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렇다면 누가 님비(NIMBY)인가?
전기를 많이 쓰면서도 우리 지역에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쪽이 님비인가, 아니면
우리 지역에서 쓰는 전기도 아닌데 발전소와 송전선을 우리 지역에 건설하겠다고 밀어붙이니 거기에 반대하는 것이 님비인가? 사실은 서울과 그 인근 지역이야말로 극단의 ‘님비’이다. 외부에 전기를 의존하면서도 스스로 전기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곳이다. 게다가 발생하는 생활쓰레기도 자체 처리를 못하고 외부로 반출해서 버리는 도시가 서울이다.
(10)
그런데 이런 방식은 놔두고, 농지를 훼손해가면서 태양광발전을 늘리겠다는
것은 ‘전환’이 아니라 ‘공멸’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전력시스템 측면에서 보더라도 매우 위험하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장거리 초고압송전에 의존하는 전력시스템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경우 수도권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초고압송전선 몇 군데에서 동시에 사고가 나면 전력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전은 그 위험을 감추기 위해 송전선을 덕지덕지 건설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해답은 지역분산형으로 전환하고, 자기
지역의 전력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13)
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보면, 군수와 군청이 아예 없는 나라도 많다. 그러니 면의 주민들이 반대하는 사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대한민국도 516 군사쿠데타 이전까지는 그랬다. 516 이전의 기초지방자치는 시, 읍, 면 자치였다. 면장, 읍장도
직선으로 뽑고 면의원, 읍의원도 뽑았다. 군(郡)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이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지방자치를 중단시키면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면,읍을 군(郡)으로 강제
통합했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박정희의 ‘잔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991년 지방자치를 부활시키면서도 면,읍 자치를 부활시키지 않고 군 단위로 지방자치를
부활시킨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이상한 지방자치를 하고 있다.
(25)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생명협동운동으로서 직거래운동과 유기농운동을 결합해 도농상생의 공동체를 일구기 위한 한살림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직거래운동은 유통마진을 줄여 생산자,
소비자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상호 신뢰를 통해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내는 새로운 경제운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기농운동 역시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을 줄여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순환과 생태계 복원, 생명존중 실천이라는 의미를 폭넓게 담고 있다. 따라서 친환경 유기농업의
등장 이유를 우루과이라운드 등 농산물 수입개방 상황에서 국내산 농산물의 경쟁력 강화 차원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런 운동적 관점을 놓친 매우 협소한
시각이다.
(47)
고도로 화폐화된 자본주의사회는 세계화와 도시화로 필연적으로 귀결되어, 수많은
사회문제와 환경문제를 낳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지역화’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화폐에 담겨 있는 본래적 의미를
잘 살린다면, 화폐(국가화폐와 은행화폐) 의존적인 삶을 벗어나 지역화된 사회로 이행하는 데 지역화폐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홍동면의 지역화폐운동은 궁극적으로 화폐(지역화폐도 포함)가 부족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한
공동체로 가는 이해 도구로 지역화폐만큼이나 유용한 것도 없다.
(56-57)
샤인머스켓은 낯선 과일이다. 칠레와
FTA 협상이 타결된 이후 눈에 띄게 늘어서 수입한 청포도라고 짐작했는데, 우리 땅에서
재배하는 일본 품종인 걸 얼마 전에 알았다. 기껏 육종했건만 한국에 주도권을 빼앗겨 아쉬움이 크다는데, 약삭빠른 일본 자본도 가끔 실수하나 보다. 먹어보니 씨가 없고 아주
달다. 유기농 포도를 재배하는 이는 포도 영양분의 85%가
씨에 있다는데, 샤인머스캣은 왜 씨가 없을까? 그렇게 육종한
걸까? 아니라고 한다. 꽃이 필 때와 열매가 생길 즈음, 식물 성장호르몬인 지베렐린을 두 차례 처리한 결과이다.
지베렐린은 사람과 가축에 해가 없다지만, 복합오염 시대에 우리가 그
위험을 아직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요즘 거봉도 씨가 없다.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을 텐데, 먹기 편해지려고 씨를 꼭 없애야 했나? 바나나도 씨가 없는데, 지베렐린과는 관계없다. 우연히 씨 없는 열매를 찾아냈고, 알뿌리로 번식이 가능한 그 다년생
풀을 집중적으로 재배해 오늘의 바나나 품종이 세계 과일시장을 점유하게 되었다. 씨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깨진 자동차 유리 파편처럼 생긴 씨앗이 촘촘히 박힌 바나나를 발견하면 새 품종을 찾을 기회이므로 팔지 않으니
시장에 나오지 않을 뿐이다.
(61)
신혼부부 앞에서 주치의는 “태어날 당신 아들은 운동을 좋아할 텐데
야구에 적성이 맞고, 투수보다 유격수를 추천”할지 모른다고
리 실버는 전망했다. 젊어서 담배를 하루 한 갑 이상 피우면 60세
이전에 폐암에 걸릴 확률이 80%가 넘으니 금연을 권하거나 수정란 유전자를 폐암을 피할 유전자로 바꾸라고
권유할 것으로 예견하면서, 그런 현상을 피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자식에게 좋은 유전자를 주입하는 걸 누가 통제할 수 있겠는가? 좋은 유전자로 세대마다 바꾼
부유층은 그렇지 못한 일반 계층과 어울리지 않을 텐고 그렇게 10세대 이상 지나면 서로 다른 종으로
구별되고 서로 관심이 없어질 거라고 실버는 예상했다. 침팬지에게 인간이 애정을 느끼지 않듯.
(80)
라운드업은 광범위한 효능을 지닌 제초제일 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생명체들을 죽이는 독극물이다. 꽃가루를 매개하는 유익한 곤충이나 토양 생물을 말살한다. 라운드업레디
작물들로 인해 북반구에서 왕나비의 90%가 사라졌고, 과학자들이
‘곤충 대멸종’이라고 부르는 현실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GMO 대두를 이용하여 가짜 고기를 생산하는 일을 ‘환경적으로 책임 있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96)
“지난 2~3세기 동안
이른바 문명세계가 산업문명을 통해서 이룩했다고 하는 높은 생활수준은 실은 인간사회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끊임없이 찢고 할퀴는 난폭한 짓을 되풀이함으로써
얻어진 부산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구
자본주의의 산물인 산업경제와 그것에 의존해온 근대적 문명은, 그것이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와 지하자원을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인 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종말의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그 출발점에서부터 내포하고 있다.”
(113)
오늘날 과학기술의 힘이 막강하고, 부분적이나마 과학기술 수준이 찬탄스러운
것이라 해도, 과학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바탕과 이 세상과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해명하는 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부적절한 수단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물며, 기계론적 우주관과 선형적 진보사관에 의지하여 전개되어온 지난 수세기의 근대과학기술의 성과는 이제 인류의 파멸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지구생태계의 대재난을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온 것이 아닌가? 삶의 태반을 망가뜨리면서
그것을 진보와 발전이라고 믿어온 것은 실로 우매의 극치라 할 만하고, 완전한 미치광이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근본가정에 깔려 있는 폭력성에 대한 뿌리로부터의 철저한 반성 없이, 계속하여 더 많은 과학과 더 정교한
기술만을 구한다면 파멸은 불가피할 것이다.
(120)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생명을 부정하는 모든 사회적 목표와 권력체계를 폐기해야 하고, 경쟁의 논리에 세뇌된 우리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켜야 한다. 일찍이
미국의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퍼드가 갈파한 바와 같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결국 한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모든 수준에서 또 온갖 종류의 공동체에서
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상부상조와 애정 어린 연대와 생명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이 행성이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방향으로 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이다.
(131)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이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