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맹자가 제선왕에게 고하여 말씀하시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 자신의 팔 다리와 같이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부를 보기를 자기의 생명 같이 여길 것입니다(복심 腹心 : 뱃속과 심장이라는 뜻인데 옛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의 중추를 뇌로 보지 않고 복심, 즉 오장육부로 보았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가 기르는 개나 말 정도로 여긴다면, 신호 또한 군주를 보기를 성내를 걸어다니는 보통사람의 하나로 여길 것입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토개(土芥, 짓밟는 흙과 쓰레기. 아주 천한 것)처럼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주를 보기를 죽여야 할 원수나 적수로 여길 것입니다.


(457)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인()하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인()하지 않을 수가 없고,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의()로우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468)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사람을 감복시키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진실로 사람을 감복시켜 존 적이 없다. 그러한 동기가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저절로 그들이 교화되도록 한 연후에나 비로소 천하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다. 천하사람들이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와 감복되지 않고서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된다는 것은 여태까지 있어본 적이 없다.


(570~571)

만장이 여쭈어 말하였다: “감히 친구를 사귀는 원칙에 관하여 한 말씀 듣고자 하나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로다. 친구 사귀는 데도 중요한 원칙이 있으니ㅏ, 친구 사귐의 사이에는 장유의 나이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귀천의 신분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연줄이나 패거리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된다(沃案 : 천하의 명언이라 할 것이다. 세 번째 불협형제(不挾兄弟)”를 주희는 해설치 않았고, 조기는 사귀는 사람의 형제 중에 부귀한 인간이 있기 때문에 사귀어서는 아니 된다는 식으로 해석했으나, 그 주제는 이미 앞에서 말한 ()”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제등이(等夷)”로 보아 같은 한 동아리라는 의식, 타 인간 패거리와는 다르다는 의식, 혹은 대형교회 나가서 형제자매 찾는 연줄의식으로 보았다. 여기 맹자의 언급은 오륜에 얽매여 예의절차에만 충실한 듯이 보이는 동방문화에, 전혀 다른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가 상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래디컬한 언급이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덕과 실력 이외의 어느 것도 끼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602~603)

맹자께서 이를 반박하여 말씀하시었다: “선생의 말씀은 매우 명료하오. 물은 진실로 선생의 말씀대로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할 것이요. 그러나 과연 상하의 분별조차 없다고 할 수 있으오리이까? 물은 본시 그 자체로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소. 인성(人性)이 본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는 것과도 같소. 인성은 선하지 아니 함이 없고, 수성(水性)은 아래로 흐르지 아니 함이 없소이다. 지금 대저 물이라는 것은 손가락으로 튕겨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를 훌쩍 넘어갈 수도 있고,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 역류시키면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게도 할 수 있소. 그러나 어찌 이런 현상을 물 그 자체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그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될 뿐이오이다. 사람 또한 불선(不善)을 행하도록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은 그 본래적 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이 본성에 어긋나게 격발되듯 잘못 격발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외다.”


(637~638)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란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려두고 그곳으로 걸어갈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다시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개가 없어지는 일이 있으면 부지런히 쏘아다니며 그것을 되찾아오려고 열심이나, 자신의 마음이 사라진 것은 되찾아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학문(學問, 우리가 쓰는 학문이라는 말의 한 유래)의 길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 놓아버린 마음(放心)을 되찾아오는 걸일 뿐이다.”


(639)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의 무명지(無名指, 넷째 손가락으로서, 가장 용도가 적을 수 있기 때문에 무명(無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약지(藥指)라고도 하고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안중근도 단지동맹할 때 이 손가락을 끊었다)가 구부러져서 펴지질 않는다(“()”()”과 같다). 무명지가 구부러진 것이 별로 아픈 것도 아니고 생활에 큰 불편도 없지마는, 누군가 그 손가락을 잘 펴주는 용한 의원이 있다고 하면 진()나라나 초()나라로 가는 먼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간다. 그 이유는 단지 내 손가락이 남의 손가락 같이 안 생겼기 때문인 것이다. 내 손가락이 남의 손가락 같이 안 생겼다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남의 마음 같이 생기지 못한 것은 혐오스럽게 생각할 줄 모른다. 이것을 나는 사람이 경중을 가릴 줄 모른다, 즉 부지류(不知類)라고 일컫는다.”


(691)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한 나라의 땅을 빼앗아 다른 나라에 줄 수 있는 역량이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가 진실로 인자(仁者)라고 한다면 그러한 짓은 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죽여서 토지의 확대를 꾀한다는 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입니까? 군자가 군주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 군주로 하여금 정당한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는 것을 힘쓰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군주가 인()을 향하여 전력투구하도록 만드는 것밖에 딴 길이 없습니다.


(694)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늘날 군주를 잘 섬긴다 하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군주를 위하여 토지를 개산하여 조세를 잘 거두어들여 국고를 충실하게 할 수 있도다’. (여기 가장 포인트가 되는 말은 위군(爲君)”이라는 말이다. “위민(爲民)”이 아닌 군() 개인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뜻이다). ~ 진실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위대한 양신(良臣)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옛 성왕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모두 백성을 등쳐먹는 민적(民賊)들이다. 군주가 바른 정도의 도덕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의 실현에 근본적으로 뜻을 두지 않고 있는데 그런 불선한 군주를 부강하게 만들기를 꾀한다는 것은 곧 폭군 잡놈 걸()을 부강하게 만드는 꼴일 뿐이다.


(699)

맹자는 민중의 평동사상을 존중하지만, 왕도의 실현을 위하여 문명의 번영을 동시에 주장한다. 무조건의 하향분배는 국가문명의 수준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묵가의 사상과 대비되는 맹자의 인문주의사상이다. 문명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하며, 그 긍정의 대전제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보편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따라서 세율이 과중하면 측정이 되지만 세율이 과하게 불급해도 야만의 정치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의 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금이 문명의 번영을 이룩하여 그것이 다시 서민의 교육과 문화생활로 환원되는 피드백 시스템을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705)

집안의 가사고 그렇고 회사의 결정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결단을 내린다고 하는 것은, 그 결정 프로세스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지(衆知)를 모아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정치적 행위의 정도이다. 이 정도를 상실한 상태를 우리가 독선, 독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의 경우를 반추해보아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그래도 사회적 하자를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주변의 시세에 밝은 제자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 살고, 그들의 의견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삶의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독선과 독재를 증오하는 개방된 삶의 자세야말로 유교의 인문정신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740~74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내 주변의 인물들을 자라보는 네 가지 틀이 있다. 그 첫째가 군주를 섬긴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부류가 있다. 이 자들은 군주를 섬기면서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신경을 쓰는 아첨꾼들이다. 그 두 번째가 국가사직을 평온하게 만든다는 일념만을 가지고 있는 신하들이다. 이 자들은 물론 국가사직이 편안하기만 하면 만족하는 현실주의자들이다. 그 세 번째가 천하의 안위를 걱정한다고 뻑시는 좀 큰 스케일의 천민(天民)이 있다. 이들은 천하를 움직이고자 하는 포부가 실현될 수 있는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할 때에만 출사하여 행동하는 부류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기회주의자들이며 공리에 밝은 인물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인물은 네 번째의 부류이니 곧 대인(大人)이다. 대인은 오직 세태에 관계없이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주변의 모든 사물이 바르게 되는, 그러한 인물이다.”


(742)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에게 삼락(三樂)이 있으니,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되어 왕도를 구현하는 일조차도 이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엄마 아버지가 다같이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형과 동생이 모두 별 사고 없이 지내고 있으면 그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아 부끄러움이 없고 인세를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그러한 공명정대한 삶의 모습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그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군자에게 이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외어 왕도를 구현하는 일조차도 이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아니 하노라.”


(751)

민중의 삶의 도덕성의 기초를 통치자가 민생으로써 체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맹자의 주장은 만고의 명언이며 고금에 통용되는 철칙이다. 20세기에 아무리 서구 정치학과 경제학이 발달했다 한들 이러한 맹자의 주장을 구현하는 데 별 도움이 없다. 우리나라 경제학의 태두이신 조순 선생께서 서구의 경제학은 결코 한국의 경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경제는 수리가 아닌 상식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봐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절약이라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유교의 절약은 묵가의 절용과는 달리 예()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소비는 더 올라가서는 아니되는 한도가 있는가 하면 더 내려갈 수 없는 한도가 있다. 그 한도의 표준을 ()”라고 하는 것이다.


(760~76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도 같다. 우물을 판다는 것은 반드시 끝까지 지하수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 파기를 구인(, 조기는 1() 8()이라고 했다. 혹자는 7척이라고 한다. 9인이면 상당한 깊이를 나타낸다)이나 했어도 지하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중단해버리는 것은 우물 파기를 처음부터 포기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우물을 안 판 것이나 마찬가지다.”


(795)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소목장, 대목수, 수레바퀴공, 수레거푸집 장인과 같은 최고의 기술자들도 후학들에게 콤파스와 곡척의 원칙을 가르쳐줄 수는 있으나, 후학들로 하여금 명인의 솜씨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자득하는 것이다.”


(818)

맹자께서 방황하는 그의 제자 고자(高子)를 타일러 말씀하시었다: “산봉우리의 작은 길도 당분가 사람들이 열심히 그 길로 다니면 탄탄한 좋은 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길로 당분간 사람들이 다니지만 않아도 금새 억새 같은 잡초로 길이 막혀 버리고 만다. 학문이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정진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너의 마음은 억새로 덮여 길이 보이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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