자 당황한 일본 외교관들이 석탑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본국에 건의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1918년에 가서야 석탑을 돌려주었다. 두 외국인 헐버트와 베델이 이 문제를 국제여론전으로 몰고 감으로써 결국 석탑이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석탑은 조선총독부 창고에서 뒹굴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과 개관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헐버트가 현장에 가서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경천사 십층석탑은 아마도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장 사진 증거가 없었다면 일본이 과연 약탈을 인정했겠는가? 헐버트가 희망한대로 언젠가 석탑이 원래 자리인 경천사에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300-301)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은 나라의 운명은 물론이고 고종 황제와 특사들 개인의 운명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묻는다면서 7 20일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다. 7 24일에는 소위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공식적으로 접수하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시켰다. 헐버트는 특사증을 발급한 고종 황제가 퇴위 되어 더 이상 특사 자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1919년 미국 의회에 제출한 한국 독립 호소문에서, 일본이 고종 황제를 재빨리 퇴위시킨 것은 자신이 고종 황제의 특사로 조약상대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친서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고 밝혔다.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정사인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미 서거한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헐버트도 일제의 위협에 한국에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308-309)

헐버트는 1907 11월 미국의 서부 지역을 돌면서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 단체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 11 15일 자 기사에서, “헐버트 박사가 한국을 위해 진력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한인청년회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헐버트는 강연에서 제군은 낙심하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오. 일심성의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하여야 합니다. 일본이 강하다 하나 일본 문명은 뿌리 없는 꽃과 같소. 결단코 오래지 아니하여 한국에서 일인 세력이 패망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수십 년 살았기에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일본의 학정을 눈으로 보았소. 이제 미국에 돌아와서 나의 힘을 다하여 공론을 일으키려고 지금 미국의 각 지방을 다니는 중이요. 한국은 장래에 여망이 많은 나라이오니 제군은 힘을 다하여 독립 준비를 게을리하지 마시오.”라고 한국 청년들에게 호소하였다.

 

(342-343)

헐버트는 3.1혁명을 어떻게 정의하였을까.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던 <미구 한국평론> 1919 10월호에 <1차 세계 대전과 한국(Korea’s Part in the War)>를 기고하였다. 헐버트는 이 글에서 인류애가 고상함이나 영웅주의에 묻힌다면 이는 인류에 대한 모반이다. 3.1혁명은 신의 손(hand of God)’이 작용한 것이며 한국의 독립은 천부적 권리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이듬해 1 <국제관계>지에 기고한 <일본과 한국(Japan in Korea)>에서, 일본과 한국의 반목은 일본이 역사적으로 한국의 군사력을 얕보는 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하였다. 이어서 한민족은 3.1만세항쟁에서 원한과 증오를 표출하는 대신, ‘자유를 달라(We must and shall be free)’고만 외쳤다면서 3.1혁명의 비폭력 정신을 평가하였다. 이는 한민족의 문명 수준을 말해 준다고 덧붙였다. 헐버트는 1949 7월 죽음을 앞두고 가진 언론 회견에서는 3.1혁명을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정신문화적 가치라고 정의하였다.

 

(364)

2004년 다트머스대학을 방문하여 헐버트 기록을 추적하던 중 헐버트가 졸업 45주년을 앞두고 모교에 제출한 졸업 후 신상기록부가 눈에 들어왔다. 헐버트가 70을 바라보며 친필로 작성한 자신의 삶의 흔적이었다. 필기체로 휘갈겨 쓴 기록부를 세세히 읽다가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헐버트는 신상기록부 나의 일생(My Life Story)>란에 자신과 한민족의 관계를 정의하는 글을 남겼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한민족에 대한 충심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원문 : I have been fighting for the rights and liberties of 18,000,000 people whose love I hold as my most precious possession and whatever the outcome I dream that loyalty to such a cause is worthwhile.

 

(373)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일제의 한국 지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라를 잃었다는 사실에는 무한한 부끄러움으로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독립운동을 거족적으로 펼치고 나라를 되찾았다는 사실에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와중에 공화제도 탄생시켰다. 오늘날 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에 대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다면 이렇게 떳떳하게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가 해방으로 맞았지 독립운동으로 맞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형이하학적 착시 현상이다. 만약 친일파가 그랬듯이 우리 민족이 일본에 충성만 하고 독립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전승국들이 우리에게 독립을 그저 선서할 리가 만무하다. 영국의 처칠은 실제로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지 않았는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본이 패전하였다 해도 광복을 맞을 수 없었거나, 한참 뒤에나 맞았을지 모른다.

 

(408-409)

먼저 한민족은 보통 사람도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하였다. 한글은 각 글자마다 하나의 소리만 있는 우수한 글자다. 또 하나는 한민족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 전함으로 일본군을 격파하여 세계 해군 역사를 빛나게 했다. 또 하나 한민족을 빼어나게 만든 업적은 오래전 한 왕에 의해 고안된 역사 기록문화이다. 왕은 역사기록청을 만들어 국사를 편견 없이 적도록 하고, 3년마다 기록을 정리하여 3부씩 책을 만들어 각기 다른 장소에 보관토록 했다. 이 기록들은 한민족의 절대적 기본 역사서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록문화는 세계사에서 유일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한민족은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민족 흡수 문화를 보여 주었다. 기원전 1122년 중국에서 기자가 5천 명의 중국인을 이끌고 넘어왔을 때 한민족은 이들을 토착화하여 한민족으로 만들었으며, 어떠한 내분도 없이 1천 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마지막 이유는 내가 가장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1919 3.1혁명 때 보여 준 한민족의 충성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전에 만세 항쟁 계획을 알면서도 일본 당국에 밀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어떠한지를 여실히 입증하였다. 3.1혁명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이다.”

헐버트는 죽음을 앞두고 우리도 간과한 선조들의 위업을 들어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천명하였다. 우리는 자긍심을 갖지 않을 수 없잖은가.

 

(421)

헐버트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세계주의자이자 영원한 한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한민족은 두뇌가 우수하고, 독창성이 뛰어나다. 교육유전자가 남달라 성공 잠재력이 무한하다. 위기가 닥치면 단결하여 나라를 지켜 내는 끈기와 생존력을 지녔다.”라며 한민족의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풀이하였다. 헐버트는 또 생을 마감하면서,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증언하며 한글 등 다섯 가지 예를 들었다. 헐버트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한민족의 미래 가치를 확신한 참 한민족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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