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서구 철학 전통에서 거울은 자기 인식의 단계이자 도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거울을 통한 착각에 불과하다.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본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같다면 자기 복제가 아닌가. 결국 자기
시력(視歷) 수준에서밖에 볼 수 없다. 보고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에서의 관계성이다. 인간은 자기 외부의 타자를 통해서, 나와
다른 타인을 통해서,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부분적으로 자기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46-47)
타인과 소통, 의미 있는 일에 몰두, 자신을 잊는 헌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움, 사랑, 솔로의 꿋꿋함, 실존의
조건…… 이런 인식이 외로움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이었다. 이런
삶도 외로움을 덜어주신 한다. 그러나 쉬운가? 김영갑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확실히 몰두할 대상이 있어서 나나 타인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외로움은커녕 약간 흥분 상태였다. 당시에는 처음 보는 사진이 너무
황홀해서인지 글이 읽히지 않았다. 사진가의 글은 별로라는 생각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51-52)
책의 좋은 점은 머리에 저장할 수 있다는 점인데, 나는
책읽기가 아니라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하고 있다. 생계 노동 외 대부분의 시간을 책 청소와 정리로 보낸다. 책장 청소를 위해 특별 구입한 청소기로 1차, 마른걸레로 2차, 물수건으로 3차. 주제별, 저자별, 저널별, 논문별로 분류한다. 매일
정리해도 끝이 없다. 엽서, 포스터, 문구류에 대한 집착도 있어서 그 관리도 만만치 않다. 유복은 고사하고
이사를 꿈꾸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후 기증도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 병이다.
<무소유>를
읽으면 뭐하나. 법정의 말대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니 노예가 따로 없다.
(60)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그럴까.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는구나.” 심란해하는 이들이 더 많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악랄한 이데올로기.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삶과 성취가 있다는 생애주기 개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질병 때문에 인생의 공백이 생긴 경우 누굴 탓하랴. 일본의 유명한
배우 와타나베 켄은 승승장구하던 시절 백혈병 진단을 받고 첫 단독 주연작을 포기했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재기했다.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그의 진정성과 젊은 날 투병의 영향일 것이다.
(62)
‘뒤처진 인생’이란
결국 타인에게 뒤처졌다는 얘기인데, 다른 이들도 똑같이 뒤쳐졌으므로 덜 괴로워해도 되지 않을까. 더구나 당대 자본은 나이에 맞는 지위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지위를 초과 달성한 이들을 원한다. 어차피 웬만한 사람은 다 ‘루저’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마스터플랜을 쥐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81)
지난 금요일 아침부터 겨우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이날을
기억할 정도로 올여름은 더웠다. 나만의 감식법인데 ‘8월
하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나이듦에 대한 심정을 알 수 있다.
“드디어 가을이 왔다.”고 좋아하는 이들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올해 같은 8월이
가는 것조차 서운한 이들은 스스로 나이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후자다. 인간은 원래 소통 불가능한 동물이지만
이 심정을 ‘젊은이’는 모를 것이다. 역지사지가 가장 어려운 영역은 나이 차이가 아닐까. 한쪽은 거쳐
왔고, 한쪽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완벽한 비대칭.
(91-92)
소박하게 살고 싶어서, 만사가 귀찮아서, 사람이 싫어서…… 은둔을 고민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은둔이 도피 이상이 되려면 입장이 확실해야 한다. 나의 잠정 결론. 은둔의 이유는 세상이 나를 더럽혀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더럽히므로
떠나야 한다. 마음이 편하다. 마음만이라도 거사(居士).
(117)
나는 늘 내 문제가 궁금하고 그로 인해 생성되는 ‘삶의
화학’에 골몰하는 편이다. 내게 인생의 절정, 결정적 순간은 패배 후의 복기다.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 혼돈과 의문의 시간에 바로 복기할 수 있다면! 그 깨달음의 절실함과
기쁨을 어디에 비교할까. 집약된 배움, 농축된 시간, 바둑의 복기는 요다 노리모토 9단의 휘호처럼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 다시
오지 않을 단 한번의 기회)일지 모르지만, 삶은 복기의 연속이다. 그래야 한다. 매 순간이 대국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복기는 트라우마, 집착, 후회를
가져온다. 지나간 일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154)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다. 자기 충족적
삶은 최고로 힘을 지닌 상태다. 인간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권력감이 없으면 외로운데, 자기 몰두형 인간은 권력에 무심하다. 사실, 이 행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191)
아, 참 국립국어원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여성에게
친절한 남자”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앞에 “예쁜 여성에게만” 붙이면
완벽하네요!
(220)
말을 섞는 것은 살을 섞는 것보다 관능적인 행위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나는 섹스보다 대화가 더 심각한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말이 통한 다음에 올 천국과 파국을 알기에, 되도록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엮이는 것만큼 재앙도 없다. 말은 물질이다. 말 한마디는
빚만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한다. 나는 예전에 이송희일 감독의 “우린 친구가 없으면 끝이잖아.”와 서울인권영화제 표어였던 “나는 오류입니까?”로 몇 달 버틸 양식을 구했다.
(241)
과학자는 신이 아니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자신의
정체성, 자기 연구의 의미, 자신이 속한 사회의 역사와 언어, 개인의 위치성을 알아야 한다. 동물들의 행위가 약육강식인지, 협력인지, 경쟁인지, 돌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 잠깐, 백번 양보해서 여성의 모든 문제가 호르몬이라고 치자. 그것도 모두 출산력과 관련이 있다면 저출산 시대에 여성을 보호하고 지지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나 인간 문제는 ‘팩트’ 여부가
아니라 ‘팩트’를 만들어내는 권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