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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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정희진 님의 글쓰기 시리즈 3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를 읽었단다. 정희진 님의 이 시리즈는 책 제목을 참 잘 짓는 것 같구나. 1권은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2권은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이번에 읽은 3권은 제목으로 봤을 때는 가장 좋았단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편협이라는 단어는 원래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뜻을 가진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란다. 그런데 책 제목에 의도적으로 썼다는 것은, 그만큼 지은이와 이 책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란다. 1, 2권을 읽은 이들이라면, 지은이가 읽은 편협한 장르는 여성학과 페미니즘이라 생각할 것이다.

지은이는 자신이 편협하게 읽는 책들은 자신을 소생시키는 책으로 마음의 평화를 깨고 스트레스와 자극을 준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런 책들이라고 하는구나. 아빠의 책읽기와는 사뭇 다른 책읽기구나. 아빠는 재미있거나 뭔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주로 읽는데 말이야. 정희진 님이 읽으신 책들은 쫌 거리가 있는 책들인 것 같구나. 그래서인지 이번 3권에서 소개해준 책들 27권 중에 아빠가 읽은 것은 단 한 권도 없구나. 1, 2권에서는 그래도 두어 권씩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3권에서는 단 한 권도 없다니 아빠의 독서 범위가 얼마나 좁은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였단다. 읽은 것은 둘째 치고 책 제목을 들어본 것도 많지 않더구나. 아빠의 독서 범위를 좀더 넓혀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 중 몇 권을 리스트에 올려 놓았단다.

지은이 정희진 님은 편협하게 읽고 나서 치열하게 쓰신다고 했단다. 책을 읽고 나서 가볍게 책 리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또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서평을 치열하게 쓰시는 것이지. 서평은 또 하나의 창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이야. 그래서 정희진 님의 글은 서평이라고 하지만 책에 대한 소개보다 정희진 님의 생각을 읽는 느낌이었어. 그런데 정희진 님이 치열하게 쓰신 글들이 아빠에게는 읽기 쉽지 않은 글들이라서 천천히 정독하곤 했단다. 그래서 글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의미를 캐치하지 못한 경우도 많아. 아빠가 책 읽고 쓰는 것은 서평이라고 말할 수 없겠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기억의 보조 수단으로 쓰다 보니 줄거리 요약이나 간추린 글정도로 해야 할 듯싶구나.


1.

정희진 님은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신단다. 그 전에도 그렇게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글도 많이 쓰셨고 말이야. 사회적 약자를 약자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단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는 평생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와 투쟁한다고 하더구나. 사회 구성원들이 약자인 그들의 몸을 자꾸 보려고 하기 때문에다른 이들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할 일은 무엇? 그들의 몸에 대해 적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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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9)

사회적 약자는 평생을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와 투쟁해야 하는 이들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몸의 영역에는 쉽거나 작은 실천이 없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매일 밤 야식을 두고 사투한다. 타인의 시선을 상대하는 용기, 나이 듦을 인정하는 것, 아픈 상태도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라는 인식, 남의 몸에 대해 되도록 적게 말하기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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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드라마 <모범 택시>를 봤단다. 제목은 모범 택시지만, 복수대행서비스라는 말이 붙어 있단다. 법이 제대로 처벌하지 않은 흉악범에 대해 대신 복수해 주는 그런 드라마로,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드라마란다. 우리 사회는 흉악하고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질러도 법은 자꾸만 관대해지는 것 같구나. 가끔 뉴스에서 흉악범의 판결 내용을 보면, 말을 잃을 정도로 가벼운 경우가 있어. 피해자들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법이 용서한 것 같은 기분.

평생 남을 상처를 받은 이들이 가해자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아빠가 그런 일을 당해도 절대로 용서를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누군가는 용서를 해야 한다고 하고, 실제로 가해자를 용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가 나오기도 한단다. 그런데 정말 용서를 할 수 있을까? 그런 피해자들을 곁에서 직접 많이 만나 보신 정희진 님은 용서는 할 수 없다고 했어. 단지 잊혀지는 것이지.. 하지만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는 상처도 있단다. 그런 용서에 대한 솔직한 글이 좋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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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내게 용서는 저절로 잊히는 것이지, 용서를 위해 고민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겐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고 참을 수 없는 부정의다.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관련된 사건을 잊는 것이다. 사건을 무시한다.(ignore). 살기 위해 나 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일을 잊는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가 일반 법칙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 결벽증, 비사회성에 상응하는 능력은 없지만, 일중독과 자기 몰입 성향이 용서따위를 잊게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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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정희진 님은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도 많이 읽으시고 글도 많이 쓰신단다. 이번 책에서도 페미니즘 관련된 책들을 많이 다루셨어. 지은이 정희진 님은 왜 페미니즘에 대해 읽고 쓰실까. 페미니즘이 지은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고 설명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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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52)

내가 생각하는 지식으로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점이지만, 페미니즘의 정수는 스스로 내파와 파생을 거듭하는 지식이라는 데 있다. 이 변화는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의 현실, 그리고 현실의 운동이 끊임없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유행을 타는 공부가 아니다. ‘한물가거나’ ‘이제는 필요 없는페미니스트는 있을지 몰라도 페미니즘 자체가 그럴 일은 절대 없다. 이 과정이 진화다. 아직도 혁명과 개량, 진화와 일정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페미니즘은 불편함, 혁명, 폭동, 똑똑해서 미친 여자들의 병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상처럼 인류 문명의 수많은 소산 중 하나이며 진화, 즉 적응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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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어보려고 하지만, 좁은 의미의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은 읽기 쉽지 않더구나.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으로 재미있는 소설로 직간접적으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그런 책들로 만족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곤 있단다.

...

이 책은 다시 생각해보니 책을 선정하여 그에 맞는 정희진 님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희진 님의 생각들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그에 맞는 책을 고른 것은 생각이 들었단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이 서평집을 읽으면서 어렵겠지만 관심이 간 두어 권을 리스트에 적어 두었으니, 언젠가 한번 읽어보려고 해. 그리고 그때 이 책그 책에 대한 부분만 다시 읽어보고 정희진 님의 생각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정희진 님의 글쓰기 시리즈는 모두 5권이란다. 조만간에 4권을 읽어봐야겠구나. 4권의 책 제목은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로 되어 있구나. 이번에는 책이 아닌 영화 이야기인 것 같구나. 역시 책 제목은 또 환상이구나. 영화이야기이니 좀 읽기 편할 것을 기대해 보면서, 오늘 독서 편지는 이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1656년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파문 선고를 받았다.

책의 끝 문장: 다시 말해 이 책은 여성들데 대한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 남성성에 대한 질문으로 보아야 한다.


문학과 지성? 말할 것도 없이 문학(writings)은 인간의 ‘최고의’ 지적 활동이다. 우리는 현실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픽션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이건 소설로 써야 돼.", "제 이야기를 좀 소설로 써주세요.") 문학은 재현의 재현, 비유의 비유라는 점에서 언어를 생산하는 공장이자 끊임없는 사전(辭典) 활동이다. 문학은 현실에 대해 말하되, 현실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하나의 비유는 열 개의 해석을 낳는다. 비유를 통해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분화한다. 전이(轉移), 전의(轉意, 轉義)다. 은유(metaphor)는 meta(over) + phora(carrying)를 합친 단어로서 ‘뜻을 나른다’는 의미다. 시인과 소설가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 P15

모든 글쓴이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쉬운 글은 있을지 몰라도 쉽게 쓰인 글은 없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돈,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 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특히 내게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번역은 우리말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글을 다루려면 자신의 윤리와 정치적 판단에 관한 여러 번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여성학자 사라 러딕이 말한 "비판이 실천적인 개입"인 이유다. - P18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 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은 곧 자아관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는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P47

미국 정신의학자 어빈 얄롬은 이렇게 위로한다(그가 실존주의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든 이들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 그러나 배에 혼자 타고 있더라도 다른 배들의 불빛을 가까이 할 수 있다면 한결 안심이 된다." 조금 다르게 쓰면 삶의 유일한 위안은 우리 모두 비록 깜깜하고 추운 밤바다를 혼자 표류하고 있지만, 반짝이는 등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나마 소통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는 이 등대마저 ‘민영화’했고, 모든 불을 꺼버렸다. 인간은 철저히 각자(各自)가 되어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다른 말로 하면 "IT, 4차 혁명의 시대를 열렸다"). 혼자라는 상황은 갑을 관계로 이동했다. 혼자임의 조건이 몹시 악화된 것이다. - P86

이러한 과정, 다시 말해 감정의 기계화와 매개화 과정을 거쳐 저자는 감정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재현(emotions –as- representations, 옮긴이의 용어로는 ‘표상’)이라고 본다. 문화 산업은 석화(石化)된 방식으로 추상화된 감정을 사용한다. 추상적 대표적인 예는 연대가 아니라 연민, 동정(pity)이다. 동정하지만 공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탈감정사회는 대립 없는 사회다. 현대의 문제는 문화적 빈곤이 아니라 감정적 빈곤인데, 문화는 넘치고 대가로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상품이 된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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