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2)
(이익주) 고려
시대 지방 제도의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모든 군현이 같은 등급에 있지 않고,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눠집니다. 가장 위에 있는 등급인,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현을 주현으로 부릅니다. 주인 주(主) 자를 쓰지요. 그다음
등급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옆에 있는 주현으로부터 간접 통치를 받는 속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향*소*부곡이 있는데, 이 향*소*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좀 어려운 말로 잡척(雜尺)으로 부르지요. 이 작첩들은 일반 군현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세와 공물, 역
같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유지를 경작하거나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생산해 국가에 납부하는 역을 더 지므로 살기가 더 힘듭니다. 사회적으로는 천대받고요.
(33)
(신병주) 한때는
국사 시간에 향*소*부곡을 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
가르쳤는데, 최근에 바뀌었어요. 양인과 천민을 나누는 가장
큰 구분점은 국역을 지는지 안 지는지입니다. 향*소*부곡에 사는 사람들도 국역을 지기 때문에 일단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죠. 다만
하는 일이 천역(賤役)이어서 일반적인 양인과는 좀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소라는 지역은 수공업을 전문으로 해서 물품을 조달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금소에서는 금을 생산하고, 은소에서는 은을 생산하죠.
(76)
(이익주) 다소
역설적이긴 합니다만, 최충헌이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왕실은 그대로 두고 그 권위를 이용하면서 자기의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고 세습까지 했죠. 그래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가 권력을
4대에 걸쳐 세습할 수 있었던 겁니다.
(78)
(이익주) 최충헌에서
시작된 최씨 정권이 자리를 잡고 62년간 이어지는데,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역사에서 공과 사가 뒤섞이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관리들이 국가에 충성한다고 했을
때, 이 충성은 언제나 공적인 것이고 공적인 충성의 대상은 명분과 대의가 있어야 하죠. 그런데 이 시기에는 무신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충성하고 그 충성의 대가를 바라는, 사익을 위한 충성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충성이 갖는 의미가 흔들리죠. 예를 들어 몽골과 싸운 것이 고려를 위해 싸운 것인지, 또는 최씨
정권을 위해 싸운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뒤섞입니다. 이처럼 권력의 사사로이 쓰는 일이 최충헌에게
시작됐다고 해도 큰 과언은 아닐 테니, 최충헌이 남긴 부정적인 영향은 결코 작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87)
(이익주) 고려에
호감이 있었다기보다는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로 알았다는 점이 컸을 겁니다. 훗날인 1259년에 고려 태자가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납니다. 그때 쿠빌라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고려는 만 리나 되는 큰 나라다. 옛날에
당 태종이 친정했어요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나에게 왔으니 이건 하늘의 뜻이다.”
(류근) 진짜
고려를 고구려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 몽골이 그 정도로 국제 정세에 어두웠는데도 패권 국가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나마 고구려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간 보기 정도로 형제가
되자는 카드를 내밀어 본 거 같아요.
(102)
(최태성) 그
정체는 바로 초적입니다. 초적은 고려 민주이에요. 먹고살기
어려운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다가 무리를 지어 도적질하는 무리가 된 거죠. 사실 이 초적들은
무신 정권에 반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몽골군이 오니까 무신 정권에 손을 내밀고 몽골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고
한 거예요. 심지어 마산, 이 마산은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인데, 그 마산에 있는 초적 우두러미 두 명이 직접 최우에게 와서 몽골과의 전쟁에 자기들을 써 달라고 자원합니다.
(류근) 초적들이
평소에는 관군들에 쫓기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나라에 위기가 닥치니까 일단 묵은 감정은 접고 외적과
싸우자는 거네요.
(110)
(신병주) 귀주성의
승리는 이끈 김경손에 관한 기록을 보면 몽골군이 쏜 화살에 팔을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끝까지 부대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김경손이 아주 중요한 곳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는데, 몽골군이
쏜 포탄이 계속 날아오자 부하들이 김경손에게 너무 위험하니까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권합니다. 근데
김경손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면 부하들이 동요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라면서 끝까지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부대를 지휘하죠. 정말 대단한 장군입니다. 명장이죠.
(류근) 당대의
영웅이었는데, 우리가 잘 몰랐던 거네요. 진짜 감동적입니다.
(135)
(신병주) 그래서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논란이 많아요. 강화 천도가 전략적 천도인지 도피성 천도인지 판단하기가 어렵거든요. 전략으로 보는 쪽은 강화 천도가 항전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강조하고 해석합니다. 강화도라는 천연의 요새에서 오랫동안 버팀으로써 몽골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보는 거죠. 반면에 도피로 보는 쪽은 어차피 몽골에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우라는 집권자가 자기 안위를 위해 안전이
보장되는 강화도로 천도했다고 해석하죠. 이런 지적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무렵에도 여전히
초적들이 준동하고 백성들이 반란을 계속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몽골이 아니더라도 최우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너무 많은 거예요.
(179-180)
(신병주) 후대의
역사는 김윤추가 높이 평가받기에는 상당히 불리한 여건으로 지속됩니다. 원 간섭기에는 몽골에 저항한 인물이니
제대로 평가받기가 어려웠고, 조선 시대에는 신분이 승려인 김윤후가 크게 활약한 것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별로 없었죠. 하지만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에 김윤후를 언급할 정도로 그 당시에 많은 백성 사이에서, 특히 의병장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윤후가 대몽 항쟁의 상징으로 분명히 회자되었다는 거죠.
(216)
(이익주) 그
당시 고려의 상황을 평가할 때는 몽골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대제국이라는 점,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 가운데 국가를 유지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을 전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때
고려라는 국가를 유지하게 한다는 쿠빌라이 칸의 약속을 뒷날 세조구제(世祖舊制)로 부르는데, 고려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 고려 측에서는
세조구제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반대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점에서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죠.
(252)
(이익주) 우리가
흔히 삼별초의 항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삼별초만의
항쟁이 아니라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 전 백성의 항몽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평가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세에 대항해 싸웠다고 해서 무조건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죠. 고려가 28년 동안 몽골과
싸운 점, 강화를 통해 왕조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점 등을 고려해 삼별초를 중심으로 하는 항몽도 종합적으로
새롭게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