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익주) 고려가
건국된 지 100여 년 정도 지난 다음에 김관의라는 사람은 <편년통록>을 씁니다. 이 책에는 왕건의 조상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용왕 등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가 계속 나옵니다. 이것은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을 통해 개성에서 중국의 산동반도를 왕래하며 무역했다는 것을 암시하죠. 그런데 작제건(왕건의 할아버지)이나 그 선대가 활동하던 시기를 거꾸로 추론해 보면
남쪽에서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시대에 남쪽 해상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던 장보고와는 별도의 독립된 세력으로 왕건의 가문이 활동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39)
(이익주)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나았겠죠. 그리고 왕건의 가장 큰 선물은 호족이 지방에서 가지는 세력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왕건이 견훤보다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건은 자기에게 귀부해 오는 호족들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하죠.
이처럼 왕건은 중폐(重幣), 즉 선물을 많이
하고, 비사(卑辭), 즉
자기를 낮추는 말을 쓰는 태도를 보입니다. 될 수 있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거죠. 왕건도 호족이거든요. 여러 가지 동맹의 관계로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정책이 왕건에게서 나왔던 것이죠. 견훤 역시 그 지역의 호족들과 연합도 하고 결혼 정책도
펼치지만, 호족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이 왕건보다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기서
왕건과 견훤의 차이가 나타나죠.
(63)
(이익주) 제가
왕건을 위해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너무 개인사적 측면으로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왕건이 스물아홉 명의 아내를 거느린 것, 사실은 거느렸다고 하기도
뭣하지만, 아무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한 것은 여자가 좋아서라기보다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적인 계산을 한 것이죠. 왕건은 그 자신이 호족이고, 전국의 호족들은 왕건과 대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경력을 시작했죠. 이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견훤과 싸우며 신라를 계속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각 지방에서 독립 세력으로 존재하던 호족들의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력한 호족과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맹을 맺는 방법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아까 지도에 봤던 것처럼 전국 곳곳에
있는, 각 지역의 가장 유력한 호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그 호족의 지지를 끌어내려 합니다. 그 결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했던 것이고요.
(98)
(신병주) 조선
시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기록을 보면 “정도전 등이 먼저 군사를 준비했으므로 우리는 정당방어다.”라는 식으로 나오거든요. 근데 정작 난을 일으켰다는 정도전 등에게서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전혀 찾을 수가 없죠. 그래서 왕규의 난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겁니다. “왕규가 난을 일으켰으므로 우리는 정당하게 진압한 거다.” 그런데
실체가 없죠. 하지만 역사는 왕규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남았고요.
(109-110)
(신병주) 고려의
정종과 조선의 정종이 정말 닮았다고 했잖아요. 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두 사람 다 매우 짧아요. 근데 조선의 정종은 동생 태종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 무서운 동생이 정몽주와, 정도전, 방석 등을 죽이는 것을
다 봤거든요. 자기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싶으니까 동생에게 왕위를 깔끔하게 물려주고 격구와 사냥
같은 취미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냅니다.
(146)
(이익주) 광종이
즐겨 읽었다는 <정관정요>에 “창업이(創業易) 수성난(守城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는 말이죠. 고려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태조의
창업보다 뒤이어 등장하는 왕들의 수성이 그만큼 어려웠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광종과 태종 모두
수정의 짐을 지면서 어렵게 나라의 기틀을 잡은 왕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죠.
(151)
(신병주) 천추태후는
드라마로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웬만큼 역사를 아는 사람조차도 잘 몰랐던 인물입니다. 제5대 왕 경종에게는 아내가 되고, 제6대
왕 성종에게는 동생이 되고, 제7대 왕 목종에게는 어머니가
되고, 제8대 왕 현종에게는 이모가 되는 인물이에요. 천추태후를 거치지 않고는 고려 시대의 왕 네 명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157-158)
(이익주) 고려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라는 문제는 여성의 지위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지요. 재산상속 문제부터가 조건과는 다릅니다. 고려에서 부모가 사망하면
제산이 어떻게 상속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정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원칙은 “자녀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나누어 준다.”입니다.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준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의무도 똑같이 요구하는 것이고요. 예를 들어 제사는 조선 시대처럼 장남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지냅니다. 그리고 부모가 살아 있을 때 봉양하는 의무도 장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있습니다.
(193)
(최태성) 지금
말씀하셨듯이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하려고 했던 성종이 신라계를 대표했던 세력들을 후원했죠. 불교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고, 중국에 기대면서 특히 송나라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신라계입니다. 반면에 천추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장려하고, 고려가
황제국임을 내세우면서 자주적인 전통을 강조하죠. 한마디로 축약해 이야기하면 중화의 화 자를 따를 신라계의
노선을 화풍이라고 하고, 전통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노선을 국풍(國風)이라고 합니다. 화풍과 국풍의 대립 속에서 결국에는 누군가가 승자가
될 것이고, 그 승자가 만들어 가는 세상, 즉 제2의 고려는 그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19)
(이익주) 거란과
여진은 분명히 다릅니다. 거란은 몽골 계통의 유목민입니다. 우리가
아는 요라는 나라를 건국하죠. 여진은 거란보다는 우리와 좀 가깝습니다.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 고구려의 유민이 지배층이 되고 말갈족이 피지배층이 됐다고 알고 있는데, 그
말갈이 발해가 망하고 거란에 점령된 다음에 여진으로 불린 거죠. 그리고 이 여진이 1115년에 금을 건국하고 더 나중인 1616년에는 후금을 세웠다가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만주족으로 칭합니다.
(243)
(신병주) 거란의
제1차 침입 당시의 상황과 제2차 침입 당시의 상황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제1차 침입 당시의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상당히 안정돼 있었죠.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는 상황이니까 서희와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라는 인물이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해졌죠. 결과적으로 크게
보면 정치가 안정되고 지지 기반이 확실했을 때는 국방이라든가 외교에서 힘을 받을 수 있는데, 제2차 침입 때는 고려 자체가 정치적으로 무너진 것도 패배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