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무로 높고 강력한 파도라도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       슈테판 츠바이크


(90-91)

, 다른 말로 하면 삶에 철학적 깊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지요. 바로 이 부분이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입니다. 중세는 흔히 암흑시대니 뭐니 해서 역사가 후퇴한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면적으로 아주 깊은 성찰을 했던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듯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답하는 시기이기도 했고요. 또 앞으로 보겠지만 신은 어떤 존재여야 하고 신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끝없이 탐구하는 과정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96)

참고로 가톨릭의 경우 지금도 공의회가 열립니다. 가장 최근에 열린 공의회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여기서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미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 공의회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성당에서도 라틴어로 미사를 지내야 했겠지요. 생각해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공의회라는 합의 방식이 지금까지 지켜진다는 사실이 대단하지 않나요?


(133)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도들이 메카, 메디나와 함께 3대 성지로 모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방금 본 사진 속 바위 돔 사원이 매우 화려하게 지어진 거죠. 이 사원의 황금빛 지붕 밑에는 큰 너럭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 바위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알라신을 만나기 위해 하늘로 승천했다 돌아온 장소라고 알려져 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바위는 유대교와 기독교인에게도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로 이 바위 위에서 아들을 신에게 제물을 바치려 했다고 하거든요. 이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133-134)

그래서 오늘날의 예루살렘은 분쟁의 땅이기도 합니다. 뒤 페이지 지도를 보세요. 일단 이 도시는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구역이 있고, 여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는 지역도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왔던 소수 민족입니다. 이렇게 사방 1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지역 안에 각자 이곳이 자기 종교의 성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옹다옹 모여 있으니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겠죠.


(147)

11세기 무렵 기독교가 동서로 분열하며 서쪽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가톨릭이, 동쪽에는 비잔티움 제국을 중심으로 정교회가 세워집니다. 가톨릭은 교황이, 정교회는 총대주교가 대표하게 되었죠. 이렇게 분열한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는데, 이름에도 그 주장이 드러나 있습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단어는 보편성은, 정교회를 가리키는 오서독스(Orthodox)는 정통을 의미하거든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정교회는 지금도 러시아와 그리스에서 국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기독교 종파입니다.


(183-184)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고대 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중세가 시작된 때라고 합니다. 물로 동로마는 로마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콘스탄티노플의 단단한 방벽 뒤에서 1000년을 더 살아남긴 했지요. 그러나 살아남은 동로마를 고대 로마제국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고대 로마제국의 중심이 이탈리아 반도였다면 동로마제국의 중심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소아시아 지역이거든요. 당연히 동방 문화권이고요.


(237-238)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간은 진리를 볼 수 없지만 예술이 진리를 보는 눈이 되어줄 수 있다고 했지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작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창작은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만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스스로 진리를 말하지 않으므로, 사실로부터 진리를 알아내려면 시나 그림 같은 예술적 창작이 주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모방을 긍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의 본능이고, 교육도 결국 모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방의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지요. 또한 사람들이 그림을 보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고 그림이 모방하려 한 진리를 추리하거나 상상하면서 그 차이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323)

보통 르네상스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가 잘 아는 15~16세기의 르네상스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르네상스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8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이어진 카롤링거 르네상스입니다. 이 시기에 드디어 본격적인 중세를 망라할 사회제도, 기독교 교리, 중세적 감수성 전체가 선명해집니다. 더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유산들이 복원되기 시작했고요. 초기 기독교 시대의 혼란을 넘어 서유럽 세계의 질서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중세의 암흑기가 거의 끝나간다고 할 수 있지요.


(335)

샤를마뉴가 사랑받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샤를마뉴가 화려한 로마시가 아니라 소박한 북쪽의 고향 땅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교황에게서 로마 황제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했지만 샤를마뉴는 평생 로마 시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여러 거점에서 나라를 통치하다가 지금의 독일 아헨에 수도를 정한 후로는 쭉 그곳에 머물렀죠. 샤를마뉴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흥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던 거예요. 샤를마뉴 치세에 게르만 문화와 그리스 로마 문화, 그리고 기독교가 융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래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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