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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프랑스인은 토착민인 리구리아족과 이베리아족에 켈트족, 로마인, 프랑크족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여기에 오늘날에는 세계 여러 나라 특히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프랑스인의 구성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실로 프랑스는 유럽의 인종 용광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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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그들은 백작이라고 불렸고, 그들이 소유한 영지는 백작령이라고 불렸다. 몇 개의 백작령을 합한 대영주들도 나타났는데, 그들은 후작 혹은 공작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 프랑스는 여러 개의 백작령과 공작령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프랑스 동부에는 강력한 부르고뉴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루아르 강 북부에는 프랑드르 공국이, 서부에는 로베르 르 포르 공국이 있었고, 이 두 개의 공국 사이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노르만족에게 양도한 노르망디 공국이 있었다. 이런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과 공작들은 상위 군주로서 왕을 섬기긴 했지만, 각자 가지의 영역을 다스리는 독립된 세력이었다.


(266)

그러나 그것 역시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전체적으로 18세기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계몽사상이나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렇다면 대혁명 이후 그들이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은 계몽사상의 영향 때문이라기보다는 1775년에서 1789년 사이에 악화된 사회적 대립과 경제적 침체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그들의 혁명적 행동은 정치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항거였다.


(291-292)

정통주의 해석의 역사학자들, 예를 들면 올라르와 마티에, 르페브르, 소불, 미슐레 등은 프랑스 대혁명을 근대 시민 사회를 탄생시킨 시민혁명으로 본다. 그들에 따르면 대혁명에 의해 절대군주제가 타도되고 대의제가 정착되었으며 합리적 계몽사상이 사회전반에 확립되었다. 그리고 대혁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소규모 생산자들에게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줌으로써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혁명은 봉건적 특권 사회를 평등한 시민 사회로 전환시킨 사회혁명이었다는 것이 정통주의 역사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정통주의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신화적 해석이라고 비판한다. 실제 그들이 보기에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 사회, 경제, 사상에 걸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사회 혁명은 아니었다.

수정주의 해석은 영미 역사 학자들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프랑스 역사학자들의 폭넓은 지지도 받고 있다. 수정주의 해석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코반이었다. 그에 의하면 18세기 프랑스 사회에는 영주제의 잔재가 남아 있긴 했지만 혁명적 부르주아가 타파했다는 봉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은 봉건제를 타파하고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민의회 의원들의 직업을 분석한 결과 혁명을 일으킨 세력은 부르주아 본래의 의미인 자본가들이 아니라 대부분 관리와 자유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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