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중국이 백제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개척한 서진 이후부터였다. 그 전까지 중국에선 한반도 중부 이남을 삼한의 땅으로 인식했고, 때문에
백제가 대륙에 진출하기 전에는 삼한의 맹주인 마한과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에 의해 그 땅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백제가 처음 대륙에 진출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송서>와 <남제서>, <위서>, <주서>에 백제 편은 있으나 신라 편은 없는 것도 당시에 중국은 신라를 진한의 한 소국으로 인식한 반면, 백제는 대륙에 진출한 비교적 큰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사>에서는 신라의 위치를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대륙 영토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5천 리라는 개념은 백제를 대륙에 설정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수치인 까닭이다.
(167)
아신왕과 광개토왕은 둘 다 391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광개토왕은 18세, 아신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모두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들은 젊은 혈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자를 자처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선제 공격을 가한 쪽은 광개토왕이었다.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줄기차게 복수전을 꾀하였으나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젊고
용맹한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광개토왕은 백제가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을 겪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륙백제의 북쪽 요충지인 관미성과 주변 10개
성을 공략하여 얻음으로써 먼저 승기를 잡았던 것이다.
(256-257)
하지만 일본 사학계의 주장처럼 임마가 일본에 의해 지배된 것은 아니었다. 임나엔 백제, 가야, 왜의
군대가 모두 주둔하고 있었고, 백제와 왜는 대사관 격인 객관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임나의 땅 주인은 가야이다. 가야는 6개의 분국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고, 백제와 왜에 비해 국력이 쇠약했다. 그래서 가야는 왜와 백제 양국과 동맹을 맺고, 임나 지역을 자유무역
도시로 내놓고 공동 관리를 한 것이다. 덕분에 임나는 당시 최대의 국제무역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왜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중국의 제국들도 임나에서 거래되는 물품을 사갔을 정도였다. 고구려가 섭라에서 사서 중국에 팔던 옥도 역시 임나에서 거래되던 것이었다. 현재
한반도 내에서 옥 생산지가 어디였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옥은 아마도 임나 지역에서 대거 생산되었던
듯하다. 임나는 그 옥을 기반으로 경제권을 형성하고, 국제적인
무역 도시로 성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