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율리시스>에 관한 서평은 어렵고 재미없다는 것만 믿어야 하지 의외로 재미난다는 말로 선량한 독서가를 현혹하는 선동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정말로 <율리시스>를 읽고 이해한 지인이 있다면 다른 종교를 믿지 말고 그 분을 신으로 모셔야 한다. 그런데도 왜 독서의 고수들은 <율리시스>를 권하는가? 왜 우리는 <율리시스>를 읽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율리시스>를 읽는다는 것 자체로 이미 당신은 독서가의 최고봉에 등극하기 때문이다. 이해 따위는 필요 없다.


(62)

출판사가 독자에게 하는 가장 불친절한 행위 중에 하나는 러시아문학 작품을 내면서 등장 인물의 이름을 따로 정리해주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 독자가 러시아 고전을 읽으면서 겪는 가장 불편함이 이름의 난해함이라고 생각한다.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을 사랑하는 나는 2000년에 나온 초판, 2002년에 나온 신판, 그리고 2007년에 나온 수집가용 한정판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읽는 것은 휴대성이 가장 좋고 표지가 예쁜 2002년판으로 읽었다. 표지가 뭉크의 그림으로 장신된 빨갱이버전 말이다.


(90)

좋은 책이란 이런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독자에 따라서 너무나 천양지차의 매력과 경험을 느끼게 한다는 것. 어쩌면 내가 머리가 너무 나쁘기보다는 너무 좋은 책이라서 같은 책을 두고 개인에 따라서 극히 독특한 책 소개를 하게 만들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같은 책을 두 번 주문하긴 했지만 두 번 모두 주문으로 이르게 하는 즐거움과 설레는 책 소개를 읽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혹시 의학용어로 치매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되기는 한다.


(120)

오장환 시인은 1937년 시집 <성벽>을 발표했으며 서정주, 이용익과 함께 당시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고 심지어 시의 황제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때 많은 문인들이 친일 성향을 보였지만 오장환 시인은 꿋꿋하게 지조를 지켰다. 서정주 시인과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우정을 나눈 것이 <화사집>을 출간하는 인연이 되었다. <시인부락> 1936년 당시까지만 해도 문단에서 그럴듯한 명성이나 경력이 없는 서정주가 주도를 해서 창간을 한 소박한 시 동인지였다. 시 동인지에 주소지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나 오장환 시인도 <시인부락>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시인부락>의 주소지를 자신의 자택 주소로 삼았다.

회원들 또한 서정주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무명 신인들로 김진수, 김달진, 오상원 등이었다. 부락이라는 명칭 또한 무슨 심오한 뜻이 아니고 그냥 여러 민가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을 뜻하는 그 부락이다. 시작이 미약했고 끝도 미약했으나 2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했다. 오장환은 미당이 친일 활동을 한 이후로는 교류를 끊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더라도 인사도 하지 않으며 친일파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한다.


(235)

임화는 조선의 랭보라는 찬사를 받으며 윤동주, 백석, 황순원과 일제 강점기 문화계를 대표하는 꽃미남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다. 시인으로서 임화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단편 서사시를 시도했다. 그가 쓴 단편 서사시의 대표작은 <우리 오빠와 화로>, <젊은 순라의 편지>, <어머니> 등이 있다. 문학비평가로서 임화는 우리나라 비평의 근간을 구축했다. 임화는 영화 주연배우로도 활약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업적은 화려했지만, 말로는 불우했다.

24살의 나이로 마르크스 문학을 지향했던 카프의 서기장으로 활약하다가 광복이 되고 나서 박헌영과 함께 월북했지만, 남로당 숙청 작업이 한참일 때 미국의 스파이, 친일 행위, 반소련, 반공의 죄를 뒤집어쓰고 총살을 당했다. 북한에서 처형되었던 임화는 남한에서조차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문학가로서는 더 치욕스러울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264)

백석의 시에 대한 가장 찬란한 찬사는 이런 수치보다는 그의 연인이었고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주인공인 자야(김영한) 선생의 한마디다. 김영한 선생은 그 가치가 일천억 원에 달하는 대한민국 3대 요정인 대원각을 아무런 대가 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여 사찰 길상사를 세우게 한 인물이다.

기부한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1,000원 재산이라고 해봐야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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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3 0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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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3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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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3 1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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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3 1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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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4 0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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