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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프로이센 건설을 원하는 국왕의 의중을 파악한 비스마르크는 1862년 9월 프로이센 의회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프로이센은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아닌 무력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 의회의 다수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독일의 통일은 철과 피를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다”라는 연설이었습니다. 여기서 철은 군대를
말하고 피는 군사의 희생을 일컫습니다. 이후 프로이센 국민들은 비스마르크를 ‘철혈재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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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일에게는 소위 ‘슐리펜 계획’이라는 전략이 있어서 나름 든든했답니다. 이 계획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독일은 동서 양쪽에서 프랑스, 러시아와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였어요. 만일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른다면 ‘슐리펜 계획’이란 전력 카드를 꺼내 쓸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1891년 독일 참모총장에 오른 알프레드 슐리펜 장군이
고안이 작전입니다. 만일 프랑스와 러시아, 동서 양쪽에서
전쟁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러시아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서 총동원령을 내린다고 해도 전쟁 준비를 하는 데 최소 7주
정도 걸린다고 계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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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도 7월에서 시간이 흘러 어느 12월 24일 크리스마스가 되었어요.
바로 이때 ‘1차 대전 전장의 기적’이라 불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김없이 총격적인 끝난 24일의 밤, 독일군 참호 안에서 조용히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어요. 병사들이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노래를 들은 반대 진영의 프랑스 영국군도 맞받아 캐럴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참호 속에서 참혹한 전쟁 중에도 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온 것입니다. 누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마치 휴전한 듯이 각자의 진영에서 무인지대로 걸어 나와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고, 사진도
찍고 음식도 나눠 먹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만큼은 서로 싸우지 말자고 하면서요. 그야말로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준 기적이었습니다.
(92-93)
무슨 의도로 폭동과 쿠데타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질문에 히틀러는 재판정에서 특유의 연설을 시작했어요. ‘나는 개인의 야망을 위해 쿠데타를 한 것이 아니다. 지금 독일을
보라. 전쟁에서 패한 후 나라는 무너졌다. 독일 국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사는데 정치인이란 것들은 서로 권력 다툼만 하고 있다. 독일은
전쟁 전보다 더 혼란스러운 상황이 됐다. 나는 독일을 다시 위대한 독일로 만들고 싶어 봉기한 것이다. 독일 국민들을 위해 일어선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히틀러 법정 연설은 뉴스가 되어 독일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당연히
독일 국민들은 열광했지요. 가뜩이나 패배감에 사로잡혀 살던 독일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도대체 히틀러가 누구야? 이런 사람이 국가 지도자가 돼야지!’라며 열광했어요.
(128-129)
점점 ‘죽음의 블랙홀’로 변해가는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1942년 11월 19일이 되어 소련군은 새로
개발한 T-34 전차를 앞세우고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갔습니다. 지원군이
도착한 겁니다. 이 T-34 탱크를 처음 본 독일군 장교들은
경악했어요. 하드웨어를 살펴보니 독일의 그 어떤 기갑 부대 전차도 당해낼 수 없는 극강의 전투력을 지닌
전차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T-34 전차는 ‘소련을 구한 애국 전차’라는 칭송을 받고 있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에겐 트라우마를 안겨준 전차예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바로 이 T-34 전차를 몰고 38선을 넘어와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니까요. 하여간 이 T-34 전차 덕분에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됩니다.
(210-211)
일본 정부는 끝까지 미국의 항복 제안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그러고는
소련에게 매달리기 시작해요. 소련에게 빨리 참전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는 일왕을 계속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으니까요.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지배권 그리고 쿠릴 열도 진출 등을 목표로 태평양 전쟁 참전 여부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답니다.
소련은 이미 시작된 미국과의 경쟁에서 태평양 지역의 패권 확보를 위해서 그리고 만주와 극동 지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태평양 전쟁
막판에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듭니다. 결국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 투화 이틀 후인 1945년 8월 8일, 일본의 소원대로(!)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죠. 그리고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 38도 선으로 인해
남북한이 분단됩니다.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