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행성 충돌이나 극심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거나 압도적인 포획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못을 스스로 조르는 자기 파괴적 동물입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진행되는 전쟁을 보세요. ‘우리는 같은 종이야’라는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늑대나 토끼가 보았다면 당혹스러울 일이고, 인간을
전염병균처럼 여기며 멀리 떠나려 할 겁니다. “인간들은 서로 거침없이 착취하려 하고 심지어 서로를 살육하니, 우리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늑대와 토끼마저도
동족의 피를 묻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불행하게도 자신들이 도망할 곳마저도 인간에 의해
이미 잠식되어버렸으니까요.
(35)
우리는 성적이 좋은 아이여서, 품이 덜 드는 아이여서
우리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쓸모가 있는 아이, 동년배보다
쓸모가 더 큰 아이라는 것이 사랑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에 실패할 때, 혹은 정리해고라도 당했을 때 여러분의 아이가
여러분을 떠나거나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무용으로 아이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여러분의 소중한 아이는 죽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올 테니까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아내도 무용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람도
물도 그리고 새도 물고기도 무용으로 좋아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
병들도 나이 들어 쓸모는커녕 주변에 짐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변에 여러분을
쓸모로 평가하지 않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건, 바로 이것이 무용을 강조했던 장자의 진정한 속내였을 것입니다.
(46)
사랑이 힘든 것은, 양쪽 다가 주인이고 양쪽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자유와 자유가 만나는 팽팽한 긴장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건 상대방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떤 강요도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라는 이야기도 성립되는 셈이죠.
(77)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저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겁니다. 바퀴를 깎을 때 끌질이 느리면 끌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제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빠르면 끌은 나무에 박혀 빠지지 않습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저는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입이 있어도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끌질하는 동안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또한 제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이 일흔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155)
차라리 우리는 바람과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의 마음은 바람과 같으며, 나아가 바람과 같은 것이어야만 합니다.
구멍이 되어 바람을 맞아 소리를 낼 수도 있고,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구멍에 들어가 그
구멍에 어울리는 소리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이유입니다.
(187)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그러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기를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양생주>
(217)
설결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하니, 지극한 사람은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지극한 사람은 신비스럽지! 넓은 습지가 불타올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할 수 없고, 벼락이 산을 쪼개고 폭풍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네. 이와 같은 사람은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해와 달을 몰고 사면의 바다 밖에서 노닌다네. 죽고 사는 일도 그에게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이익과
손해라는 작은 실마리에 대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219)
기원전 4000년경 인간은 말을 마지막으로 가축화한
이후로 더 이상 다른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동료 인간을 가축화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인간 가축은 동물 가축과는 달리 말이 통하고 더 섬세한 작업에 투입할 수도 있으니까요. 거대 건축물로 상징되는 국가체제는 인간 가축화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죠.
20세기 전번에 민주주의를 자임했던 국가에서 언론이나 정치가들이 유행처럼 사용했던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입니다. 다른
국가들이 혹은 자국민들을 길들여 지배하려 할 때 반드시 병행해야만 하는 두 가지 방법을 비유한 거죠.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근과 채찍은 가축화 메커니즘의 핵심에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이 동료 인간에게
적용된 것이 바로 상과 벌 혹은 사랑의 방법과 폭력의 방법이니까요.
(324-325)
음악을 듣는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습니다. 혹은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 거실의 불을
끄거나 빛을 약하게 조절합니다. 음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은
군주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는 복종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눈을 감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상대방에 복종하겠다는 의지와 무관합니다. 음악이나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눈을 감게 됩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음이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의지라면, 눈을 감는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군주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응시하는 신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타자의 말이나 혹은 타자를
듣는다는 것은 지해에의 의지나 복종에의 의지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건 소통에의 의지니까요.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고 말합니다. ‘귀’, ‘마음’, 혹은
‘기’보다 수천 배 중요한 것은 ‘듣겠다’는 그의 의지입니다. ‘듣겠다’는 소통에의 의지가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좋고, 마음으로
듣는 것보다 기로 듣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