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6)

사실, 죽음이 누구에게나 정상적이고 당연한 결말이라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막으려 한단 말인가? 어떤 장사치나 관리가 5년이나 10년을 더 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학의 목적을 약으로 고통을 덜어 주는 데서 찾는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고통을 무엇 때문에 줄이려 하는가? 첫째, 흔히 말하듯이 고통은 사람을 완성으로 이끈다. 둘째, 인류가 정말로 알약과 물약으로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킬 줄 알게 된다면, 그전까지 온갖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고 나아가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종교와 철학을 아주 저버릴 것이다. 뿌쉬낀은 죽음을 앞에 두고 무서운 고뇌에 휩싸였고, 가난한 하이네는 중풍 때문에 몇 해 동안 누워만 있었다. 그런데 안드레이 에피미치나 마뜨료나 사비슈나와 같은 사람이 아프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들의 삶은 보잘 것 없으며, 고통마저 없다면 아메바의 삶같이 전적으로 공허할 것이다.


(42)

당신도 아시다시피…” 의사가 계속해서 조용히, 띄엄띄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지성의 고결하고 정신적인 발휘만큼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은 없습니다. 지성은 사람과 동물을 뚜렷하게 가르고, 인간이 지닌 신성을 암시하며, 존재하지 않는 불멸을 어느 정도까지는 대신 인간에게 부여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성은 즐거움을 낳는 유일한 원천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주위에서 지성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즐거움을 잃은 겁니다. 물론 책이 있긴 합니다만 생생한 대화와 교제는 전혀 없습니다. 아주 괜찮은 비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책이 악보라면 대화는 노래입니다.”


(67)

이성적인 이해……” 이반 드미뜨리치가 얼굴을 찡그렸다. “외부의 것, 내부의 것……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일어나서 화가 난 듯 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신이 나를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소! 유기적인 조직체는, 죽지 않았다면 모든 자극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반응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에 대해 나는 비명과 눈물로 대답합니다. 비열함에 대해서는 분노로,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구역질로 대답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바로 삶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저급한 유기체일수록 감각이 무디고 자극에 약하게 반응합니다. 고등한 유기체일수록 더 예민하고 더 활발하게 현실에 반응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모릅니까? 의사 선생,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나요? 고통을 무시하고 언제나 만족하고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태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반 드미뜨리치가 기름기가 흐르는 뚱뚱한 농부를 가리켰다. “아니면, 고통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리도록 자신을 단련해야 하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사는 것을 그만두는 겁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현인도 철학자도 아닙니다.” 이반 드미뜨리치가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99)

상상해 보면, 1백만 년 후에 어떤 영혼이 우주를 날아다니다가 지구 옆을 스쳐 지나간다면, 진흙과 닳아 버린 바위만 보게 될 것이다. 문화도 도덕의 규범도 모두 다 사라지고 우엉조차 자라지 않을 것이다. 가게 주인 앞에서 느끼는 창피함이나 보잘것없는 호보또프나 미하일 아베랴니치의 부담스러운 우정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모두 다 하찮고 무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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