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이것이 시간이다. 친숙하고 은밀하다. 시간이라는 도둑은 우리를 끌고 간다. 1, 1, 1시간, 1년의 쏜살 같은 흐름이 우리를 삶 속으로 밀어넣었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로 끌고 간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 곳에서 산다. 우리 존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의 애가(哀歌)는 우리의 영양분이 되고, 우리에게 세상을 열어주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한편, 편안한 요람이 되어주기도 한다. 세상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시간이 이끌어가는 일들을 펼쳐나간다.


(18)

시계만 느리게 가는 것이 아니다. 아래쪽에서는 모든 과정이 더 느리다. 나이가 같은 두 친구가 있는데, 한 명은 평지에 살고 다른 한 명은 산에 산다고 해보자. 수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이 만나면, 평지에서 산 친구는 살아온 시간이 더 짧아서 덜 늙어 있다. 이 친구의 집에 걸린 뻐꾸기시계는 덜 진동했고, 볼일을 볼 시간도 적었으며, 집에서 기르는 식물도 덜 자랐다. 또한 이 친구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시간도 적었다. 아래쪽은 위쪽보다 시간이 적기 때문이다.


(20)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연구할 때 수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졌다. 태양과 지구가 서로 접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는가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태양과 지구가 직접 서로를 끌어당기지는 않지만, 양쪽 모두 둘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인가에 서서히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공간과 시간만 있으니 태양과 지구가 각자 주위의 공간과 시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떤 물체가 물 속에 잠기면 주변의 물이 흐트러지듯이, 시간의 구조가 변경되면 모든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끼치고, 그들이 서로를 향해 떨어지게만든다는 것이다.


(26)

, 시간은 첫 번째 층인 유일함을 상실했다. 모든 장소의 시간은 다른 리듬과 속도를 갖는다. 다양한 리듬의 춤 속에서 세계의 사건들이 얽힌다. 세상이 춤추는 생명의 여신으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면 최소한 만 명의 여신이 있어야 할 테고, 그 여신들의 춤은 마티스의 그림처럼 거대한 군무로 펼쳐질 것이다.


(39)

이 분자들의 동요는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일부 분자들이 멈춰 있는 상태라도, 다른 분자들의 격렬한 움직임에 의해 요동이 일어나고, 이 분자들의 요동은 확장되면서 서로 충돌하고 밀어낸다. 그래서 차가운 물체가 뜨거운 물체와 접촉하면 가열되는 것이다. 멈춰 있던 차가운 물체의 분자들이 요동치는 뜨거운 물체의 분자들과 부딪히면서 움직이기 시작해 열이 오른다.


(65)

현재가 아무 의미 없다면 우주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존재하는 것이 현재 속에있는 것 아닌가? 우주가 어떤 특별한 구성으로 지금존재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생각은 이제 더는 타당하지 않다.


(68)

고대 세계에서도 해시계나 모래시계, 물시계는 지중해 주변과 중국에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상 생활을 계획할 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13세기가 되어서야 유럽에서 사람들의 일상이 기계식 시계를 통해 조율되기 시작했다. 도시와 시골에서는 교회를 짓고 그 옆에 종탁을 세웠다. 바로 이 종탑에 자리 잡은 시계가 공동체 생활에 리듬을 부여했다. 시계로 조절되는 시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76)

뉴턴의 시간은 우리 감각의 증거물이 아니라 우아한 지적 산물인 것이다. 교육받은 여러분에게 사물과 관련이 없는 뉴턴의 시간이란 존재가 단순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학교에서 이 시간을 접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조금씩, 알게 모르게 시간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전 세계 교과서들은 시간을 공통적으로 생각하도록 기타의 개념들을 걸러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교육을 바탕으로 시간에 대한 직관을 만들었다. 지금은 사물이나 사물의 움직임과 별개인 균일한 시간의 존재가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고대의 인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98)

시간은 더 이상 일관성 있는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여러 시공간들이 파동처럼 요동치고, 서로 중첩이 가능하고, 특정한 물체와 관련해 특정한 시간에 구체화된다는 이미지는 우리에겐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정교한 입자성을 위해선 최선이다. 우리는 지금 양자 중력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107-108)

반면, 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작동한다. 아주 간단한 사건이든 아주 복잡한 사건이든 더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 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응결된 것을 바람이 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 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 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 느낌의 총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당연히 사물이 아니다. 산 위에 결린 구름처럼 음식, 정보, ,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 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150)

열적 시간은 열역학, 그러니까 열과 관련이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는 유사하지 않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고 방향도 없으며 우리가 흐름이라 말할 때 부여하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161)

관점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본 수많은 것들은 이해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채도 남는다. 어떤 경험을 하든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마음과 뇌, 공간의 어느 지점, 시간의 어느 순간 안에 있다. 세상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시간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이다. 우리는 외부에서 본세계의 시간 구조와 우리가 보는 세상의 측면, 즉 우리가 세상 안에 세상의 일부로 존재함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측면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171)

생명체도 유사하게 상호 뒤얽힌 과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광합성은 태양으로부터 받은 낮은 엔트로피가 식물에 쌓이는 과정이다. 동물은 음식을 섭취하는 방식으로 낮은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엔트로피가 아니라 모두 에너지라면, 우리는 음식을 먹지 않고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세포 내부는 복잡한 화학 공정들의 네트워크로서 낮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문을 여닫는 구조물이다. 분자들은 촉매처럼 공정들의 얽힘을 촉진하거나, 반대로 억제하기도 한다. 각각의 모든 공정에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모든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생명은 서로 촉매작용을 하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과정들의 네트워크다. 간혹 생명이 특별히 질서화된 구조들을 만들어낸다거나, 국소적인 영역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고 흔히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저 낮은 엔트로피의 음식을 분해하고 소비하는 과정일 뿐이다. 나머지 우주에 존재하는 스스로 구조화된 무질서 그 자체다.


(196-197)

이것이 시간이다. 이런 특성이 우리를 매혹시키며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어쩌면 이런 고통스러운 측면 때문에 여러분도 지금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을지 모른다. 왜냐면 시간은 세상의 일시적인 구조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일시적인 변동일 뿐이면서도, 우리를 어떤 존재로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라는 소중한 존재를 선물하고, 모든 고통의 근원인 영원에 대한 허무한 환상을 만들게 한다.


(208)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시간이라는 것도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공간, 우리 신경들의 연결 속 기억의 흔적들에 의해 펼쳐진 초원이다. 우리는 기억이다. 기억과 예측을 통해 이런 식으로 펼쳐진 공간이 시간이다. 때로는 고뇌의 근원이지만, 결국은 엄청난 선물이다.


(211)

내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진화의 오류다. 수많은 동물들이 포식자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도망친다.. 그것이 건강한 반응이고 그래야 위험에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두려움일 뿐 계속되지는 않는다. 이 두려움 덕분에 유인원이 탄생했다. 미래를 예상하는 능력은 분명 도움이 되는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 유인원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 물론 두려움의 본능을 일깨워 포식자로부터 도망치게 해주기는 한다. 나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두 가지 진화의 압박에 의한 우발적이고 어리석은 간섭이자, 우리 뇌 속에서 발생한 잘못된 자동 회로 연결의 산물일 뿐 특별히 유용하다거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일정한 기한이 있다. 인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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