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그는 <봄은 가장 잔인한 계절입니다!>라고 말하고 카페에 들어갔지요. 사람이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실은 나도 봄에는 신경질적으로
됩니다. 나도 봄이 일깨워 주는 곱고 진부한 추억과 감정 때문에 혼란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봄을 욕하고 경멸할 생각은 없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봄을
대하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봄이 지닌 순수한 자연성과 의기양양한 청춘 앞에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달베르크가 이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그를 부러워해야
할지, 경멸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51)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중요한 것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고, 근본적으로
아무래도 상관없는 소재만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미학적 형상물을 만들어 내려면 유희적이면서도 차분한
태도로, 우월한 입장에서 이러한 소재를 짜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말하려는 내용에 너무 집착해서, 그로 인해 당신의 가슴이 너무 따뜻해진다면 당신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격하게 되고 감상적으로 되며, 다듬어지지 않은 것, 아이러니가 결여된 것, 양념이 덜 된 것, 지루하고 진부한 것이 나오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냉담한 반응만을 보일 거고, 결국 당신은 좌절하여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겁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니까요,
리자베타. 감정 말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감정은 언제나 진부하고 쓸모없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망가진,
우리의 정교한 신경 조직의 발끈하기 쉬운 예리함과 차가운 황홀함만이 예술적인 것입니다. 우리
예술가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거나 비인간적으로 될 필요가 있습니다.
(55-56)
하지만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요? 안일하고 지적인
사고를 하는 일에 게으른 인류가 다른 질문과는 달리 이 질문에는 말할 수 없이 끈질긴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그런 건 하늘이 내린 재능이야!> 어떤 예술가에게 감명을 받은 착실한 사람들은
이렇게 겸허하게 말합니다. 이들의 선량한 견해에 따르면 명랑하고 고상한 감명을 주려면 그 원천인 예술가도
틀림없이 명랑하고 고상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하여 예술가의 이러한 재능이 극히 사악한, 극히 미심쩍은 <재능>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술가들이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자아 존중감이 건실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59-60)
그럼, 아까 말한
<인식>의 문제로 돌아가서,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온화하며 호의적이고, 약간 감상적이면서 남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어서 심신이 지친
나머지 파멸 상태에 이르게 된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세상의 슬픈 일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찰하고
주의 깊게 살피며,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일이라도 자신의 사고 체계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존재의 혐오스러운 허구에 대해 벌써부터 도덕적인 우월감에 가득 차서 기분이 좋은 척해야
합니다 – 네, 물론 그래야지요! 하지만 표현의 즐거움을 누리다가도 가끔씩 이런 일이 당신에게 좀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말일까요? 모르겠습니다.
(61)
진지하게 말하자면, 문학 언어가 우리의 감정을 그토록
신속하고도 피상적으로 처리하는 데는 얼음같이 차디찬, 화가 날 정도로 불손한 사정이 숨어 있는 겁니다. 당신의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면 당신은 어떤 감미롭거나 숭고한 체험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고 느낄 겁니다. 이때는 더 이상 간단한 일이 없습니다! 글쓰는 문사(文士)한테 가면 모든 거시 순식간에 정리되어 나올 겁니다. 그는 당신의 문제를 분석하고 명확히 표현하여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견해를 표명할 겁니다. 이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그에 대한 감사의 인사말도 듣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68)
“있을 것 같기도 해요. …… 토니오, 난 당신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었어요. 그러니 당신이 오늘 오후에 한 모든 말에 알맞은 대답을 해 드리지요.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말하지요! 그 해답은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당신은 누가 뭐래도
한 사람의 시민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요?” 그는
이렇게 물으며 약간 주저앉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요?
충격이 크겠죠. 또 당연히 그래야 하고요. 그러니
형량을 조금 줄여 주려고 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당신은 <길을 잘못 든 시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길을 잃고 헤매는 시민>이지요.”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그는 단호한 태도로
일어서더니 모자와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고맙습니다.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이젠 안심하고 집에 갈 수 있겠습니다. 난 처리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