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문학과 지성? 말할 것도 없이 문학(writings)은 인간의 최고의지적 활동이다. 우리는 현실의 고통을 말할 수 없을 때 픽션의 힘을 빌리고자 한다. (“이건 소설로 써야 돼.”, “제 이야기를 좀 소설로 써주세요.”) 문학은 재현의 재현, 비유의 비유라는 점에서 언어를 생산하는 공장이자 끊임없는 사전(辭典) 활동이다. 문학은 현실에 대해 말하되, 현실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하나의 비유는 열 개의 해석을 낳는다. 비유를 통해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분화한다. 전이(轉移), 전의(轉意, 轉義). 은유(metaphor) meta(over) + phora(carrying)를 합친 단어로서 뜻을 나른다는 의미다. 시인과 소설가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18)

모든 글쓴이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쉬운 글은 있을지 몰라도 쉽게 쓰인 글은 없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 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특히 내게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번역은 우리말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글을 다루려면 자신의 윤리와 정치적 판단에 관한 여러 번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여성학자 사라 러딕이 말한 비판이 실천적인 개입인 이유다.


(47)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 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은 곧 자아관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는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48-49)

사회적 약자는 평생을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와 투쟁해야 하는 이들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몸의 영역에는 쉽거나 작은 실천이 없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매일 밤 야식을 두고 사투한다. 타인의 시선을 상대하는 용기, 나이 듦을 인정하는 것, 아픈 상태도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라는 인식, 남의 몸에 대해 되도록 적게 말하기부터 시작하자.


(53)

내게 용서는 저절로 잊히는 것이지, 용서를 위해 고민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겐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고 참을 수 없는 부정의다.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관련된 사건을 잊는 것이다. 사건을 무시한다.(ignore). 살기 위해 나 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일을 잊는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가 일반 법칙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 결벽증, 비사회성에 상응하는 능력은 없지만, 일중독과 자기 몰입 성향이 용서따위를 잊게 해주는 것 같다.


(86-87)

미국 정신의학자 어빈 얄롬은 이렇게 위로한다(그가 실존주의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든 이들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 그러나 배에 혼자 타고 있더라도 다른 배들의 불빛을 가까이 할 수 있다면 한결 안심이 된다.” 조금 다르게 쓰면 삶의 유일한 위안은 우리 모두 비록 깜깜하고 추운 밤바다를 혼자 표류하고 있지만, 반짝이는 등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나마 소통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는 이 등대마저 민영화했고, 모든 불을 꺼버렸다. 인간은 철저히 각자(各自)가 되어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다른 말로 하면 “IT, 4차 혁명의 시대를 열렸다”). 혼자라는 상황은 갑을 관계로 이동했다. 혼자임의 조건이 몹시 악화된 것이다.


(151-152)

내가 생각하는 지식으로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점이지만, 페미니즘의 정수는 스스로 내파와 파생을 거듭하는 지식이라는 데 있다. 이 변화는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의 현실, 그리고 현실의 운동이 끊임없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유행을 타는 공부가 아니다. ‘한물가거나’ ‘이제는 필요 없는페미니스트는 있을지 몰라도 페미니즘 자체가 그럴 일은 절대 없다. 이 과정이 진화다. 아직도 혁명과 개량, 진화와 일정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페미니즘은 불편함, 혁명, 폭동, 똑똑해서 미친 여자들의 병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상처럼 인류 문명의 수많은 소산 중 하나이며 진화, 즉 적응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한다.


(198)

이러한 과정, 다시 말해 감정의 기계화와 매개화 과정을 거쳐 저자는 감정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재현(emotions –as- representations, 옮긴이의 용어로는 표상’)이라고 본다. 문화 산업은 석화(石化)된 방식으로 추상화된 감정을 사용한다. 추상적 대표적인 예는 연대가 아니라 연민, 동정(pity)이다. 동정하지만 공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탈감정사회는 대립 없는 사회다. 현대의 문제는 문화적 빈곤이 아니라 감정적 빈곤인데, 문화는 넘치고 대가로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상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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