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익주) 호구조사를
고려의 자율에 맡긴다는 것은 고려의 호구조사 결과를 몽골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고려에 설치되어 있었던 다루가치를 폐지하고 다시는 설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낸 거죠. 또한
그 당시에 고려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전부 철수하게 하고, 홍차구 같은 부원 세력이 고려의 정치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도 이제는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쿠빌라이 칸의 약속이 쿠빌라이 칸이 죽은 다음 몰골의
후손들에게 세조가 정한 옛 제도라는 의미에서 세조구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이후에는 몰골의 누군가가, 또는 고려의 부원 세력이 고려의 자주성을 해치려고 시도하면 언제나 이 세조구제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막아 냅니다. 그래서 고려가 끝까지 국가로서 유지될 수 있었죠. 충렬왕의 외교가
거둔 성과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63-64)
(이익주) 그래서
충선왕이 폐위된 지 10년 만에 복위합니다. 사실 충선왕의
전성기는 복위하기 한 해 전인, 무종을 옹립한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그때
원에서 심왕으로 책봉받습니다. 지금의 중국 선양시와 랴오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분봉받으면서 원의
여러 왕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마침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려 왕까지 되어 두
개의 왕위를 겸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원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정책이 어전회의에서 토의되고 결정되는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케식으로 부릅니다. 충선왕이 바로 케식의 일원으로서 원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면서 원의 실력자가 됐죠.
(84)
(이익주) 사실
기황후의 능력은 외모보다는 몽골 여인과는 다른 학식에 있었습니다. 한가할 때는 <여효경>과 각종 역사서를 읽으면서 중국의 역대 황후 가운데에서
본받을 만한 인물이 있는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방에서 올라오는 공물 가운데 좋은 것이 있으면
태묘에 먼저 바친 후에야 그것을 가졌다는 기록도 있고, 수도 근방에 커다란 기근이 들었을 때는 자기의
사재를 털어서 무려 10만여 명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황실 안에서 상당히 현명하게 처신했다는 기록을 보면 몽골 사람들은 잘 갖지 못했던 유교적인 덕목을 기황후가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86)
(신병주) 여기서
고려 왕의 계보를 잠깐 살펴보자면, 충선왕의 아들 강릉대군이 충숙왕이 됩니다. 그다음은 충숙왕의 장남인 충혜왕이 잇고요. 참고로 공민황은 충숙왕의
차남이죠. 충혜왕이 폐위되자 동생인 공민왕이 왕이 될 뻔했는데, 결국에는
아들인 충목왕이 고려 제29대 왕이 되죠. 충목왕이 즉위할
때 여덟 살이었는데, 4년 만에 열두 살의 나이로 병사해요. 그렇게
해서 공민왕이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생각할 때, 이번에는 충혜왕의 서자인 충정왕이 열 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공민왕은 어린 조카 두 명에게 연이어 밀린 거예요. 충혜왕이 폐위되었을 때는 충목왕에게 밀려 재수하고, 충목왕이 죽었을
때는 충정왕에게 밀려 삼수한 거죠. 결국 공민왕은 삼수 끝에 고려 제31대
왕이 됩니다.
(108)
(류근) 뭐니
뭐니 해도 공민왕이 불굴의 자세로 추구한 자주성과 독립성이 가장 인상에 남아요. 그 삼엄한 원 치하에서
어떻게든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회복하려고 노력한 그 끈기와 오기에 아름다운 고려 정신이라고 박수를 좀 보내 주고 싶어요.
(128-129)
(이익주) 공민왕은
반원 운동을 시작으로 기황후와 싸우고 덕흥군에 의해 폐위당할 뻔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죠. 그래서 이쯤 되면 권문세족들을 상대로 개혁을 추진했을 때 자기가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왕권을 대행하는 신돈이라는 사람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개혁도 추진하고 자기의 안위도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153-154)
(이익주) 그랬을
겁니다. 무신 전체는 아니고, 최영을 비롯한 몇몇 사람의
문제인데, 공민왕 대에는 홍건적과 왜구 등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변란이 계속되면서 무장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그런데도 공민왕은 이들이 더는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하고, 개혁을
통해 제거하려고 했어요. 신돈이 개혁을 시행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최영을 경주의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내보낸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관한 불만이 최영을 비롯한 무장들 사이에는 계속 있었는데,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우왕이 즉위하자 기회를 잡은 거죠. 개혁의 흐름을
중단하게 하고 그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면에서 이인임과 최영이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66)
(신벙주) 이인임
세력은 권력을 휘둘러 뇌물을 수수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제적으로 뺏는 일들을 자행해요. 혹시 수정목이라는 나무 들어 봤어요? 물푸레나무예요. 이 나무가 아주 단단합니다. 야구방망이로 만들어도 되는 나무인데, 이때 이인임의 수하들이 수정목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토기를 내놓으라며 때렸죠. 그러다 보니까 몽둥이가 국가에서 발급한 공문보다도 더 효과가 크다고 해서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 됐다는 거죠.
(206)
(이익주) 그래서
왜구는 단순히 고려와 일본의 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가 모두 관련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1388년에 중국에서 원과 명이 교체되는데, 공교롭게도 139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로 같은 해에 일본에서 북조와 남조가 통합됩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왕조 교체에 준하는 변화들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관점에서 “왜구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한 번쯤 가져 볼 필요가 있죠.
(226)
(이익주) 그렇죠. 이성계가 이렇게 강력하고 길게 자기 얘기를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입니다. 이성계가
군인에서 정치가로 점차 변신하는 모습이 보이죠. 이성계가 요동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며 내놓은 주장을
흔히 ‘사불가론(四不可論)’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여름철에 군대를 발해서는 안 된다.”와 “요동에 군대를 보냈을 때 왜구의 공격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장마철에 전염병이 돌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세 가지는 군인으로서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맨 처음에 제시한 이유는
‘이소역대(以小逆大)’라
해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면 안 된다”입니다. 이 말은 성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명분론입니다. 군인인 이성계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므로, 이때 정몽주나 정도전 같은 신흥 사대부들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됩니다.
(246)
(이익주) 저는
최영이나 이성계 모두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영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최영은 개인적으로는 참 청렴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개인의 청렴함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생각하지 못했죠. 그랬기 때문에 최영 개인은 청렴했지만, 공민왕 때는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고, 우왕 때는 이인임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요. 사회가 구조적으로 부패해 가는 것을 막지 못한 거죠. 어쨌든
최영의 죽음으로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사라집니다. 이때부터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고려 왕조로서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 된 최영에게 국제적인 감각과 사회 변화에 관한 안목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