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시설에서 12년을 보낸다면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똑 같은 옷, 똑 같은 식판, 똑 같은 음식, 똑 같은 교실에 익숙한 채로 자라다 보니 자신과 조금과 달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왕따를 시킨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난 사람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생 양계장에서 키워 놓고는 닭을 어느 날 갑자기 닭장에서 꺼내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 보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양계장 같은 학교에서 12년 동안 커 온 아이들에게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다.


(51)

다양한 형태와 높이의 천장과 다양한 모양의 교실 평면도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대형 건물보다는 스머프 마을 같은 느낌이 나야 한다. 운동장 주변의 담장을 허물고 가까이에 가게를 두어 주변의 감시를 통해 안전한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방과 후 시민들이 운동장을 광장처럼 사용하고 마을 주민 전체가 아이들을 키우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학교 건축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의 학교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전 정신이 없고 전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국민만 양산할 것이다.


(83)

현대사회의 특징들은 TV 방송 매체에서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방송은 많은 사람이 보기 때문이다. 방송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반영한다. 대중의 요구는 곧 그 시대의 정신이다.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에는 시대정신이 반영된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은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최초의 디자인이 건축되어 한 명의 건축가의 머리에서 나올지 몰라도 적어도 그 디자인이 건축되어 우리 눈에 보이려면 공사비 대출을 해 주는 은행, 건축주, 시공자, 허가권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방송과 마찬가지로 건축물도 여러 명의 공통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지어지기 때문에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사는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 안에 사는 많은 사람의 건축적 이해와 가치관의 수준이 반영된 것이다. 좋은 도시에 살고 싶은가? 나부터 좋은 가치관을 갖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58)

건축 리모델링은 재즈와 같다. 이름 모르는 과거의 어떤 건축가가 수십 년 전에 디자인한 건물 위해 현재의 건축가가 이어서 연주하는 것이 리모델링이다. 앞선 사람이 펼쳐 놓은 기본 멜로디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음을 펼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과거의 것을 따라만 가서도 안 된다. 제약 가운데서 자신의 개성을 펼쳐야 한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가는 백 년 전에 지어진 기차역의 구조에 덧대어 아름다운 미술관을 건축했다. 기차가 다니는 곳은 조각품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군데군데 무거운 쇠로 만들어진 철길에서 모티브를 따온 디테일들도 보인다. 이 공간을 보면 두 명의 건축가의 연주하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재즈 음악이 들리는 듯하다.


(222)

건축가 지오 폰티는 계단은 두 개의 다른 공간을 연결해 주는 멋진 건축 요소라고 말했다. 계단을 올라가면 걷기만 할 뿐인데 우리의 키가 자라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반대로 내려갈 때는 줄어드는 체험도 하게 된다. 계단 위에서는 우리의 눈높이가 계속 바뀌는데, 눈높이의 변화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속 주인공 키팅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라고 요청한다. 작지만 수십 센티미터 커지는 그 시점의 변화가 엄청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일상에서 그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다. 어린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데 어쩌면 키가 작은 아이가 어른보다 커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어서일지도 모른다.


(294)

홍대 앞의 인기는 강남 못지않다. 사람들은 종로의 익선동과 부산 감천마을도 좋아한다. 이들은 강남을 흉내 내지 않는다.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홍대 앞은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익선동은 아파트 단지 대신 마당과 골목길을 가지고 있다. 신도시가 똑 같은 강남 방식으로 양산되면 지역별로 줄 세우기가 될 뿐이다. 후발 주자일수록 나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처럼 정치가들과 부동산 업자들이 강남만 따라 하게 두지 말고 재능 있는 건축가들을 제대로 고용해서 지역성이 드러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진주는 진주다운 도시가 되고, 속초는 속초다운 도시가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앞선 지역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개발, 그것이 진정한 지방정치고 지역 균형 개발이다.


(297)

영화 <블랙 팬서>는 겉으로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지만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시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의 잠재적 위험이 만들어지는 방식 등 현재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담긴 영화다. 그중에서도 건축가인 필자의 마음에 가장 남는 이야기는 벽과 다리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마지막에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라고 말한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벽을 세우고 있는 트럼프한테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302-303)

이처럼 2층 양옥집은 보일러의 보급과 함께 생겨났다. 얼마 후 철근콘크리트와 보일러를 합쳐서 만든 아파트가 나타났다. 당시 아파트는 12층까지도 지어졌다. 고층 아파트가 부동산의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역사 이래 하늘 아래 빈 공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건축 업자가 고층 건물을 지으면서 공중에다가 없던 부동산 자산을 만든 것이다. 조선 시대 경제 계급은 극소수의 지주와 대다수의 소작농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한된 땅덩어리에 살던 우리에게 부동산은 일부 부유층의 소유였을 뿐이다. 그런데 아파트로 인해 부동산이 늘어났고 직장에서 일해서 아파트를 사면 누구나 부동산을 소유한 지주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경제의 파이가 커지고 중산층이라는 계층이 생겼고, 근대화가 시작됐다. 모든 것은 보일러에서 시작됐다.


(370)

제대로 설계된 공간은 갈등을 줄이고 그 안의 사람들을 더 화목하게 하고, 건물 안의 사람과 건물 주변의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도 더 화목하게 한다. 좋은 건축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다. 물론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갈등을 조금이라도 더 해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화목하게 만드는 건축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될 수 있다. 세상을 더 화목하게 하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건축을 조금씩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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