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지금까지는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고 해도, 앞으로 나올 관측이나 실험
결과도 만족시킨다는 보장이 없지요. 그래서 포퍼는 확실한 것은 반증밖에 없다고 했고, 또 반증을 통해 잘못된 이론을 버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학이 진보하는 기본형식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은 끝없는 ‘추측과 반증’의 과정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추측이란 확실하지 않은 가설을 제의한다는
의미입니다.
(52)
또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은 이미 이런 충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이 미리 만들어놓은 비교적 경직된 상자
안에 자연을 처넣으려는 노력이다.” 포퍼가 보고 화가 났을만도 한 말이지요. 자연을 인간의 선입견에 맞게 처넣다니! 자연이 보여주는 대로 따라가며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포퍼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고 과학적 태도인데, 쿤의 주장은 정반대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에서 먼저 틀을 잡고 자연을 어떻게 하면 그 틀에 더 잘 집어넣을 수 있는가를 연구라는
것이 정상과학입니다. 그리고 쿤은 그런 독단적이면서 체계적인 노력을 통해 정상과학은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빠르게 확실한 발전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87)
과학에서 측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 중에 영국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물리학자 켈빈 경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늘 말하지만, 우리가 논의하는 내용을 측정해서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면, 뭔가를
아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지식은 변변치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어떤 주제이건 간에 측정하지 못하고 논하는 것은 지식의 시작은 될지 몰라도,
과학적이 되려면 아직 한참 먼 것이다.”
(107)
현대물리학에서는 빛의 속도를 일정한 숫자로 정의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길이를 정의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광속을 초속 299,792,458미터라고
하면, 1미터는 빛이 1초 동안 가는 거리를 299,792,482로 나눈 것이 된다. 그렇다면 1초는 어떻게 정의할까?
(117-118)
과학의 발전과정은 단순한 진보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융합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기준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는 보수적 의무감과, 그러나 옛날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진보적 의무감을
동시에 소화해내야 합니다. 과학뿐 아니라 우리 일상 생활도, 정치적, 사회적 발전도 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식은 부모보다
더 잘나고 싶어합니다. 부모도 자식이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식은 자신의 시작점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물려받은
것을 존중하며 시작하되, 더 잘해서 원점보다 훌륭하게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141)
물론 쿤도 패러다임이 바뀐다고 해서 자연 자체가 변한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자연은
자연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패러다임은 우리 머릿속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세상’이라는 것은 패러다임을 통해서 걸러져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자연’ 그
자체를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관측을 통해 자연을 알게 되는데 그 관측은 특정한 패러다임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자연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지요.
(170-171)
그러나 아직도 실재론을 버리기가 힘겹기도 합니다. 우리가 실재론자들의
주장 중 보존해야 할 것은, 과학지식은 제멋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과학은 인간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게 기본 입장이고, 그런 입장이 없다면 과학은 전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실재’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실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이런 해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판 위키백과를 보면
조금 더 명확한 정의가 나옵니다.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 그것을 좀 쉽게 말하면 실재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한다고 봅니다. 자연은 우리의 허튼 수작을 허용하지 않고 저항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발명한다고 해도 자연이 협조를 해야 가능합니다. 자연이
협조한다든지 저항한다는 것은 은유적 표현인데, 그런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실재인 자연, 그 자연이 정말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표현할 언어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은유적으로 자연을 의인화해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250)
화학혁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극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1794년, 라봐지에는 자신의 장인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들은 세금징수 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혁명
전 프랑스 정부는 세금징수를 사영업체에 하청했었는데 그 회사가 왕과 계약을 맺어서 징수액 목표를 정했고, 그
이상의 징수액은 이익으로 챙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혁명가들이 라봐지에를 민중의 적으로 규정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고 살려두었다면 국가를 위해서도 유익한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느끼는 아이러니는, 그가
그렇게도 집요하게 죽였던 플로시스톤에 대해서도 똑 같은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283)
제 생각을 단순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창조교육, 탐구교육을 시도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잘 압니다. 그 뒤에 정답이 다 버티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결국 물이 H2O라는 등의 정답으로 가야 한다고 느끼는 학생들이, 정말 독립적으로
뭔가를 생각해 볼 동기를 갖기란 힘들다고 봅니다. 또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창조적으로 탐구를 시킨다고
하면서도, 그 과정을 통해 학생이 정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안 된다는 조바심을 느낍니다.
(325)
저널을 창간한 3년 후에 니콜슨은 자기 일생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될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저명한 의사였던 친구 칼라일과 함께 한 연구결과를 보고한 것인데, 전지를 사용한 최초의 전기분해였습니다. 볼타가 전지를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따라서 실험하다가 전기의 작용으로 물이 산소와 수소로 분해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전기분해의 중요성을 현대과학자들은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때까지는 서로
아무런 확실한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었던 전기와 화학을 연결한 것은 엄청난 결과였습니다. 결국은 화학의
진로 자체를 바꿔놓은 성과였던 것입니다. 이 연구결과를 니콜슨은 다른 데 보내지 않고 자신의 저널에
냈습니다. 그 결과가 또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서 많은 다른 연구를 촉진했고, 이런 식으로 중요한 논문들을 상당수 게재한 니콜슨의 저널은 시시한 잡지에서 일약 가장 중요한 학술지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저자의 글도 내용만 흥미롭다면 받는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니콜슨은 민중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을 벌인 것입니다.
(398)
요즘 길 찾는 네비게이션을 많이들 쓰지요. 그것은 정말 20세기 말기 과학의 기가 막힌 업적입니다. ‘전 지구 측위 시스템(global positioning system, GPS)’을 기반으로 한 것인데, 지구 주위에 많은 인공위성을 띄우고 거기서 원자시계를 돌리는 것이 기본구조입니다. 그런데 위성을 발사하고 조정하는 원리는 위에서 말했듯이, 아직도
뉴튼역학입니다. 그 반면 원자시계의 작동원리를 양자역학입니다. 게다가
그 원자시계는 상대성이론을 써서 수정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중력장 내에서의 그 시계 위치와
또 시계가 실려 있는 위성의 운동속도에 따라 시계가 가는 속도가 달라지는데, 그것을 수정하려면 일반상대성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둘 다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융합된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운영되는 시스템으로부터
지구상 우리에게 현 위치를 가르쳐주는 신호가 내려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네비게이션을 보면서, 뉴튼역학도 모르던 사람들처럼 지구는 평평한 것으로 생각하며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걷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전근대적인 관념부터 고전역학과 몇 가지의 20세기
첨단 물리학 이론까지 전부 잘 뭉뚱그려서 융합한 훌륭한 실천체계입니다.
(411)
과학의 독재도 독재입니다. 물론 과학보다 더 못한 것이 지배하는 독재보다는
낫겠지요. 하지만 과학에서부터 남들이 그렇다면 그렇고 특히 전문가나 높은 사람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신봉하는 태도를 키운다면, 우리의 일상생활과 정치행태에 아직도 팽배해 있는 권위주의적 태도를 더욱 권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반면, 시민들이 진정한 독립적 과학탐구를
배우는 것은 권위주의와 이데올로기에의 맹종을 막는 가장 확실한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교육적 효과를
이루고자 한다면 과학을 다원주의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최상입니다.